신앙이 된 '4차산업혁명', 여러분 믿습니까?

[신년기획 - 뉴미디어] '직업 없는 미래'의 노동과 기업①

등록 2017.01.31 14:37수정 2017.07.03 14:48
21
원고료로 응원
a

캘리포니아 프리몬트에 있는 테슬라의 생산라인. 제조업 공장에서 흔히 보이는 컨베이어 시스템은 사라지고, '로봇팔'들이 금형, 조립, 접합, 운반, 도색까지 모두 처리하고 있다. ⓒ Steve Jurvetson


새로운 유행어가 한국사회를 강타했다. '4차산업혁명'이다. 이 말이 인기를 얻으면서 클라우스 슈밥은 하루아침에 스타로 부상했고, 덕분에 그의 (논문에 가까운) 따분한 책까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슈밥이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을 창립한 뒤 스스로 회장을 맡으며 재계와 정계에 영향력을 발휘해 오기는 했으나, 결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2016년 다보스포럼의 주제를 '4차산업혁명'으로 정한 뒤, 그 생소한 개념이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스스로 나팔을 분 격이기는 하나, 그 덕분에 슈밥은 한국에서도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는 지난해 10월 초청을 받아 한국을 방문했고, "4차산업혁명과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특별 대담까지 열었다. 슈밥 회장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를 둘러보며 칭찬하기도 했다.

예상할 수 있듯, 한국 정부는 즉각 '4차 산업혁명 전략위원회'를 신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언론도 가세해 '4차산업혁명' 특집 보도를 열심히 쏟아냈다. 이 유행어가 얼마나 '핫'했는지, 직무정지 중인 박근혜 대통령까지도 슈밥의 책을 읽고 있다고 한다.

그뿐인가, 박 대통령은 최근 논란이 된 1인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통합진보당 해산'과 '4차산업 기반 조성'을 자신의 업적으로 꼽았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지금 4차 산업혁명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데 취임하면서 창조경제, 문화융성 이런 것을 통해서 4차 산업혁명이 이뤄질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는 데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박 대통령만이 아니다. 유력 대선주자들이 앞다퉈 '4차산업혁명 대비책'을 자신들의 공약집에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좀 '김 새는' 질문을 던져 보려고 한다.

'4차산업혁명'이라는 게 정말 존재할까? 당연히 이 '무식한 질문'에 열띤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그 뜨겁던 '3차산업혁명' 열기는 언제 다 꺼졌을까

올해 초 <한겨레>는 4차산업혁명을 주제로 대담을 열었다. 여기 참여한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는 "틀림없이 곧 '4차산업혁명은 없다, 가짜다, 허구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며, "우리는 지금 '혁명의 전야'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라고 단단히 못박았다. 

나는 '4차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문제 삼을 생각은 없다. 다만, 한국사회가 '3차산업혁명'으로 들끓었던 게 고작 한 두 해 전이었다는 점을 상기해 주고 싶다. 제러미 리프킨이 2011년에 <3차 산업혁명>이라는 책을 썼고, 이것이 이듬해에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지금과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

리프킨은 2015년 말까지도 한국을 방문해 '3차산업혁명론'을 역설했고, 언론은 이를 대서 특필했다. 기술의 진화 속도가 너무 빨라서 한두 해 만에 '3차'를 졸업하고 '4차'로 넘어간 것일까? 아니면 아예 건너 뛰고 '4차'로 직행한 것일까?

리프킨은 그동안 에너지 네트워크, 산업 간 융합, 공유경제, 사물인터넷(IoT), 3D 프린터를 활용한 제조업 혁명이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3차산업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해 왔다. 리프킨이 에너지를 특별히 강조한 점과, 앞의 숫자가 '3'이라는 점을 빼면 슈밥의 주장과 판박이다.

이 둘은 '혁명'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비슷한 우려를 표한다. 슈밥은 인공지능과 자동화의 영향으로 미국 일자리의 47%가 사라질 것이라는 옥스퍼드대학 연구를 인용하며, 다가올 실업과 양극화 문제를 제기한다. 리프킨 역시 자신의 책에서 인공지능과 자동화가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구매력 감소가 경제 성장에 타격을 입힐 것을 염려한다.

두 저자가 한국 대통령의 관심을 끈 것까지도 비슷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슈밥의 애독자이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아예 리프킨을 초청해 직접 만났다. 차기 대통령은 '5차산업혁명'의 저자와 조우하게 될지 모르겠다.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산업혁명'?

a

2016년 3월 15일 이세돌 9단이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5번기 제5국을 진행하고 있다. 이날 이 9단은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에 280수만에 불계패해 1승 4패를 기록했다. ⓒ 구글 제공


이런 반문이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3차'라 부르든 '4차'라 부르든, 뭔가 혁명적으로 바뀌는 것은 사실 아니냐고 말이다. 물론 변하고 있다. 세상이 늘 그래왔듯 말이다.

슈밥은 책에서 "내가 '4차산업혁명으로 간주하는 변화는 인류가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라고 단언한다. 당연하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고 기술은 시간 순서대로 축적되어 왔기 때문에, 기술적 변화는 언제나 과거에 보지 못하던 모습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슈밥은 '속도,' '폭과 깊이,' '영향력' 면에서 과거의 변화와 확연히 구분된다고 반박한다. 그렇다 치자. 하지만 이 변화를 '산업혁명'으로 불러야 할 이유가 있을까?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첫 산업혁명이 그랬듯, 디지털 기술의 도입과 발전이 생산성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킨다고 믿어서일까? 안타깝게도, 컴퓨터와 정보통신 기술의 도입은 생산성을 크게 높여주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 전세계의 공장과 사무실은 최신 컴퓨터를 도입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때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 로버트 솔로(Robert Solow)는 이렇게 말했다.

"어디를 가든 컴퓨터 시대가 도래한 징표가 확연하지만, 생산성 통계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사업자들이 '컴퓨터 시대'라며 경쟁적으로 첨단 정보기술을 도입하고 있으나, 그것이 생산성 향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도 있고, 얼마간 솔로의 주장과 배치되는 통계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생산성 역설(productivity paradox)'은 최근 들어 더욱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컴퓨터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1947년부터 1983년까지 미국의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평균 2.8%였다. 하지만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된) 2000부터 2007년 사이 비율은 오히려 2.6%로 떨어졌다.

'스마트폰 혁명'이 일어난 2007년부터 2014년 사이는 어땠을까? 정확히 반토막이 난 1.3%였다. 이로 인해 <이코노미스트>는 2014년 10월호에서 "기술이 먹히지 않는다"는 '기술무용론'까지 제기했다. 여기에 슈밥까지도 '생산성 역설'의 한계를 인정한다. 

"지난 10년간 기술적 진보와 혁신에 대한 투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으나, 전세계의 생산성(노동생산성과 총요소생산성 모두)은 정체를 거듭하고 있다. 최근 다시 불거진 생산성 역설의 문제는 경제 대공황 이전부터 존재하던 경제학적 수수께끼로, 이에 대한 만족스런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슈밥은 이 '수수께끼'를 제쳐둔 채, '어쨌든 4차산업혁명론'을 밀고 나간다. 이 허술한 설교에 한국사회 각계는 '믿습니다'로 화답하고 있다.

일자리까지 빼앗는 기묘한 '산업혁명'

a

지난해 실업자가 100만 명을 처음으로 넘어섰다. 15∼29세 청년층 실업률은 1년 만에 역대 최고치를 다시 썼다. 사진은 지난 11일 오후 서울의 한 대학교 도서관. ⓒ 연합뉴스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시작된 최초의 산업혁명은 생산성만 높인 게 아니라 고용도 늘렸다. 기계는 소수의 낡은일자리를 빼앗았지만, 더 많은 새 일자리를 만들어 냈다.

우리는 '대량생산·대량소비'처럼 두 단어를 하나로 묶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저절로 결합하지 않는다. 물건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자리가 없는 '대량소비'란 불가능하다.

'4차산업혁명'의 핵심 전망은 '고용의 대폭 축소'다. 사람이 하던 일을 인공지능과 자동화 시스템이 대신하기 때문이다. 이 '스마트' 기계는 다수의 '낡은' 일자리를 빼앗는 반면 소수의 일자리만을 만들어 낼 것이다. 

첫 산업혁명이 '혁명'으로 불린 이유는 '대규모 생산' 못지 않게 '대규모 일자리 창출'을 통해 경제 규모를 비약적으로 팽창시켰기 때문이다. 이른바 '4차(혹은 3차)산업혁명'은 어떤가? 생산성도 줄고, 일자리도 주는 것을 '산업혁명'으로 부르는 것이 온당할까?  

나는 슈밥이 내세운 '4차산업혁명론'이 터무니 없는 오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덕분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산업혁명 어쩌고' 만큼 재계의 주목을 끌 이름이 어디 있겠는가?

정치 이데올로기가 된 '4차산업혁명'

대학에서 뉴미디어를 가르치며 깨달은 점은, 새로운 기술은 언제나 '허풍'과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허풍은 대개 '빨리 뭔가 해야 한다'는 위기감을 조성하면서, 거기에 엉뚱한 요구를 살짝 끼워넣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어떤 매체보다 '4차산업혁명' 홍보에 열심인 <조선일보>의 1월 10일 사설을 보자.

제목부터가 "세계는 4차 산업혁명, 우리는 살기 띤 과거회귀"다. "정치가 막가고 있다. 들어본 적 없는 극언이 난무하고 상대를 향한 저주가 판친다"로 문을 연 사설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세계는 4차 산업혁명으로 달려가고 있다. 이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에서 뒤처지면 미래를 송두리째 잃는다고 한다. 올라가느냐 탈락하느냐 경계선에 있는 나라의 유력 대선 주자가 가진 패러다임은 100~60년 전의 '친일' 논란이다. 정치권의 한쪽은 40년 된 낡은 통치를 하다 파국을 맞고, 다른 한쪽은 40년 전 운동권 사고방식을 들고 다시 권력을 잡으려 한다. 국민이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4차산업혁명'에서 '친일청산 청산론'과 '문재인 회의론'을 도출하는 재주가 놀랍지만, 라이벌인 <동아일보>도 만만치 않다. 지난해 말, 탄핵 정국에서 이 신문은 특집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올해 하반기가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점이었지만, 최순실 게이트로 국정이 마비되면서 무방비 상태로 방치됐다는 분석이다. 네덜란드(1980년대), 독일(2000년대) 등 선진국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노동개혁을 추진해 4차 산업혁명에 대비했고 미국 일본 등은 관련 산업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한겨레>는 그나마 낫지만, 자신도 방향을 모르면서 '당장 뛰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무익함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예컨대 1월 23일 대담에서 한 참석자는 '4차산업혁명'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4차 산업 혁명기는, 분야는 명확한데 제공해야 할 서비스가 불분명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시기다. 이런 혼란은 외부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돌파할 수 있다. 지금은 아이티와 제조업 간 결합에서 분야도 뒤엉킨 채 총망라되고, 해결해야 할 제품 서비스가 뭔지도 잘 모른 채 가능성만 무한히 열려있는 총체적 난국상황이다.

열심히 몽환적 설명을 쏟아낸 대담자는 다음과 같이 '대안'을 제시한다. 

우리는 지금 '혁명의 전야'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고, 필요한 건 축적의 시간이다. 산업화 시기에 필요했던 축적의 시간이 아니라, 사람에게 경험이 축적되는 '인간 중심의 새로운 축적의 시간' 말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자

a

영화 <트랜센던스> 스틸컷. <트랜센던스>는 인간의 뇌를 컴퓨터에 업로딩하는 '마인드 업로딩' 사례를 다루고 있다. ⓒ 서밋 엔터테인먼트


나는 기술을 거부하는 사람도 아니고, 변화를 외면하는 사람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자'는 것이다.

나는 '4차산업혁명론'에 근본적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슈밥이 책 서두에서 던진 메시지만큼은 유효하다고 믿는다. 그는 현 시점에서 "새로운 기술 혁명을 이해하고 그것을 이끌어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술은 계절이나 자연재해처럼 찾아오는,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아니다. 기술은 사회의 산물이고, 기술의 흐름을 결정하는 담론은 언제나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와 결부된다. 

제대로 파악하기 전에 '뭔가를 해야 한다'는 위기감을 조성하는 것은 지배 정치권력과 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4차산업혁명'으로 특정 정치 세력을 옹호하거나, '4차산업혁명'을 말하며 삼성 이재용 구속 영장을 비판하는 언론을 봐도 알 수 있다,

나는 이 순간에 기술이 눈부신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변화를 '산업'의 틀에 가두면 변화의 양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고 믿는다. '산업'보다 '시민들의 삶' 전체에 미칠 영향을 살피는 것이 훨씬 유익하고, 장기적으로 '산업'의 측면도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일자리가 사라지면 우리 삶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한국을 포함한 일부 국가에서 '기본소득' 실험이 진행되고 있고, 이는 꼭 필요한 논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동이 단지 생계 수단에 머물지 않고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생계비 제공이 '직업 없는 미래'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과거에는 기업의 '대량 생산'이 일자리를 보장했고, 이로 인해 '대량 소비'가 가능했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라는 경제학 상식도 이런 환경에서 가능했다. 하지만 생산-고용-소비의 고리는 끊겨가고 있다. 이 '소비 없는 대량 생산'의 시대에 기업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앞으로 몇 편의 기사를 통해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 보려고 한다.
댓글2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와 <미디어기호학>을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살고자 합니다.

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AD

AD

인기기사

  1. 1 깨발랄 지현, 하늘의 별이 되다... "넘 슬퍼하지 마 난 행복했어"
  2. 2 뇌졸중으로 쓰러진 변호사 "내가 이렇게 되고 보니..."
  3. 3 이게 'F**K'로 들린다고? SNS 달군 환청 논란
  4. 4 또 뒤통수 친 일본, 윤석열 정부는 왜 이리 안이한가
  5. 5 세월호, 이태원... 살아남은 1990년대생들은 두렵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