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 팔아 빌딩 짓는다는 시절 있었는데..."

[인터뷰] 42년 책방인생 '뿌리서점' 김재욱 사장

등록 2017.02.05 10:38수정 2017.02.0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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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ew내 나이 24살이던 65년 서울 용산에 상경했다. 그 때부터 군대가기 전까지 신문배달을 하며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때 참 어려웠다. 살 곳이 없어 고시원에 들어가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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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역앞 뿌리서점 간판 '책이 주인을 기다립니다"라는 문구가 정겹다. ⓒ 설혜영


이런 상상을 하는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은퇴할 나이쯤 되어 한적한 마을에서 작은 책방을 열어 책도 읽고 좋은 책도 소개하는 제2의 인생을 사는 모습. 이건 이런 상상과 비슷하다. 나이 먹으면 도시의 시끌벅적함을 떠나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여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

반드시 지금은 아니다. 먼 훗날 언제쯤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생계에 목매지 않아도 될 그 때. 되면 좋고 안되도 할 수 없는 그 언제이다. 그러나 만약 이 곳이 도망칠 수 없는 외딴길이라면 어떨까? 책을 볼 여유는커녕 하루 종일 앉아 쉴 수도 없는 고된 노동의 연속이라면. 그럼에도 임대료는 감당할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하는 무거운 짐까지 지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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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서점 내려가는 계단 ⓒ 설혜영


내가 종종 들르는 용산의 헌책방 뿌리서점. 투박함과 촌스러운 시간의 흔적을 보란 듯이 드러내고 있는 곳. 그래서 그 모습 자체가 눈길을 끄는 곳이다. 20여 평 지하에 자리한 헌책방은 넘쳐나는 헌책을 쌓아둘 공간이 부족하여 1층 입구부터가 헌책더미들이 늘어서 있다.

지하공간을 내려가는 계단부터 책 모서리의 제목들은 눈을 부릅뜨고 나를 봐달라며 내 쪽을 향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책의 마력에 취해 발걸음을 옮기고 책제목과 저자를 훓고 있게 된다.

입구부터 천장 통로 모두에 책탑들이 늘어서 있다. 한 10만 권쯤 될까? 이곳에 들어서면 조심조심 걸을 수밖에 없다. 온몸에 힘을 주고 주위를 살피지 않으면 책 더미를 쓰러트리기 십상이다. 또 가방을 메고 들어갈 수 없다. 가방을 메고는 몸을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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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서점을 찾은 단골손님, 책값을 계산하며 담소를 나눈다. ⓒ 설혜영


러셀의 행복론과 책 몇 권을 집어 들고 책값을 계산하려고 기다리면서 어르신들과 사장님의 얘기를 엿듣게 됐다. 40년 단골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계신 분들의 얘기는 유성룡 집안 몇 대손이라는 집안 자랑에 검사가 된 아드님이 영전했다는 자식자랑 뻔한 레퍼토리. 그러나 오늘은 이상하게 뻔하게 들리지 않았다.

헌책방에 대한 로망 때문이었을까 어르신들의 얘기를 엿들은 탓이었을까 책값을 계산하며 책방 사장님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객기를 부렸다.


- 책방일 처음 시작하셨을 때 얘기 좀 들려주세요. 사람들이 그 땐 책을 많이 샀나요?

"책 나까마(중개상)부터 시작했다. 60년대까지 책이 귀했다. 70년대 일본문화가 유행처럼 퍼지고 동경하게 되면서 독서바람이 불었다. 그러면서 책을 보는 경향이 생겨났고 잡지도 많이 생겨 나오게 됐다. 책시장이 호황기로 접어들던 70-80년대 초에 헌책도 많이 나오게 됐다. 청파동, 원효로에서 구옥을 버리고 아파트로 이주하게 되면서 '고서'가 많이 나왔다. 그 땐 책이 나오면 거의 다 팔아먹을 수 있었다. 책장사 괜찮았다."

- 헌책방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원래 책을 좋아하셨나?
"내 나이 24살이던 65년 서울 용산에 상경했다. 그 때부터 군대가기 전까지 신문배달을 하며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때 참 어려웠다. 살 곳이 없어 고시원에 들어가 생활했다. 학교공부를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검정고시에 붙으려고 헌책방을 다니며 책을 구해 공부를 했다.

그러면서 헌책방 다니는 일에 재미를 붙이게 됐고 헌책장사 일을 귀동냥으로 많이 알게 되었다. 군대를 다녀와서 책 나까마(중간상), 야시장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책장사에 뛰어들었다. 그땐 책장사가 꽤 잘 될 때였다. 헌책 팔아 빌딩 짓는다고 할 정도였다. 나도 그 땐 빌딩 지을 각오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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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서점에서 발견한 부치지못한 엽서 ⓒ 설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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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은 더 된 추억의 책. 75년 초판 발행된 삼중당 문고. ⓒ 설혜영


얘기를 듣다보니 왜 청계천도 아닌 용산에서 책방을 여셨을까 궁금증이 생겼다. 얘기를 이어가려는 찰나 1층에서 일이 생긴 모양이다. 사장님을 급하게 호출한다. 잠시 시간이 생긴 사이 나는 다시 책구경을 시작했다. 노르스름한 책이 안 봐도 3-40년은 족히 됐음직한 책.

삼중당문고판 책더미를 뒤적이다 톨스토이 인생론 책 속에 숨어있던 누군가의 추억을 훔쳐보았다. "부치지 못한 엽서", 군사정권에 의해 단명된 동양FM방송 "그대의 음악실" 라디오방송에 보낸 신청곡 사연이 담긴 엽서가 튀어나왔다. 내 추억을 발견한 것 같은 반가움, 한 때 나의 추억 한조각과 너무나도 닮은 추억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온 사장님 옆에 딱붙어 다시 이야기를 청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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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서점 내부 모습 ⓒ 설혜영


- 이곳에서만 40년째 운영을 하신 건가요?
"원효로 3가에 첫 가게를 열었다. 3평도 안 되는 연탄가게 자리였지만 용문시장, 산천동, 청암동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자리가 좋았다. 길거리에 책을 내놓고 팔았는데 지나가면서 책을 많이 사가지고 가 장사가 잘됐다.

그러다가 1978년 2월 정부의 수도권인구 재배치 계획에 따라 대입학원들이 4대문 밖으로 이전하면서 용산역 근처에 학원들이 모여들었고 요 근처가 학원가가 됐다. 양지학원 종합반, 경복학원, 상아탑학원이 들어서게 됐고 그 때 학원을 바라보고 이쪽으로 진출해서 5평까지 가게를 추가로 낸 것이 한강로 진출의 시작이 되었다.

81년에는 15평으로 가게를 얻어서 의욕적으로 일을 벌였다. 책방 한쪽에 만화방도 냈고 15평안에 생활집도 있었다. 책먼지나 건강문제는 고려치 못할 만큼 장사에 빠져들었다. 나중에는 아이들 건강이 염려되어 생활집을 분리했다. 23년 운영했던 한강로 가게가 2003년 개발로 건물이 팔렸다. 2003년 현재 이곳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14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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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서점에 항상 준비되어 있는 커피와 건빵. ⓒ 설혜영


- 책장사 재미가 쏠쏠하셨을 것 같은데, 정말 빌딩을 지으셨나요?
"첫 가게였던 원효로 책방 가게세가 보증금 5만원에 월세 5천원이었다. 처음엔 5천원 월세도 사실 겁이 났는데 수익이 좋아서 1년 130만원 벌었다. 복개된 청계천을 중심으로 헌책방 활성화가 일어나던 때다. 용산 서부이촌동 시민아파트가 190만원이었다. 그 때 책방 시작하고 2년 만에 집을 샀다.

우여곡절도 있었다. 원래 1년 만에 집을 살 뻔 했는데 계약서 쓰기 바로 직전에 일이 터졌다. 번 돈을 친구들에게 융통해줬는데 수도꼭지 나까마(중개상)을 하던 친구가 케이에스 마크 위조건으로 지명수배 피신하게 됐다. 결국 집도 못사고 돈을 떼이게 됐다. 130만원 벌어서 70만원 떼이니까 정신이 없었다. 그 때 '군대 제대 1년 늦게 했다고 생각하자'며 마음을 다스렸던 게 생각난다."

40년 전 얘기인데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하시는 걸 보면 그 때의 상실감이 큰 흔적을 남기셨던 게 분명하다. 첫 집 장만이 어그러진 속상함을 1년 늦게 제대한 셈 치자는 단념의 과정이 얼마나 지난했을까? 70이 넘으신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때의 어르신을 위로해드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후로는 책장사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으니 이 때의 우여곡절도 이제는 그리운 추억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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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서점 사장님이 노동의 흔적. 책마다 가격을 연필로 가격을 매겨놓으셨다. ⓒ 설혜영


- 책장사는 언제부터 어려워졌나요?
"86년대 말 문자 조판에 전산사식 방식이 도입되면서 인쇄업이 급격히 변화했다. 개정판을 내기가 훨씬 쉬어지면서 처음엔 대학교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논문집은 헌책방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옛날에는 박사논문을 받으려면 헌책방을 열심히 다녀야했었다. 그렇게 대학교재는 큰 수입원이었는데 타격이 컸다.

바로 다음해인 87년에는 중고 복사기 자율화조치가 되면서 아예 대학교재는 팔리지 않게 되었다. 중고등학생 참고서도 개정이 쉬워지면서 처분 안 되는 책들이 늘어갔다. 설상가상으로 90년 말에는 우리나라 출판계에 위기가 왔다. 청계천 종로 출판단지와 5대 총판이 문을 닫았다. 도매 집산지가 문을 닫은 셈이다. 도미노처럼 군소 책방들이 문을 닫게 되었고 출판계가 초토화되었다.

그 때 당시 다른 일을 하라는 유혹도 많았지만 내가 하던 일을 그만둘 수 없어서 계속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지금도 버티는 거지 어렵다. 자기건물에서 책방 하는 사람은 10%도 안 될 것이다. 가게세 올려달려면 문을 닫는 거다. 가게세만 월 240-250만 원 정도 된다. 근처에 창고도 있다. 스마트폰 나오고 하면서 고난의 세월이었다. 여기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다."

-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는지요.

"이곳도 개발이 곧 추진될 예정이다. 여러 번 재개발이 추진되다가 엎어졌다. 그러면서 이사도 했다. 지금 자리 잡은 곳은 한국여성단체협의회 건물인데 13년 동안 월세를 한번 밖에 안올렸다. 1층 입구에 책을 펼쳐놓은 모습이 보기 좋지 않을 수도 있는데 다행히도 많이 이해해주신다. 평범한 건물주를 만났다면 임대료 때문에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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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서점 내부 모습 ⓒ 설혜영


사장님은 작업 공간이 따로 없다. 커피판이자 계산대인 입구앞 매대가 사장님이 그나마 많이 머무르는 곳이다. 이곳에는 사장님이 앉을 의자가 없다. 워낙 좁은 곳이라 책꽂이 사이를 지날 때마다 몸이 부딪히는 곳이다 보니 의자가 없다는 것이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어디 있어도 그만일 것 같은 헌책들, 하루에 몇 십명 안팎의 많지 않은 방문객들이 오는 곳. 아무리 움직여도 큰 변화를 만들어내기 어려울 것 같은 10만권의 책 탑들 앞에서 사장님은 의자에 앉을 여유를 내지 못한 채 하루 종일 가격을 매기고 책을 옮기고 계셨다.

어르신께서 몇 번씩 강조하신 말씀이 있다. 책장사는 70% 경험과 30% 운으로 한다는 말씀. 대형총판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모든 정보가 온라인을 통해 유통되어 책을 보는 일은 하품 나는 일로 치부되는 시대에 그 반대가 아닐까 반박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거대한 외부의 변화에도 70%의 경험을 붙들고 42년을 지켜 오신 이 현장에서 한시도 앉지 못하고 움직이게 하는 힘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이 수많은 헌책방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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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서점 내부 모습 ⓒ 설혜영


한평생을 걸어오신 사장님의 책방 인생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오늘 큰 배움을 얻었다. 이곳에 오면 거르지 않고 먹게 되는 달달한 커피와 이 공간의 편안함이 새삼 소중해진다. 나는 오늘 러셀의 행복론보다도 더 묵직한 사람책 한 권을 독파했다.

#용산역 #뿌리서점 #헌책방 #설혜영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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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대안적 개발을 모색하고, 생태환경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불평부당한 사회를 민의 힘을 믿고 바꿔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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