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친절한' 스페인, 그래도 관광객 넘쳐나는 이유

[스페인에서 한 달 살이 - 세 번째] 스페인의 '역사 수도', 그라나다 가는 길

등록 2017.02.08 16:24수정 2017.02.08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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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기차표 유레일패스로 좌석을 예약한 후 역마다 설치된 자동발권기를 이용해 출력하면 사진과 같은 표가 나온다. 스페인어를 모르면 무슨 뜻인지 당최 알 수 없다. 사진은 마드리드에서 세비야 가는 기차표다. ⓒ 서부원


꿈에 그리던 알람브라 궁전을 알현하기 위해 그라나다로 가는 길,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기차역은 있으되, 기찻길이 없는 황당한 상황에 직면했다. 나중에 들어 알게 됐지만, 스페인 남부의 교통 중심지인 안테케라와 그라나다를 연결하는 철로가 한창 보강 공사 중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안테케라까지는 기차를 타고, 나머지 구간은 버스로 갈아타야 한단다.

기차에서 잠이 들었거나 옆자리의 미국인 부자가 아니었다면, 기차에 남겨져 버스를 놓치는 황당한 꼴을 당할 뻔했다. 기차를 탈 때까지도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기차표 어디엔가는 표기돼 있었을 테지만, 스페인어로만 돼있어 직접 알려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더욱이 역마다 예약번호로 자동 발권하는 나 같은 경우에는 역무원들과 접촉할 일도 없으니 안내를 받을 기회도 없다.


여기서 잠깐. 유레일패스로 스페인을 여행하려는 이들에게 귀띔해둘 게 있다. 주지하다시피, 유럽 여행에서 유레일패스는 여권 챙기듯 구입해야 하는 필수 아이템이다. 교통비가 워낙 비싼 유럽에서 그만한 효자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저가 항공사들이 가격 경쟁을 벌이고 있다지만, 편하고 접근성이 높은데다 시간이 정확하고 요금까지 저렴하니 이것저것 따져볼 이유가 없다.

스페인서 유레일패스 구입할 때 고려할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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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의 날 가장 행렬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스페인 최대의 명절인 1월 6일, 동방박사의 날을 맞아 전야제가 열렸다. 1년 365일이 축제라는 스페인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 서부원


그러나 유럽의 여느 나라들과는 달리 스페인에서의 유레일패스 구입은 고려해볼 구석이 좀 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할 거라면 몰라도, 스페인 한 나라에서만 머물 거라면 이동 거리와 날짜를 감안해 신중하게 구입해야 한다. 통근 열차를 제외하고는 등급과 상관없이 대부분의 기차가 예약제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유레일패스가 있어도 사전 예약하지 않으면 탈 수가 없다.

예약하는 데는 수수료도 부과된다. 스페인을 떠나기 전 구입한 유레일패스가 여느 나라에 견줘 어째 좀 싸다 싶었는데, 솔직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기차의 등급과 거리에 따라 4유로에서 11유로까지 별도로 지불해야 한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5천원에서 1만4천원 안팎의 추가 요금이 붙는 셈이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에 비하면 별 것 아니라지만, 헛돈인 듯만 싶어 께름칙한 건 어쩔 수 없다.

문제는 기차를 갈아타는 경우다. 고작 한두 시간 정도의 가까운 거리라도 직행 노선이 없어 중간 역에서 갈아타야 할 때는 별도로 예약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한 번을 갈아타면 두 기차에 대해 예약을 해야 하고, 두 번을 갈아타는 경우에는 세 번의 예약이 필요하다. 물론, 그때마다 예약비가 추가되어 자칫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요컨대, 고속열차로 서너 시간 이상 걸리는 장거리 구간이라면 예약비를 감안하더라도 유레일패스가 백 번 낫지만, 두어 시간 이내의 가까운 거리라면 버스를 이용하는 편이 유리하다. 더군다나 스페인에서 버스 요금은 기차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저렴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유레일패스에 묶여 한 달 동안 고속열차만 타는 호사를 누렸지만, 예약제에 무지했던 '죄'로 만만치 않은 비용을 치러야 했다.

다른 나라선 찾아보기 힘든, 스페인의 관광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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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중앙 광장의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의 동상 그라나다를 찾아온 탐험가 콜럼버스를 이사벨 여왕이 만나는 장면을 동상에 담았다. 이는 신항로 개척이 이곳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 서부원


온통 스페인어뿐인 기차표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스페인만큼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불친절한'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당장 어디에서도 영어가 병기된 안내판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우리 같으면 영어의 병기가 '기본'인 도로표지판도 스페인어뿐이고, 상점의 간판과 유적지의 안내판, 심지어 관광안내소에서 관광객들에게 판매하는 지도에조차 영어로 표기된 것이 드물다.

스페인은 명색이 중국과 미국에 이어 세계 3대 관광대국이다. 특히 유럽에서는 계절과 상관없이 최고의 휴양지로 손꼽히며, 우리나라에서도 스위스, 이탈리아 등과 함께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나라의 목록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굳이 배려하지 않아도 곳곳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넘쳐나니 배짱이라도 부리려는 것일까. 스페인은 낯선 이방인을 여러모로 불편하게 하는 나라다.

이래저래 마뜩찮은 표정을 하고 있는데, 스페인 청년 한 사람이 초면에 말을 걸어왔다. 뜬금없이 그라나다가 연중 온화한 스페인 남부지방에서 겨울철 유일하게 스키를 즐길 수 있는 곳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두꺼운 패딩 차림이어선지 스키를 타러가는 사람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아니라고 했더니, 내가 찾는 알람브라 궁전은 두 번째라며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였다.

그랬다. 비록 영어가 잘 통하지 않고, 유적지에 대해 안내받기도 어려울뿐더러 지도만으로 숙소를 찾아가기도 힘든 나라지만, 스페인에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관광 자원이 하나 있다. 바로 스페인에 사는 그들이다. 처음 만난 이방인에게도 큰소리로 '올라(Hola)'를 외치며 먼저 다가와 반갑게 손 흔들어주는 사람들이다. '올라'는 하루에 최소 수십 번은 듣게 되는 인사말로, 영어로 치면 '헬로(Hello)'쯤 되겠다.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스페인 사람들. 세계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은 아니라 해도, 장담하건대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웃는 사람들이다. 스페인에선 1년 365일이 축제라더니, 직접 가보지 않아도 그들의 웃는 표정에서 들뜬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축제가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낙천적인 그들의 본성이 스페인을 축제의 나라로 만든 것인지 궁금해졌다. 과연 닭이 먼저일까, 알이 먼저일까.

스페인 여행 중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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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대성당의 모습 대성당에는 1492년 최후의 이슬람 세력을 축출한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이 나란히 안치돼 있다. 이들은 스페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념비적 인물로,'가톨릭 왕들'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 서부원


그라나다 기차역은 잠시 버스 터미널로 바뀌어 있었다. 며칠간 묵을 숙소를 찾아가는 길, 택시 기사는 여행 가이드라도 되는 양 침을 튀겨가며 쉬지 않고 도시 곳곳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도 천생 스페인 사람이었다. 처음엔 왜 저러나 싶기도 하고, 바가지를 의심하며 보란 듯 무릎 위에 지도를 펴놓고 알은 체하기도 했다. 스페인에선 소매치기와 바가지를 조심하라는 여행 안내책자의 글이 순간 떠올라서다.

조심한다고 나쁠 건 없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해가 된다. 여행의 본질이랄 수 있는 현지인들과의 수많은 만남들이 줄거나 차단될 수밖에 없어서다. 하긴 소매치기와 바가지를 당한 것도 여행의 일부라며, 추후 돌아보면 그만큼 의미 있는 경험도 없다고 호기롭게 말하는 여행자들도 봤다. 기실 내가 단체 관광과 렌터카를 이용한 여행을 마다하는 이유도 현지인들과의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숙소는 알람브라 궁전이 올려다 보이는 광장 근처에 있었다. 바로 곁에 이사벨 여왕 앞에 무릎 꿇은 콜럼버스를 조각한 거대한 동상이 세워져 있고, 걸어서 5분 거리에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의 시신이 나란히 안치된 그라나다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은 각각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이자 부부로서 스페인의 황금기를 이끌며 '가톨릭 왕들'이라는 특별한 칭호를 얻었다.

그 중 이사벨 여왕은 여러 나라로 갈라진 가톨릭 왕국을 통합하고 반도 내 이슬람 세력을 축출해 지금의 스페인을 이뤄낸, 그들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에 의한 가톨릭 왕국의 완성을 증명하는 유적이 바로, 얄궂게도 이슬람 왕조의 알람브라 궁전이다. 그래선지 스페인을 여행하다 보면 유적과 상관없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로 치면 세종대왕 같다고나 할까.

알람브라 궁전을 알현할 준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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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그리던 알람브라 궁전 숙소 근처 언덕 위에서 건네다 본 알람브라 궁전의 원경 모습.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궁전 안을 거닐 계획을 세웠다. ⓒ 서부원


당시 주변의 모든 나라가 고개를 가로저은 신항로 개척을 향한 콜럼버스의 포부를 선뜻 후원한 이도 그다. 이슬람 세력과 마지막 항전을 앞두고, 그를 한달음에 찾아온 괴짜 탐험가 콜럼버스와 '세기의 계약'을 맺은 곳이 이곳 그라나다와 이웃한 산타페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를 '산타페 협약'이라 부르고 있다. 광장 한 가운데에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의 동상이 세워진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스페인의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로르카의 고향 역시 그라나다이며, 그의 생가와 기념관이 인근에 조성되어 있다. 스페인의 웬만한 도시마다 콜럼버스의 그것처럼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을 만큼, 스페인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말라가 공항의 이름이 그곳이 고향인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인 것처럼, 현재 그라나다의 공항도 그의 이름을 따서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공항으로 지어졌다.

말하자면, 그라나다에 스페인의 내로라는 역사 인물들이 죄다 모여 있는 셈이다. 하나같이 스페인 최고의 볼거리라는 알람브라 궁전을 알현하기 전에 그라나다를 찾은 관광객들이라면 마땅히 '선행 학습'되어야 할 것들이다. 수도 마드리드가 스페인 정치, 행정의 중심지라면, 가히 이곳 그라나다는 스페인의 '역사 수도'라 부를 만하다.

만약 겨울철 스키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도시라며 그라나다를 자랑하던 그 스페인 청년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부러 일러줄 것이다. 한낱 스키를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자랑 정도로는 그라나다에서 명함도 못 내민다고. 아무튼 이제야 비로소 알람브라 궁전을 알현할 준비가 됐다.
#스페인 #그라나다 #유레일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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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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