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브라 궁전 하나가 스페인을 먹여 살린다?

[스페인에서 한 달 살이-네 번째] 세계 일주의 꿈을 부풀게 한 '우상', 알람브라 궁전

등록 2017.02.09 12:06수정 2017.02.09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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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ew듣는 순간 여러 대의 기타가 호흡을 맞춘 협주곡인 줄로만 알았다. 달랑 기타 한 대가 만들어낸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비로웠다.
지난 해 12월 30일부터 1월 24일까지 약 한 달 간 스페인에서 겨울을 나고 돌아왔습니다. 시간에 쫓겨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그냥 사글세방 얻어 살듯 지내다 왔습니다. 자린고비처럼 살지 않고 즐길 건 다 즐기며 지냈지만, 생각보다 경비가 많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스페인에서 한 달 산 경험담을 여기 소개합니다. -기자 글

오늘도 난 세계 일주를 꿈꾸고 있다


오늘도 난 세계 일주를 꿈꾸고 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러시아를 경유한 뒤, 유럽과 남북 아메리카를 두루 섭렵한 뒤 대서양을 건너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를 경험할 계획이다. 다시 인도양을 건너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여행하고, 태평양에 오밀조밀 떠 있는 오세아니아의 섬들을 거쳐 동남아와 중국, 일본을 경유해 돌아오는 코스다.

얼마나 걸릴 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아메리카를 반환점 삼아 되돌아오는 일정으로 거리로 치면 지구를 상하좌우 두 바퀴 돌게 되는 셈이다. 그저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나의 유일한 '버킷리스트'다. 열심히 저축도 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운동을 거르지 않는 것도 오로지 그 꿈 때문이다. 가슴이 떨릴 때 떠나야지, 다리가 떨리면 민폐라는 말도 있잖은가.

그런데, 세계 일주는 어릴 적 꿈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대학 졸업을 앞둔 즈음이었다. 우연히 듣게 된 기타 연주곡 하나가 귀에 꽂혔다. 클래식 기타를 배우던 한 후배가 자취방에 틀어박혀 종일 그 곡만 죽어라 연습을 했다. 그는 변변한 악보도 없이 지금은 구하려야 구할 수도 없는 낡은 카세트테이프에 의존해 틀었다 끄기를 반복하며 기타를 퉁겨댔다.

헤네랄리페의 분수 바로 이곳에서 타레가는 불후의 명곡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작곡했다고 한다. ⓒ 서부원


그 곡이 바로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다. 듣는 순간 여러 대의 기타가 호흡을 맞춘 협주곡인 줄로만 알았다. 달랑 기타 한 대가 만들어낸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비로웠다. 그 매력에 빠져 카세트테이프를 빌려다 늘어날 때까지 반복해 들었다. 가장 대중적인 악기라는 기타가 스페인에서 시작되었다는 것과, 타레가라는 작곡가에 대해서 알게 된 건 덤이다.

지금까지 수백 번도 더 들었지만 질리기는커녕 매번 들을 때마다 새롭다. 들으면 들을수록 당시 작곡가의 마음이 어땠을지 감정 이입이 되고, 배경이 된 알람브라 궁전이 어떤 곳인지 호기심이 커져만 갔다. 오죽하면 알람브라 궁전 사진을 오려다 책상에 붙이고, 책갈피로 쓰기까지 했을까. 사진이 아닌 진짜 알람브라 궁전에서 타레가의 기타 연주를 들어보고 싶었다.


그곳을 보려면 지구 반대편 스페인까지 날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내 알게 됐다. 여기가 낮이면 거긴 밤이고, 여기가 밤이면 거긴 낮인 곳이다. 그때 생각했다. 갔다 돌아오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셈이니, 아예 알람브라 궁전을 반환점 삼아 세계 일주를 해보겠노라고. 당시엔 단순하기 그지없는 몽상이었다 해도, 어쨌든 알람브라 궁전은 세계 일주의 꿈을 부풀게 한 '우상'이었다. 콜럼버스에게 '인도'가 그랬던 것처럼.

한두 달 전 예약하지 않으면 아예 입장권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카를로스 5세의 궁전 안은 둥글고, 밖은 네모진 특이하고 거대한 건물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뒤 16세기 중엽 세워졌다. ⓒ 서부원


알람브라 궁전은 명실공히 스페인 최고의 문화유산이다. 알람브라 궁전 하나가 스페인 전체를 먹여 살린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한 해 그곳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스페인 전체 인구를 훌쩍 넘는다는, 믿기지 않는 통계도 있다. 날짜별로 입장 인원이 제한돼 있고, 궁전 내 세부 구역과 입장 시간대별로 입장권을 따로 판매하는 것도 사시사철 몰려드는 관광객들 때문이다.

그나마 한두 달 전 예약하지 않으면 아예 입장권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비수기도 따로 없다. 그러다 보니 매표소는 사실상 입장권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예매한 사람들이 그저 발권하는 장소다. 창구엔 늘 '완판'되었음을 알리는 안내문만 나부낀다.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궁전 내에 별도의 입장권이 필요 없는 곳이 몇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

궁전에 오르는 셔틀버스 정류장엔 아침부터 줄이 길게 섰다.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의 동상이 있는 그라나다 중심가와 궁전 입구를 잇는 교통편이다. 하지만 가만히 서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걷는 편이 낫다. 바깥쪽 성벽을 따라 오르는 그곳에서부터 궁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가파른 오르막길도 아닌데다 거리가 500여 미터에 불과해, 느긋하게 걸어도 15분이면 충분하다.

워싱턴 어빙의 동상 알람브라 궁전 오르는 길에 서 있다. 1832년 <알람브라 궁전 이야기>를 써서 이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 서부원


오르는 길에 어서 오라는 듯 인사를 건네는 이가 있다. 미국의 저명한 작가 워싱턴 어빙의 동상이다. 1832년, 소설 <알람브라 궁전 이야기>를 써서 이곳의 이름을 전 세계에 깊이 각인시킨 인물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은 명성은 불가능했을 거라고 단언하는 이들도 많다. 직접 관람할 순 없으나, 궁전 내에는 그가 잠시 머물며 집필했던 공간이 남아 있다.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 무엇부터 먹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궁전에 들어서면 대체 어디부터 관람해야하는지 주저하게 된다. 입장권에 딸려있는 지도에 관람 순서가 표시돼 있긴 하지만, 굳이 그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다. 일러주는 대로 가는 '착한' 관광객들에 치여 자칫 사람 구경만 하다 지쳐버릴 수도 있다. 어느 곳이든 마찬가지일 테지만, 동선이 겹치고 조금 더 걷더라도 인파를 피해 관람하는 게 상책이다.

여느 관광지와는 달리 야간에도 개방을 하니 저녁에 산책하듯 차분하게 관람하는 것도 좋겠다. 알람브라 궁전의 진면목은 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드러난다고 말하는 이도 많다. 환한 대낮을 마다하고 부러 야간 입장권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이유다. 조명 시설이 잘 갖춰져 있기도 하지만, 어둑한 분위기가 궁전이 품고 있는 슬픈 역사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가톨릭 세력은 궁전을 접수하자마자 파괴를 일삼았다

나사리 궁전의 아라야네스 정원 아라야네스 정원은 알람브라 궁전을 소개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사진의 배경이다. ⓒ 서부원


알람브라 궁전은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이 남긴 최고의 건축물이자 최후의 항전지다. 인근 코르도바와 세비야의 이슬람 세력을 차례로 함락시킨 가톨릭 왕조는, 1492년 이곳을 포위한 채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나사리 이슬람 왕조의 보압딜 왕은 궁전을 보존해달라는 조건을 내세운 채 항복을 선언하고, 과거 그들의 조상이 살던 북아프리카로 물러나게 된다.

혼이 담긴 궁전을 뒤로 하고 떠나야 했던 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완성되고 100년이 넘도록 나사리 왕조의 번영을 상징했던 궁전은 그렇게 살아남는 듯했지만, 항복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가톨릭 세력은 궁전을 접수하자마자 파괴를 일삼았고, 이내 그들의 방식대로 고쳐지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둥글고 네모난' 카를로스 5세의 궁전이다.

알람브라 궁전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궁전을 호위하는 요새인 알카사바와 궁전, 그리고 왕의 여름 별장으로 쓰였다는 헤네랄리페다. 궁전은 다시 성당과 카를로스 5세의 궁전, 그리고 알람브라의 심장이라는 나사리 궁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궁전 영역의 주변 부속 건물은 현재 파라도르로 쓰이고 있는데, 관광객이라면 하루쯤 머물고 싶어 하는 최고급 숙소다.

나사리 궁전의 천정 조각 마치 자수를 놓은 듯 섬세하고 화려한 이슬람 조각 예술의 결정체라 할 만하다. ⓒ 서부원


굳이 '서열'대로 관람하자면 알카사바가 먼저다. 비좁은 계단을 오르면 그라나다 시내의 전경이 일망무제 펼쳐진다. 지켜야 할 궁전의 주인이 사라진 마당이니 알카사바의 역할도 달라졌다. 여느 도시의 전망대 부럽지 않은 풍광을 선사한다. 과거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창을 들고 서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기념사진을 남기려는 관광객들로 하루 종일 북새통을 이룬다.

우람한 알카사바가 남성미를 물씬 풍긴다면, 마치 벽에 자수를 놓은 듯 섬세하게 치장한 나사리 궁전은 아름다운 여성을 떠올리게 한다. 알람브라 궁전을 소개하는 사진에 단골로 등장하는 아라야네스 정원과 대사의 방, 사자의 정원 등은 모두 나사리 궁전 안에 있다. 가는 곳곳마다 벽과 천정을 휘감은 조각의 정교함과 화려함은 관람객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하다.

알카사바에서 나사리 궁전으로 가는 길, 육중한 건물이 만나고 가라는 듯 버티고 서 있다. 카를로스 5세의 궁전이다. 알람브라 궁전을 부수고 재건하는 과정에서 세워졌는데, 건물의 바깥쪽은 네모로, 안쪽은 원형으로 기둥을 둘러놓은 특이한 구조다. 위치와 규모도 그렇지만 주변의 풍광과 전혀 어울리지 못해 보면 볼수록 생뚱맞게 느껴진다. 흡사 금슬 좋은 부부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안달이 난 듯한 심술궂은 인상이다. 카를로스 5세 궁전을 두고 알람브라 궁전의 '옥의 티'라며 혹평하기도 하는데, 그래선지 입장료를 따로 받지 않는다.

알람브라 궁전의 감동은 헤네랄리페에서 완성된다

나사리 궁전 내 사자의 정원 왕을 제외한 남자들은 일체 출입할 수 없었던 '금남의 공간'으로, 현재 일부 공사 중이다. ⓒ 서부원


알람브라 궁전의 감동은 헤네랄리페에서 완성된다. 알카사바의 장중함도 없고, 나사리 궁전의 화려함도 찾아보기 어렵지만, 이곳은 인공과 자연, 종교와 과학, 역사와 전설이 마구 혼재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다. 세월이 흘러 주인은 떠났어도 서사는 고스란히 남았다. 만약 헤네랄리페가 없었다면, 알람브라 궁전은 그저 크고 화려한 이슬람 궁전쯤으로 소개됐을 것이다.

나사리 궁전이 눈을 크게 뜨고 감상하는 공간이라면, 이곳은 청각에 더 의존해야 보이는 곳이다. 서사는 시에라네바다 설산에서 끌어온 물을 타고 분수가 되어 흐른다. 메마른 땅에서 생명수와도 같은 물을 그들은 온갖 기술을 동원해 모으고 머물고 흐르고 돌게 만들었다. 물이 흐르며 내는 돌돌거리는 소리가 마치 악기소리 같다. 그러고 보니 타레가가 악상을 떠올린 곳도 바로 이곳 헤네랄리페다.

이곳엔 '물 반, 나무 반'이다. 언뜻 비가 자주 내리고 물이 풍족한 땅으로 오해할 법하다. 물에 비친 그림자조차 짙은 초록색이다. 곳곳에 설치된 분수와 함께 계단의 소맷돌에까지 홈을 파서 물길을 내어놓았다. 햇살을 가려서 더위를 피하기보다 물과 나무로 햇살을 그대로 받아 안아 더위를 식히겠다는 발상일까. 여긴 적어도 눈과 귀로는 더위를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헤네랄리페가 물이 만든 예술품이라면, 그 시원은 궁전이 기대고 있는 시에라네바다 설산이다. 이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만년설의 풍광은 단연 압권이다. 바람난 후궁을 대신해 죽임을 당했다는 나무의 사연도, 이슬람 세력을 축출한 가톨릭 왕조가 차마 이곳만큼은 파괴하지 못했다는 전설도, 자연이 만든 풍광 앞에서는 힘을 잃게 된다. 헤네랄리페는 '조물주의 정원'이라는 뜻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다가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해 찍었지만, 그 어떤 사진도 그때의 감동을 담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그곳이 맞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알람브라 궁전은 다시 가슴 설레게 하는 기억으로 남았다. 알람브라 궁전에서 보낸 하루가 꿈만 같다. 세계 일주의 꿈을 갖게 한 그 반환점에 다시 가고 싶다.

알카사바에서 내려다 본 풍광 과거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알바이신 지구부터 그라나다 시내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 서부원


#스페인 #알람브라 궁전 #타레가 #세계일주 #나사리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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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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