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방

김정남 피살사건에서 떠올린 대문예 왕자 암살미수

1300년 전 동북아 긴장시킨 발해 왕자 암살미수 사건

등록 2017.02.17 16:46수정 2017.02.17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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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732년, 장문휴가 지휘하는 발해 수군이 서해를 가로질러 당나라 산동반도(산둥반도)를 공격한다. 이보다 약간 늦게, 무왕이 직접 지휘하는 발해 육군은 만리장성 경계까지 진군하여 당나라를 놀라게 했다. 이듬해 733년, 당나라의 지원 요청을 받은 신라군이 발해 남쪽으로 진군하면서, 전쟁이 수습 국면으로 돌아서고 상황이 종결되었다.

이 전쟁이 있은 직후였다. 당나라 역사서인 <구당서>의 발해·말갈 열전이나, 유득공의 발해 역사서인 <발해고>의 대문예 편에 따르면, 당나라 제2의 수도인 낙양(뤄양) 시내에 중요한 인물이 출현했다. 당나라 수도는 장안(지금의 서안)이었다. 낙양은 제2의 도읍이라 해서 동도(東都) 혹은 동경으로 불렸다.

대문예는 요즘 같으면 옆모습만 카메라에 노출돼도 대서특필될 만한 존재였다. 그런 인물이 이 세계적인 도시에 있는 천진교라는 다리 근처에 나타났다. 발해 출신 망명객이자 무왕의 친동생인 대문예 왕자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대문예는 당나라 정부로부터 특급 경호를 받았다. 양귀비의 남편으로도 유명한 당나라 현종 황제가 특별히 챙기는 망명객이었다. 그래서 대문예의 이동 경로는 극비 사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정보가 노출됐는지, 대문예가 천진교 근처에 나타나자 자객 여러 명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 협객 영화의 한 장면이 뒤이어 펼쳐졌다. 무기를 든 자객들이 대문예한테 달려들었던 것이다. 여성 특수요원 같았으면 칼보다는 독침을 썼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들은 다들 남성이었던 모양이다. 칼을 들고 달려든 것 같다.

대문예가 문약했다면, 그 자리에서 피를 움켜쥐고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상당 수준의 무술 실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구당서>나 <발해고>에 따르면, 그는 직접 맞서 자신을 방어했다.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당나라 정부가 붙여준 경호원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대문예 혼자서 자객들을 상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검투에서 대문예는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자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구경꾼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어디론가 모습을 감췄을 것이다.

대문예는 무왕의 친동생이자 대조영의 아들이다. 그는 한때 무왕의 정치적 총애를 받았다. 732년 전쟁이 있기 8년 전인 725년이었다. 발해 동북쪽의 흑수말갈이 발해를 배신하고, 발해 서남쪽의 당나라와 동맹을 강화했다. 잘못하면 발해가 샌드위치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무왕은 흑수말갈을 견제할 목적으로 대문예에게 군사행동을 위임했다. 대문예에게 흑수말갈에 대한 공격을 맡긴 것이다. 

발해 수도 상경에 남은 궁궐 터. 서울시 용산구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동영상을 찍은 사진이라서 화면이 고르지 않다. ⓒ 김종성


대문예는 국제 감각이 있었다. 발해·당나라 친선의 증표로 당나라에 가서 인질 생활을 한 적도 있었다. 인질이라지만, 형식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귀한 손님 대우를 받았다. 그 당시는 중동의 이슬람권이 세계 최강이고, 동아시아가 그다음이었다. 그런 동아시아의 중심지인 당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했으니, 국제 감각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무왕의 출전 명령을 받은 대문예는 국제 감각을 앞세워 형에게 재고를 요청했다. <발해고>에 따르면, 대문예는 "당나라와 동맹했다는 이유로 흑수말갈을 치는 것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자초하는 겁니다"라면서 "우리 군대는 고구려 때의 3분의 1밖에 안 되기 때문에, 당나라와 싸우면 질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는 과장이 섞여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북쪽 및 서쪽 유목민들을 방어하기에도 급급했다. 그래서 발해 군대를 제압할 능력은 없었다. 732년 전쟁 때 당나라가 신라의 지원을 받아 가까스로 발해 군대를 퇴각시킨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한다. 그런데도 대문예가 당나라를 과대평가한 것은 당나라 체류 중에 '당나라 물'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왕은 대문예의 의견을 무시했다. 그리고 출전 명령을 내려 그를 압박했다. 할 수 없이 대문예는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 쪽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국경지대에 도착한 뒤, 사람을 보내 무왕에게 재차 건의했다. 회군하면 안 되겠느냐며 의사를 타진한 것이다.

무왕은 안 되겠다 싶었다. 대문예를 억지로 내보냈다가는 큰일이 나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사령관을 현지에 급파하는 한편, 대문예에 대한 소환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대문예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곧바로 짐을 싸 들고 군영을 이탈해 당나라로 망명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는 일급 망명객으로 떠올랐다.

사령관을 교체한 무왕은 흑수말갈에 대한 원정을 밀어붙여 흑수말갈을 다시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흑수말갈을 공격하면 당나라가 발해를 그냥 두지 않을 거라던 대문예의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다.

무왕은 흑수말갈 문제를 처리하는 동시에, 당나라 정부를 상대로 대문예 송환을 요구했다.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는 지금의 북한·미국 관계가 아니라 러시아·미국 관계와 비슷했다. 당장에 싸우지 않더라도 긴장감이 감도는 관계였다. 배신자 대문예가 당나라에서 자기를 비판하고 다닐 거고 당나라 정부도 그런 대문예를 이용할 게 뻔하므로, 무왕으로서는 어떻게든 대문예를 불러 들어야 했다.

하지만 당나라 현종은 협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문예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환대의 뜻을 표시했다. 또 대문예의 신병을 적극 보호했다. 무왕이 신병 인도를 요청하자, 현종은 대문예를 서쪽의 신장·위구르 쪽에 숨겨놓았다. 그러고도 남쪽의 광동(광둥) 쪽으로 보냈다고 거짓말로 둘러댔다. 이렇게 대문예의 신병을 놓고 발해와 당나라가 신경전을 벌이던 와중에 732년 전쟁이 발발했다.

당나라 군대의 전투. 사진은 신라와 당나라의 전투 장면. 서울시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무왕 입장에서 황당한 것은, 732년 전쟁 때 당나라 사령관 중 하나가 자기 동생 대문예였다는 점이다. 당나라가 대문예를 발해와의 전쟁에까지 내세웠던 것이다. 이런 과정으로 인해 대문예에 대한 무왕의 심기가 악화된 상태에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대문예 피습 사건이다.

특급 망명객이 당나라 제2의 수도에서 습격을 당했으니, 당나라는 물론 동아시아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나라 정부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수사에 착수해 보니, 자객들은 모두 현지인들이었다. 낙양이나 그 주변에서 활동하는 살인청부업자들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사건의 배후가 누구인지 정확히 가려내기가 쉽지 않았다. 자객들이 '누구한테 돈을 받았다'고 진술하면 그 방향으로 수사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당나라 정부가 그런 진술을 근거로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 국제사회는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무왕과 대문예 형제의 악연을 감안하면, 사건 배후에 발해 정부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무왕이 자객들의 배후로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의심한다 해도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가능성이 낮기는 하지만, 그러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기록에 나타난 것만을 근거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무왕은 선이 굵은 인물이었다. 불만스러운 데가 있으면 상대방에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그래도 상대방이 안 들으면 군대를 보내 응징하는 스타일이었다. 흑수말갈을 대할 때도 그랬고, 당나라를 대할 때도 그랬다.

또 732년 전쟁이 있기 전에 무왕은 대문예를 돌려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동일한 방법으로 신병 인도를 요청했다. 대문예를 본국으로 소환하는 데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능성이 낮기는 하지만, 선이 굵은 인물이었다는 점과 친동생의 본국 소환에 집착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왕이 피습 사건과 무관할 가능성도 약간은 있었다.

만약 무왕이 무관하다면, 신라 정부한테 의심의 시선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발해와 당나라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신라 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경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라 정부가 피습 사건의 배후에 있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당나라 황제의 명령이 통해야 할 낙양에서 발해 군주가 공권력을 동원해 자객들을 매수하고 암살을 조종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면, 발해에 대한 당나라의 적개심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구도는 신라에 득이 됐다. 

그래서 신라가 의심을 받을 가능성도 약간은 있었지만, 발해 무왕이 워낙에 큰 의심을 받는 상황이라 그런 점은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다. 당나라 정부는 현종의 명령을 받고 자객들을 체포한 뒤 그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구당서>나 <발해고>에 나타난 정황을 보면, 당나라 정부가 자객들을 곧바로 죽인 것 같다. 충분한 수사가 진행된 것 같지 않다.

그렇게 해서 이 사건은 발해 무왕의 소행으로 결론이 났다. 동생의 배신과 망명에 분노한 무왕이 외국인 자객들을 고용해 객지에서 동생을 암살하려 한 사건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 신라 정부가 배후에 있었을 가능성보다는 발해 정부가 그랬을 가능성이 객관적으로 훨씬 더 높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당연히 그렇게 사건이 결론지어졌다.

그렇게 해서 <구당서>에도 그렇게 기록이 됐기 때문에 <구당서>를 참고한 유득공도 그런 식으로 <발해고>를 기록했다. 무왕이 사건의 배후일 거라는 유득공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서른일곱 살 때 <발해고>를 집필한 유득공은 4권으로 된 <발해고> 수정본을 남긴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 4권본 <발해고>에서도 유득공은 사건의 배후로 무왕을 지목했다.

1200년 뒤 사람인 유득공한테까지 확신을 줄 정도로, 무왕은 동생을 죽이려 한 잔혹한 인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동생은 형과 나라를 배신하고 형은 자객을 보내 동생을 죽이려 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으니, 발해 왕실은 한동안 세상의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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