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만에 완독, 천천히 밑줄 그으며 읽은 책

[말랑한 과학책①]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등록 2017.02.24 10:40수정 2017.02.24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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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역 신문에 과학을 주제로 에세이를 쓴 지 만 6년이 되어 간다. 아주 가끔, 과학책을 추천해달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까치글방 펴냄)를 첫 번째로 꼽는다. 하지만 책과 나의 첫 만남은 그리 순조롭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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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 까치글방

이 책을 알게 된 건 번역자인 이덕환 교수의 강의를 듣고서다. 우주를 비롯해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의 역사와 현재에 관한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했다. 기대를 안고 서점에서 책을 찾았다.


책은 꽤 무거웠다(나중에 무게를 달아보니 1.15킬로그램이었다). 무려 550쪽이 넘는 페이지마다 작은 글자들만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과학을 주제로 한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진 한 장, 그림 한 장, 하다못해 그래프 하나 없었다. 흥미를 잡아끄는 무언가가 보이지 않았다. '과연 이 책을 몇 장이나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하며 저자의 서문을 읽기 시작했다.

'당신을 환영하고 축하한다. 나에게는 당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큰 기쁨이다. 나는 당신이 이곳까지 오기가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 11쪽

우리집에서 서점까지 꽤 거리가 멀다는 걸 저자가 알고 있는 걸까? 책을 펴들기 전 잠시 망설였다는 것도? 이어진 저자의 이야기는 이랬다.

'우선, 당신이 지금 이곳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각자 떠돌아다니던 엄청나게 많은 수의 원자들이 놀라울 정도로 협력적이고 정교한 방법으로 배열되어야만 했다. 너무나도 특별하고 독특해서 과거에 존재한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존재하지 않을 유일한 배열이 되어야만 한다. (중략) 원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들 스스로가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들 모두가 당신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무엇보다 소중한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당신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목표이다.' - 11쪽

내 몸이 '살아 있지도 않은 원자들의 집합'이라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원자들이 나를 살아있게 한다니. 나는 이 문단에 밑줄을 긋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책을 사는 수밖에 없었다.


책은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우주, 지구, 20세기 과학, 생명, 기후와 인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서른 개의 글 속에 풀어 놓았다. 과학을 아주 좋아하거나, 과학 관련 학위를 여러 개 갖지 않은 이상 이렇게 방대하고도 깊이 있는 수준의 글을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저자 빌 브라이슨은 미국의 유명한 여행 에세이스트이다. 그의 책들은 여러 권 번역되어 우리나라에서도 꽤 인기를 끌고 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책이 나오기 4~5년 전까지 과학을 '엄청나게 재미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가능하다면 과학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고 고백한다.

그가 과학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어린 시절 과학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4, 5학년 때 과학 교과서에서 큰 칼로 지구의 4분의 1을 잘라낸 단면을 그린 그림을 본 후, 어떻게 지구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있고, 그 구성 성분까지 알아낼 수 있었는지 궁금해 했다.

'한껏 들뜬 나는, 그 날 밤 그 책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저녁을 먹기 전에 펼쳐 보았다. (중략)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책은 전혀 흥미롭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은 전혀 이해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책에서는 보통 학생이 떠올릴 수 있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지구 속에 뜨거운 태양이 존재하게 되었을까? 땅 속에 태양과 같은 것이 불타고 있다면 왜 발밑의 땅이 뜨겁지 않을까? 내부의 다른 물질들은 왜 녹아버리지 않을까?'(15쪽)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 그림과 사진이 한 장도 없는 이유는, 어쩌면 이날 저자가 받은 상처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그림으로 시선을 끌 수는 있겠지만 궁금증을 해결해주지도, 책에 오랫동안 머무르게 하지도 못했던 수많은 과학책들과 비교하자면, 이 책은 많은 부분이 다르다.

저자는 어떤 이론과 지식, 현상을 설명하기보다는, 그 이론을 발견한 사람의 성격과 주변 인물들, 당시 사회 모습으로 과학이야기를 시작한다. 과학자들이 현상을 발견하고 이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마치 소설처럼 그려진다. 어린 시절 그가 가졌던 호기심과 질문에 어른이 된 저자가 스스로 대답을 하는 것 같다.

'(뉴턴은) 한 번은 가죽을 꿰맬 때 쓰는 긴 바늘을 눈에 넣고 돌리는 일에 재미를 붙이기도 했다. 그저 "안구와 뼈 사이에 가장 깊숙한 곳까지" 바늘을 넣어서 무슨 일이 생기는가를 보고싶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기적이었다.' (59쪽)

'인'을 발견한 계기도 흥미롭다. 브란트라는 독일의 연금술사가 50통의 소변을 모아 몇 달 동안 여러 과정을 거쳐 공기 중에 놓아두면 저절로 불이 붙는 물질을 얻은 것이 '인'이었다.

또 마리 퀴리가 방사성 물질을 발견하던 당시엔 위험성을 알지 못해 치약 같은 생활용품에 방사성 물질을 넣기도 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도 실려 있다. 마리 퀴리가 사용했던 서류와 실험노트들은 지금도 납으로 밀폐된 통 속에 보관되어 있고, 보호복을 입은 사람들만 이것을 볼 수 있다는 내용까지.

'이야기책'이라 불러도 괜찮을 만큼, 흥미진진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숨어 있다. 그런데 재미만큼 과학 이론 설명이 제대로 되었을까 우려할 수도 있겠다. 걱정할 필요 없다. 우주가 탄생한 빅뱅의 순간부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까지, 어려운 과학 이론을 폭넓고 깊게 담고 있다. 신기한 것은, 상당히 어려운 내용임에도 쉽게 설명해서 책을 읽는 동안 그리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양자론의 근거가 되는 불확정성은 전자가 공간에서 움직이는 과정 또는 어느 순간에 존재하는 위치를 알아낼 수는 있지만, 두 가지 모두를 알아낼 수는 없다는 뜻이다. (중략) 불확정성의 원리 때문에 전자가 어느 순간에 어디에 있는가를 절대로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전자가 어느 곳에 있을 확률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전자는 관찰되기 전까지는 "어느 곳에나 있으면서,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야만 했다.' (159쪽)

난해한 '양자론의 불확정성'의 한 부분을 이토록 친절하게 설명해놓은 글을 다시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글 쓰는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는 '쉽게 쓰는 것'이다. 쉬운 내용을 쉽게 쓰는 것도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하물며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쓴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고통스럽다.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는 결코 '쉬운 글'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에 문외한이었던 그가 어려운 내용으로 '쉬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뭘까. 그는 성인이 되어 '불현듯 내가 살고 있는 유일한 행성에 대해서 그야말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불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과학의 신비로움과 성과에 대해서 너무 기술적이거나 어렵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피상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이해하고 동감할 수 있는 글을 쓸 수는 없는 것일까를 확인해보고 싶었다'는 것이 저자가 3년 동안이나 이 책에 매달린 이유다. '과학의 신비와 성과에 대한 이해와 동감'. 어찌 이 아름다운 말에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있을까.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없을 거라던 내 짐작은 오랫동안 '사실'이었다. 그런데 9년이 지나는 사이 나도 모르게 완독해버렸다는 것을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순서대로 읽는 것을 애초에 포기했다. 무작위로 책을 넘기다 서른 개의 장 중에서 흥미가 가는 장의 처음과 끝을 읽었다.

그리고 습관대로 책에 밑줄을 그었다. 이제와 보니 서른 개의 장 중에서 밑줄이 그어지지 않은 장이 없었다. 물론 모든 내용을 이해하고 머릿속에 앉혀 놓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꾸준함과는 거리가 먼 내가 9년 동안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어왔다는 것은, 그리고 여전히 책을 뒤적거리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인 가진 마력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처음 책을 봤을 때의 그 느낌 때문에, 아마 저자는 많은 이들로부터 원성을 들었던 모양이다. 몇 년 후, 화려한 그림으로 가득한 <그림으로 보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가 나왔으니 말이다.

원저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으면서도 그림이 들어가니 역시 흡입력이 달랐다. 나는 이 책을 미리 사놓고 조카가 초등학생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물론, 내가 갖고 싶은 마음도 컸다). 조카 역시 게임을 하다가 잠시 쉴 때면 가끔씩 이 책을 뒤적뒤적 펼쳐 보곤 한단다.

저자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기존 과학책에 실망했다면, 과학을 알고 싶지만 마냥 어렵게 느껴진다면, 또는 과학자들 사이에 얽히고설킨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공식과 암기가 아닌 진짜 과학을 알고 싶다면, 교과서 안팎의 과학이야기를 폭넓게 알고 싶다면, 심도 있는 지식을 쉽게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꼭 밑줄을 그어볼 것을 권한다. 미래의 어느 날, 여기 저기 그어놓은 밑줄을 보며 흐뭇해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양장, 특별판)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까치,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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