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내내 결혼 뒤풀이, 제주는 노는 게 다르다

차와 집에 관심 없어... 함께 먹고 나누는데 아낌 없는 제주 사람들

등록 2017.02.23 10:58수정 2017.02.23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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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시절 수많은 월간지와 일간지에 기사를 냈지만 내 이름으로 출판된 첫 책이기에 감회가 새롭다 ⓒ 이영섭

지난 겨울은 꽤나 정신 없이 흘러갔다. 특히 2월 들어서는 이 연재기사를 책으로 묶어 출판하는 작업의 마무리 일정과 제주도 전기차 관련 리포트 마감 작업이 겹치는 바람에 하늘보다는 노트북 화면을 본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렇게 정신없는 2월을 보내고 나니 성산 방면에는 벌써 유채꽃이 피어나고 있다 한다. 이렇게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반쯤 예상은 했지만 제주의 겨울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걱정했던 일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시에 비해 2배 이상 비싼 난방 비용 때문에 난방비 폭탄을 걱정했지만 실내 온도 20도 이상을 유지하면서도 12월 가스비 5만 원, 1월 가스비 6만 원, 2월 가스비 7만 원으로 겨울을 보냈다. 오히려 서울에서보다 난방비가 1/3 이하로 줄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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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정에는 이놈도 한 몫을 했다. 포켓스탑 하나 없는 시골에서 농켓몬 한게임의 여유 ⓒ 이영섭


제주의 날씨란 게 참 재미있다. 전반적으로 제주의 겨울 기온은 서울과 비교하면 10도 정도 높은 수준인데, 실질적인 체감온도는 바람에 따라 휙휙 변해버린다. 예를 들어 낮 기온이 10도를 넘어 마음 놓고 산책을 나섰는데 칼바람에 화들짝 놀라 집으로 돌아온다든지, 분명 기온은 5도를 넘지 않는데 바람이 없고 햇살이 비추는 날에는 외투가 필요 없을 정도로 따뜻해진다. 때문에 겨울 동안 바람과 햇살의 여부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기분을 골고루 느낄 수 있었다.

지난해 제주공항을 마비시켰던 폭설이 재현돼 중산간에 위치한 우리 집이 고립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눈은 내리는 족족 모두 녹아버렸고 결국 겨우내 동네에 눈이 쌓인 날은 딱 하루였다. 덕분에 그 날은 차를 두고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기다리느라 30분 동안 눈바람을 맞아야 했지만 워낙 오랜만에 눈을 봐서 그런지 불편하기보다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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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에도 바람 한 점 없는 날이면 외투조차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곤 한다 ⓒ 이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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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 처음으로 돌담 길과 밭에 눈이 쌓였다. 학교 운동장에는 신이 난 아이들이 뛰어논다 ⓒ 이영섭


불편함보다는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 우리를 즐겁게 했다.

먼저 감귤류가 겨우내 시간차를 두고 수확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서울에서 겨우내 마트에만 가면 귤과 한라봉 등 만감류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산지에서 보니 그게 아니다. 먼저 가장 흔한 노지 감귤의 경우 11월부터 수확을 시작해서 12월 중순이면 시즌 오프가 돼 버린다. 이 시기가 되면 제주도 마트나 시장에서는 귤이 자취를 감춘다. 간혹 있다 해도 맛이 한참 떨어지는, 육지에서 사먹던 밍숭맹숭한 맛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자리를 대신 메우는 것이 만감류의 1번 타자 레드향이다. 한라봉과 서지향을 교배해 만든 레드향은 만감류 중에서 가장 붉은 빛 껍질을 갖고 있는데, 신맛과 단맛이 모두 강렬한 특징을 갖고 있다. 한 마디로 강렬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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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을 맞은 레드향. 처음에는 작은 호박인줄 알았다. ⓒ 이영섭


이 레드향이 제주의 1월을 책임지고 나면 2월부터는 한라봉과 천혜향이 등판한다. 한라봉이야 워낙 잘 알려진 과일이고, 천혜향은 오렌지와 귤을 교배시켜 만든 품종이다. 한라봉이 담백하면서도 새콤달콤한 맛의 조화가 뛰어나다면 천혜향은 단맛 쪽으로 밸런스가 조금 기울어 있는 듯한 맛이다. 이 다양한 만감류들이 제주의 겨울을 책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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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도로만 치면 가장 높은 제철 천혜향 ⓒ 이영섭


재미있는 것은 귤과 만감류 모두 제 철에 맛봐야 그 맛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기가 조금만 빠르거나 늦어도 맛이 확 떨어져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월에 시기가 지난 레드향과 제철을 맞은 한라봉을 비교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란 뜻이다.

이런 귤에 대한 작은 깨우침 외에 사람에 대한 깨달음도 있었다. 흔히 제주 이주를 생각하며 제주도 텃세가 강함을 걱정하지만 그것도 아주 한적한, 게스트하우스나 카페 하나 없는 시골 마을이 아닌 이상 옛날 이야기인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육지의 여타 시골 마을에 비해 제주 시골에는 외지인의 유입이 잦다. 정착을 위해 내려온 이주민은 물론이요, 한달살이를 위해 내려온 육지인들, 이들이 운영하는 숙소와 음식점, 그리고 이를 찾는 관광객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휘젓고 다니다 보니 굳이 텃세를 부리기보다는 아예 눈과 귀를 닫는 경우가 더 많은 듯하다. 한마디로 그러다 말겠지 하는 것이다.

때문에 제주 이주민에 대해 토박이 분들은 텃세를 부리기보다는 곧 돌아갈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무시하고 살아가지만, 함께 할 거라는 믿음이 생기는 시점부터는 동반자로 맞아주는 경향이 있다(물론 몇 대를 제주도 토박이로 살아온 그분들만의 리그에는 참여할 수도, 참여할 필요도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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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 도심 한복판 공원에 웬 기차인가? 알고 보니 기차를 보기 힘든 제주도민을 위해 지난 67년 인천에서 기증받은 거란다 ⓒ 이영섭


그 외 기본적인 성향의 차이도 새삼 깨닫는다. 제주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에 비해 아직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물론 어디나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고, 허세를 떠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몇 십억 원에 달하는 과수원을 갖고 큰 농사를 짓는 분도, 가진 것이 별로 없는 평범한 이도 몰고 다니는 차와 입고 있는 옷에 큰 차이가 없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육지에서 여행 온 월급쟁이 관광객이 제주도민 앞에서 명품 옷을 입고 있는 척 허세를 떨었는데 알고 보니 그분이 갖고 있는 땅만 몇 십억이더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제주도의 토지와 주택 시세 상승으로 자신도 모르게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차와 집, 옷에 별 관심이 없다면 제주 사람들은 돈을 어디에 쓸까? 일단 먹는 거, 노는 거에 많이 쓰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도시 사람들이 김밥에 라면, 마감 시간 마트에서 떨이하는 가장 싼 식재료로 끼니를 때우더라도 남들 눈을 의식해 일정 수준 이상의 옷차림에 돈을 지불하는 것과 달리 제주 사람들은 먹는 것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관광지답게 상당히 비싼 음식 가격, 좋은 과일, 해산물에 척척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노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는 듯하다. 기본적으로 3일간 계속되는 정통 결혼식만 봐도 알 수 있다. 단 반나절, 혹은 몇 시간 만에 결혼을 끝내고 신혼 여행을 떠나는 육지인들과 달리, 제주도에서는 3일 내내 결혼 뒤풀이를 하며 손님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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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나 행사에 제공되는 음식의 양이 상상을 초월한다. 부족하기는커녕 항상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이영섭


술도 빼놓을 수 없다. 운동과 산책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자연 환경, 그리고 상대적으로 부족한 패스트푸드 배달 음식점, 싱싱한 과일과 해산물 위주의 식습관을 갖고도 제주도가 전국 비만률 1위를 달리는 이유가 바로 이 음주에 있다는 게 비공식적인 통계다.

이로 인해 부정적인 면도 많다. 일단 음주운전, 심지어 대낮 음주운전이 빈번하다. 점심식사를 하며 반주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서 대낮에 시내 도로에서 음주운전 단속을 하는 날이면 줄줄이 사탕으로 단속에 걸리기도 한다. 다행히 최근 들어 조금씩이나마 음주운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점심식사를 함께 하며 권해오는 술잔에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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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조금만 더 따뜻해지면 우도에 자전거라도 타러 가야 할 거 같다 ⓒ 이영섭


이렇게 제주의 겨울을 보내며 작은 깨달음과 거기서 이어진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봄이 시작되고 있다. 제주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유채꽃과 벚꽃이 한데 어우러져 제주를 화사하게 덮어갈 때쯤이면 그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 그 아름다운 길을 걸어야겠다.

#제주이주 #귤 #레드향 #천혜향 #한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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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 : 제주, 교통, 전기차, 복지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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