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당 남편의 무능, 결혼제도에 답 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사극 <사임당 빛의 일기> 네 번째 이야기

등록 2017.02.23 10:59수정 2017.02.2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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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이영애 분). ⓒ SBS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신사임당(이영애 분)의 남편인 이원수(윤다훈 분)는 좀 모자란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직업이 선비인데도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다. 부인과 함께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 항상 먼 산 보듯 넋 놓고 살고 있다. 심지어 사기를 당해 주택구입 자금까지 잃고 모습을 감췄다가, 아내가 허름한 집을 구한 뒤에야 가족들 앞에 나타난다.

집안 살림에 아무 보탬도 되지 못하다 보니, 밥상에서도 아내의 눈치를 본다. 아이들 앞에서도 당당하지 못하다. 자식들한테 도리어 훈계를 들어야 할 정도다. 신사임당의 아내, 아니 율곡 이이의 아버지라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인물이다.


이이가 남긴 <선비 행장> 즉 <돌아가신 어머니 일대기>에 따르면, 실제의 이원수는 외형상 스케일이 큰 데 비해 구체적인 실천력이 약했다. 그리고 생활력도 부족했다.

거기다가 오랫동안 과거시험에 매달렸다. 아들 이이가 1548년 열세 살 나이로 진사시험에 급제할 당시에 그는 48세였다. 그때까지도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 아들한테 자극을 받았는지, 2년 뒤인 1550년 연줄을 이용해 특채로 관직에 진출했다. 이래서 이원수는 드라마 속에서처럼 당당하지 못한 상태로 가족들과 부대껴야 했다.

그렇다고 드라마 속에서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무능했던 것은 아니다. 이원수는 문정왕후·윤원형 정권에 줄을 대서 관직에 특채되는 수완을 발휘했다. 오로지 공부만 하는 사람들은 이런 수완을 발휘하기 힘들다. 이원수는 한없이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드라마 속의 이원수가 앞으로 어떤 변신을 보여줄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방영된 것만 놓고 보면 실제의 이원수가 드라마 속의 이원수보다 수완이 좋은 것은 사실이다.

'바보 신랑'을 다룬 설화가 많은 까닭

이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실제의 이원수가 아내보다 부족했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는 아내한테 항상 충고를 들으며 살았다. 그런 면에서는 좀 모자란 남편이었다.


이원수의 모습은 우리나라 설화에 나오는 '바보 신랑' 혹은 '바보 사위'와 상당부분 일치한다.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 바보가 아니라, 어딘가 어설프고 남의 지도를 받아야 해서 바보인 '바보 신랑' 또는 '바보 사위'와 일치하는 면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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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윤다훈 분). ⓒ SBS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간행한 <한국 구비문학 대계>라는 방대한 서적이 있다. 전국 곳곳에 전해지는 설화들을 일일이 채록한 기록물이다. 이 책에는 바보 신부나 바보 며느리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안 나오고, 바보 신랑이나 바보 사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온다.

이것은 우리 머릿속에 입력된 경험법칙과도 부합한다. 모자란 아내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모자란 남편에 관한 이야기가 대중적인 문학작품에 더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우리 머릿속에서도 바보 신부보다는 바보 신랑 이야기가 좀더 친숙하다. 

<한국 구비문학 대계>에 수록된 바보 신랑, 바보 사위에 관한 이야기는 젊은 신랑이 처가에 가서 실수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처갓집 위치를 까먹는다거나, 처갓집 밥상에 놓인 음식을 먹는 방법을 모른다거나, 처갓집 주방에 몰래 들어가 음식을 먹었다가 창피를 당하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많다.

경북 영덕군 달산면에서 수집된 설화에는 처갓집 위치를 잊어버려 곤혹을 치르는 바보 사위가 나온다. 처갓집 동네 이름은 염통골이었다. 목적지가 염통골이란 말을 듣고, 그는 소의 염통을 연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처갓집 인근까지 갔다가 동네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초조해 하던 중에, 논일하는 농부를 발견했다. 그 농부는 소를 이용해서 일하고 있었다. 

동네 이름이 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낸 사위는 농부한테 고함을 쳤다. "그 소 안에 뭐 들었소?" 농부는 황당하다는 말투로 "헛, 그 양반, 소 안에 창자 들었지, 뭐 별 거 들었겠소?"라고 내뱉었다. '창자? 그런 이름은 아니었는데'라는 생각에 사위는 다시 질문했다. 

"아니, 창자 말고 뭐 들었소?"
"간이 들었지."
"거 참, 간 말고 또 뭐 들었소?"
"허파 들었지."
"그거 말고!"
"그거 말고? 아! 염통 들었지."
"옳거니! 염통골이다."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에서는 또 다른 바보 사위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사위는 먹는 것 때문에 처가 쪽 사람들의 웃음을 샀다. 콩을 껍질째 먹거나 송편을 알맹이만 먹는 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이다. 충북 영동군 학산면에서 바보 사위로 전해지는 남자도 먹는 것 때문에 실수했다. 그는 홍시를 몰랐다는 이유로 이곳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바보로 소문나게 되었다.

전통적 결혼문화와 관련 있는 바보 남자들의 등장

이렇게 결혼 문화에 관한 설화에 바보 남자들이 등장하는 것은 전통적인 결혼문화와 관련이 있다. 유림세력이 지방 곳곳에 성리학 이념과 향약을 보급한 16세기 전반까지도 우리나라 결혼 생활은 데릴사위제도로 이루어졌다. 신부와 신랑이 처갓집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몇 년 동안 처갓집에 기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신랑이 처갓집에서 일을 해줘야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평생 동안 처갓집에서 일하는 신랑들도 적지 않았다. 

16세기부터 유학자들이 이 제도를 없애려고 노력했고 또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이것은 조선 후기까지도 생명력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오래도록 유지된 데릴사위 문화가 바보 신랑이나 바보 사위의 설화를 생산한 최대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지역 간의 문화적 차이가 오늘날보다 훨씬 더 컸던 시대에, 객지 타향으로 장가가는 남자는 현지 문화에 낯설 수밖에 없었다. 처갓집 동네의 지명과 음식 문화를 포함한 모든 것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 지역의 사투리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전국 각지의 특산품을 쉽게 맛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던 옛날에는 송편이나 홍시 맛을 못 본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안 그래도 긴장이 바짝 들었을 새신랑이 처갓집에서 이런 음식을 처음 구경한다면, 현지인들의 눈에 재미있는 광경이 연출되기 쉬었을 것이다. 낯선 음식이나 상황 앞에서 당황해 하고 실수하는 모습이 현지인들한테는 바보의 모습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모습에 과장을 보태서 위와 같은 설화들을 생산했을 것이다.

사임당 남편도 그런 경우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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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한국민속촌에서 찍은 전통 혼례. ⓒ 김종성


무기·금속·병균을 소재로 인류 역사를 설명한 <총, 균, 쇠>에서 저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한 말이 있다. 사람이 멍청해 보이는 것은 지역과 상황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뉴기니인이 어느 머나먼 촌락에서 도시로 이동해 갔을 때, 서구인들의 눈에 비치는 그들의 모습은 멍청해 보일 수밖에 없다."

다이아몬드는 반대 상황에서는 자기 같은 서양인이 뉴기인들한테 멍청하게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계속된다. 뉴기니인들의 홈그라운드인 정글 속에서 자신이 느낀 당혹감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뉴기니인들과 함께 정글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나는 정글 속의 길을 따라가거나 잠자리를 만드는 것과 같은 간단한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그런 나 자신이 그들에게 얼마나 멍청하게 보일지를 끊임없이 의식하게 된다."

다이아몬드의 경험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건설 현장에서 무거운 질통을 짊어진 사무직 노동자도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은 어깨를 짓누르는 질통 때문에도 곤혹스럽지만, 다른 노동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현란한' 공사 용어들 때문에도 곤혹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다른 숙련 노동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며 뒤에서 뭐라고 수군댈 것인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국 구비문학 대계>에 소개된 신랑·사위들도 비슷한 이유로 객지 타향에서 바보 소리를 들어야 했을 것이다.  

이원수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는 그러했다. 그는 안 그래도 성격, 지적인 면, 생활력, 사회적 명성에서 아내보다 떨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오랫동안 처가살이를 해야 했다. 처가살이를 하지 않을 때는 처가 근처인 강원도 평창에서 살았다. 아내와 함께 자기 홈그라운드에 제대로 정착한 것은 결혼 19년이나 지난 뒤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처가나 그 인근에서 살아야 했으니, 오래도록 처갓집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긴장된 상태로 살다 보니 이것저것 실수도 많았을 것이다. 현지인들의 주목을 끌거나 웃음을 유발하는 일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도 자신이 바보 신랑, 바보 사위로 비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을지도 모른다.
#사임당 빛의 일기 #이원수 #신사임당 #바보 신랑 #바보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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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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