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할머니는 편지를 쓰기까지 88년이 걸렸다

성인 문자해득 프로그램 졸업식 열려... 금천구에선 88세 심길례 어르신 등 32명 졸업

등록 2017.02.27 16:05수정 2017.02.27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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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고도 못 보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글을 배우고 나서 세상이 달라졌지."

1930년에 태어난 심길례 어르신은 올해로 88살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 현대사를 두 눈으로 봐온 세대지만 정작 심 할머니는 작년까지 편지 한 줄 쓸 수 없었다. 배움의 시기를 놓쳐 한글을 모른 채로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올해부터는 자녀들과 편지도 주고받을 수 있게 됐다. 주민센터의 한글 교실에 다녀서 글을 익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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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길례 어르신 ⓒ 금천구청


지난 24일 오후 서울시교육청 교육연수원에서는 '2016년 초등학력인증 문자해득 프로그램 이수식'이 열렸다. 이 프로그램은 성인학습자가 문해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면 의무교육에 해당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력을 인증받는 제도다. 2011년 처음 시작해 작년엔 전국에서 1700여 명이 초등학교 학력을 75명이 중학교 학력을 인정받았다.

이날 심길례 어르신도 학위모와 졸업가운을 입고 졸업식에 참석했다. 금천구 시흥5동 주민센터의 신바람 한글교실(강사 윤영희)에서 공부한 심 어르신은 올해 서울시 전체 이수자 중 최연장자이기도 하다. 이날 이수식에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시 교육감이 주는 상을 받았다.

심길례 어르신은 상을 받은 것도 기분이 좋지만 무엇보다 이제 예전과 달리 글을 알게 되어서 기쁘다고 말한다.

한글 교실을 다니는 학생들 모두 나이가 적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심길례 어르신은 제일 나이가 많다. 올해 졸업생 평균연령은 69세로 심 어르신과 스무 살이 차이 난다. 노인정에도 세대차이가 있다는 농담이 나오는 시대다. 심 어르신에게 나이 차가 나는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힘든 점이 없냐냐고 물으니 웃으며 "없다"라고 답한다. 오히려 심 어르신은 "젊은 분들 덕분에 공부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늦깎이 공부라서 어려운 점도 많았다. 처음 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에서 공부한 걸 집에 와서 다시 공부해야 하는데 가르쳐줄 사람이 없어"서 제일 힘들었다고 말한다. 그때 한글학교 선생님이 큰 의지가 됐다.

한글을 배우면서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을 물으니 "가족,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글 교실을 졸업하면서 그 소원을 이뤘다. 졸업할 때 함께 공부한 친구들과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더 배우고 싶은 것은 없는지 묻자 연신 "내 나이에 이만큼 배웠으면 충분하지"라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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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 독산2동 주민센터 한글교실 졸업식 사진 ⓒ 이상원


금천구에 사는 심길례 어르신은 시흥5동 주민센터에서 진행하는 한글교실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금천구 내에선 시흥5동 주민센터, 독산2동 주민센터, 살구여성회 세 곳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2017년에 졸업한 32명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총 175명이 교육을 이수했다.

"무엇보다 말 통하는 친구가 생겨서 너무 좋아."

이날 심길례 어르신과 함께 졸업식에 참여한 금천구 독산2동 어르신들에게 글을 배운 이후로 제일 좋은 점은 무엇인지 물었다. 이구동성으로 "자신감이 생겨서 좋다"고 답했다. 한 어르신은 "72년 만에 문해교실 가서 눈이 떴다"고 말했다. 학력인증 프로그램은 한글뿐만 아니라 영어, 수학, 역사 등의 과목도 함께 가르친다. 또 다른 어르신은 "이런 모임을 해서 너무 즐겁다. 공부를 하면서 앞길이 훤해진 느낌이다. 주변에도 꼭 추천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독산2동 어르신들이 학교를 졸업하기까진 한글교실 양승학(61) 선생님의 도움이 컸다. 제자들은 입을 모아 "때로는 선생님같이 때로는 친구같이"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좋았다고 말한다. 양 선생님은 교직과는 상관없는 일을 하다가 2011년을 시작으로 7년째 어르신을 가르치고 있다. 봉사활동을 하던 어느날 한 어르신이 '내가 까막눈이 되어서 속상해 이렇게 살다 죽어야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어르신의 삶에 용기를 주고 싶어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올해에만 그에게 배운 초등과정 졸업생 중 5명이 중학교 과정에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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