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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가족, 2년 만에 찾으러 갔더니...

[세심한 리뷰] 기러기 가족과 워홀러의 비극적 삶, 영화 <싱글라이더>

17.03.03 17:42최종업데이트17.04.1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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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의 흥행과 관계없이 매력 충만한 작품들을 열린 감각으로 그러모아 세심하게 해석하는 공감의 기록입니다. [편집자말]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떠나는 마지막 여행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주)


영어를 해야 한다며 아내와 아들을 호주로 보낸 건 그였다. 어쩌면 그때부터가 비극의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증권사 지점장을 하며 부실채권인지도 모르고 영업을 시작했던 그때였을까. 증권회사는 망했고 영원불멸할 것 같던 그가 가진 모든 것이 허물어져 내린다.

증권회사 지점장으로 한국사회 내에서 꽤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재훈에게 닥친 사건은 그 건조한 생활을 어느 정도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잘 나가던 직장, 좋은 집과 차. 그리고 유학 중인 아이와 아내. 그의 삶은 지켜보고 평가할 수 있는 외적인 조건으로 따지면 완벽했다. 그러나 멀리 호주에서 보낸 아이의 생일축하카드를 보며, 크게 웃을 수 없는 병이라도 걸린 듯이 그의 감정은 시종일관 침체하여 있다. 테이블 위, 식은 초밥에서 번뜩이는 차가운 섬광은 그의 입속으로 서서히 잠식한다. 그리고 다시 노트북 앞. 오래전부터 결심해 왔던 일을 이번에야말로 꼭 해내겠다는 결의가 느껴지는 그의 눈빛에 아내 수진과 아들 진우가 사는 호주의 조용한 마을 풍광이 담긴다. 축 처진 몸을 했지만, 손가락 끝에 남은 힘을 간신히 집중시켜 호주행 항공권을 발권한다. 아들과 아내가 떠난 지 2년. 그는 드디어 가족을 만나러 간다. 짐 하나 없이, 출근하듯 양복 하나 달랑 걸치고 말이다.

배우 이병헌의 연기에 의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화는 관객이 전체적인 흐름 안에서 재훈에게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도록 이끈다. 그랬다. 재훈의 호주행은 새롭게 변화된 환경에서의 기대를 하게 한다. 차갑게 식은 초밥으로 허기를 달래는 일. 꽉 막힌 출근길 차 안에서의 망연한 눈빛.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정신과 의사뿐이던 그 고독한 일상이 종지부를 찍길 관객은 간절히 소망한다. 부실채권으로 인해 망한 회사의 부속품밖에 되지 않던 기러기아빠의 무너진 삶. 극한 상황에서 가족이 희망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를 품게 하는 것이다. 호주 조용한 마을의 유유자적한 풍경까지도 그 눈부신 기대에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바이올린을 든 그녀

한국에서 바쁜 일에 치여 사는 남편 재훈(이병헌)과 그 옆의 수진(공효진)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사실 수진이 원한 호주행이 아니었다. 아들 진우 유학을 추진한 재훈에게서 나온 '요즘 호주도 괜찮다.'는 평가가 전부였다. 바이올린을 전공하였으나 결혼한 이후 제대로 연습도 해보지 못하고 방치되어있는 바이올린을 보며 수진은 괴로웠다. 그럴 바에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낫다 싶어서 팔아버릴까 결심도 했었다. 앞으로 더는 바이올린과 일체 되는 순간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일종의 자포자기였던 걸까. 감독은 재훈과 수진의 과거 짧은 영상 속에 이미 그 관계 내에 자리하고 있는 고독을 집약시킨다.

가족 내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던 재훈과, 남편이 설계한 유학 제안에 두려움으로 눈빛이 흔들려도 아들을 데리고 호주로 떠난 수동적인 수진. 결정과 선택에 자신 의지를 잃은 수진의 고독은 호주로 떠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편 주장에 반하지 않는 순종과 아들의 공부 뒷바라지를 위해 두려움에 맞선 엄마의 희생은 여성의 고독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장치이다. 자신을 잃어버린 여성 수진이 일에만 매달린 남편에게서, 또 철모르는 아이에게서 고독을 달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괴로워 팔아버릴 것이라 겉으로 속으로 되뇌던 존재인 바이올린을 처분하지 않고 호주까지 데려간 사정을 공감하는 것엔 수진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렇다. 모든 것은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존재가치가 변하게 마련이다. 수진의 바이올린이 갖는 의미 역시 그녀 의지 여부에 의해 변했다. 호주의 어느 조용한 마을, 평화로운 저녁 시간에 잔잔하게 울리는 수진의 바이올린 선율. 제대로 소리 내지 못했던 한국에서의 무의미한 삶을 마치고 새로운 곳에서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듯 수진의 바이올린은 변화된 그녀 삶을 대변한다. 더는 누군가의 부속품이 되지 않겠다는 한 여성 의지 발현은 요란하게 연출되지 않았음에도 그 속내를 이해함과 동시에 깊은 공감으로 번진다. 그녀가 다시 꼭 바이올린을 연주해야 하는 이유엔 그 의지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

낯선 남자

호주의 가족 집으로 찾아왔음에도 멀리서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재훈(이병헌)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늦은 밤, 재훈은 어두운 낯선 길을 걸어나간다. 분명 아내와 아들이 있는 호주까지 날아왔음에도 그는 쉽사리 가족 곁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막연하게 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그 이유로 2년 동안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가족의 일상은 그 없이도 평화롭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멀리서 지켜만 보다 갈 곳 없이 터벅터벅 걷는 마을 길 중간에서 마주한, 그에게 처음 말을 걸어준 할머니는 현관문을 열고 나와 '누구냐'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묻는다. 가족을 찾아온 그가 이곳에서는 완벽한 이방인이다. 가족임에도 서로의 삶 안을 들여다볼 여유 없이 살았다.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다.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 수는 있다. 2년 전 아내와 아들을 호주로 떠나보낼 때 이미 이방인이 될 준비를 해야 했다.

가족이 정착한 마을 옆집엔 크리스라는 낯선 남자와 그의 딸이 살고 있다. 진우가 숙제를 마치면 근처 바다로 함께 놀러 가는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옆집 남자 크리스와 아내 수진의 관계. 묘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몰래 크리스의 뒤를 밟는다. 영화는 아내와 아이의 공간에 진짜 낯선 남자가 되어버린 재훈의 시선에 초점을 맞춘다. 타인보다 못한 존재로 지낸 2년을 훌쩍 날려 보내고 마주하게 되는 건, 기러기 아빠의 숙명이다.

가족 곁에 다가설 수 없이 철저히 고립되어 버린 재훈의 심경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관객뿐이다. 재훈과 관객의 호흡만으로 아내 수진, 아들 진우와 그 곁을 맴도는 크리스 가족의 삶을 추적한다.

수진이 바이올린을 들고 악단 오디션을 간 사이 급성장염으로 실신한 아들 진우를 들쳐 안고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병원으로 달려간 옆집 남자 크리스는 재훈과 관객에게만 '낯선 남자'이다. 피범벅이 된 한쪽 발을 하고는 진우가 괜찮다는 소식을 전화를 통하여 수진에게 먼저 전하는 크리스에 비해 아빠이자 남편인 재훈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크리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들에게 다가가 손을 꼭 잡고 애정 섞인 눈빛으로 마음을 전하는 일은 그간 '낯선 남자'로 살아온 재훈에게 아빠가 해줄 수 있는 전부다. 극 중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지만 재훈과 호흡하던 관객은 서서히 알아가는 중이었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이 진짜 '낯선 남자'는 재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들이 겪는 참변

워홀러 지나(안소희)가 당하는 참변은 충격적이고도 가슴 아프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재훈이 한국인 워홀러 지나를 우연히 만난 건 공항에서 본다이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한 정류장이다. 유난히 큰 배낭을 짊어지고 경쾌한 발걸음을 옮기던 지나를 다시 만난 건, 가족의 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하던 식당에서다. 잠깐의 통화를 마치며 식사를 급하고 짧게 끝낸 지나가 만난 이는 다른 워홀러들. 2년간 하루 10시간씩 일해 모은 호주달러를 한화로 더 높게 쳐주겠다는 그들에게 속아 참변을 당하고 만다.

'좋은 거래'에 속아 억울하게 당한 지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이는 바로 재훈이다.

증권회사의 부실채권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열정적으로 일한 영업직원들에 의해 잘 팔려 나갔다. 재훈 역시 그 실적으로 지점장의 자리까지 올라 부를 축적했다. 부실채권 판매 피해 금액은 1조 3천억 원이었다. 분노와 슬픔을 누를 길 없는 고객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안심해도 된다고 판매를 권하던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잘못했다'는 말도 죄다.

그러나 워홀러 지나와 마찬가지로 재훈 역시 억울한 감정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열심히 살았다'는 자부심마저 되돌릴 수 없는 '좋은 거래'로 인해 사라졌다. 열심히 살았다는 것에 자괴감이 들 정도로, 쏟았던 열정의 청춘을 잠깐의 욕심으로 인해 잃은 지나. 가족과 떨어져 일에만 몰두하고 살았던 전형적인 기러기 가족의 가장 재훈.

영화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재훈'역의 배우 이병헌의 호연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그들의 숨겨진 진짜 이야기가 천천히 호흡하던 관객에게 가쁜 숨을 불어넣는 영화의 결말은 절묘하게 영화의 처음과 가까워져 있었다. 처음, 암전된 스크린에 자막처럼 올랐다 사라진 시인 고은의 <순간의 꽃> 한 구절은 비극적인 결말을 충분히 설명한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 그 꽃'

관객 역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문학과 영화가 유도하는 참회는 그 매체로 인해 예술적이지만 또 현실적이기에 깊은 공감을 끌어낸다. 그 참회의 대상이 어딘가에 존재할 기러기가족이나 워홀러들만은 아니다. 영화가 관객을 포용하는 범위가 크다는 것도 그 이유지만, 이 사회에 비극적이고 가슴 아픈 순간들을 사는 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도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순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rnjstnswl3)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싱글라이더 이병헌 공효진 기러기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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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문화,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해 공부하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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