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퇴근만이라도..." 우린 왜 이게 어려울까

[3.8 세계여성의날③] 1987년 설립된 대전여민회

등록 2017.03.03 16:56수정 2017.03.04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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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대전지역 여성단체의 이야기를 3월 1일부터 8일까지 연재합니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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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여민회 ⓒ 대전여민회


나는 대전지역 여성단체 4년차 활동가다. 대전여민회가 내 직장이다. 대전의 여성단체 중 가장 오래 역사를 자랑하는 대전여민회는 1987년 12월 13일 설립됐다. 그 당시 대부분의 운동단체들이 그러했듯이 대전여민회 또한, 반독재 민주운동이란 출발점을 갖고 첫발을 디뎠다.

여성의 손으로 민주화된 나라를 만들자는 마음은 여성 권익 신장과 성평등 문화 확산이란 생각으로 이어졌다. 대전여민회는 여성의 정치참여, 평화, 생태, 인권, 문화 등 다양한 영역의 활동을 통해 대전 지역 진보여성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여성단체에서 활동하기 위해 대전에 있는 모든 여성단체를 검색했고, 무작정 찾아간 곳이 대전여민회였다. 그리고 반년 정도 회원 활동을 하다 이곳에서 일하게 됐다. 모든 것이 마음에 쏙 든다고 할 수는 없지만, 꽤 만족하고 있다.

이곳에서 일을 하기로 결심했을 때, 하루 24시간 중 8시간을 잠잔다면 8시간은 노동을 8시간은 그밖에 생존을 위한 활동을 할 텐데, 하루에 1/3이나 되는 시간을 전혀 관심 없는 일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관심 없는 일을 하며 시간을 죽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것이 여성운동이라는 답을 구했을 때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 잘 할 수 있는 일, 만족하는 일에 이보다 좋은 직업은 있을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여성노동 관련 사건... 운명이었나


여성운동을 하길 원해서 이곳에 왔는데, 도대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사실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단체도 그동안 비전을 두고 많은 고민을 해왔던 터였다. 지역에서 30년이나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2007년 이후, 각 부서마다 비전을 담아 분화시켰다. 규모나 영향력에서 모든 것이 축소되었다. 우리만의 색깔을 다시 찾아가야 하는 시기였다. 이 때 '노동' 문제가 코앞의 문제로 다가왔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과부하 될수록 노동시장에서 가장 소외받는 그룹이 여성임을 심각하게 느꼈다. 더 큰 문제는 지역에서 여성 노동 의제를 다룰 수 있는 단체가 없다는 거였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여성노동 관련 사건이나 상담이 생길 때마다 우리 단체로 계속 연결이 되었다. 아마도 운명이었나 보다.(웃음) 그래서 지난 2015년부터 고용평등상담실 운영을 하게 됐으며, 지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지난 2016년, 그것도 또 아주 자연스럽게 여성의 노동지속에 관한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이것은 나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

'30대 비혼 여성으로 살아가는 나'의 친한 친구들은 모두 결혼을 했다. 하나같이 반짝이던 내 친구들은 아이를 낳으면서 이상하리만큼 동일한 생활조건을 형성했다. 그녀들은, 당연히 일하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일과 가사의 이중부담 또한 모두 지니게 되었다. 친구들은 이른 아침부터 동동거리며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야 했고, 정신없이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내리 8시간 노동을 하고, (야근하게 되면 답이 없다) 일 끝나면 총알같이 아이를 데리러 가거나 저녁을 짓고, 숙제를 봐주는 숨 쉴 틈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들은 항상 과부하 되어 있었기에, 어떤 것도 만족할 만큼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직장에서는 야근이 싫어 애 핑계 대는 '아줌마' 취급을 받았다. 집에서는 그 나름대로 아이와 항상 함께 '전업주부'로 있어주지 못한 엄마로서의 죄책감에 눌려 지냈다. 이런 가운데 친구들은 '일을 계속 다녀야 하나' 고민했다.

여성노동자 20명 만나 인터뷰, 씁쓸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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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여민회 ⓒ 대전여민회


이러한 문제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의문을 갖기 시작한 나는 20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일단 실제로 여성노동자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나 실태파악이 먼저였다. 그러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여성노동의 조건이 열악하다는 사실만 다시 한 번 확인해 씁쓸했다.

여성은 비정규직, 소규모 사업장, 장시간 노동, 비숙련 노동, 저임금 등 노동시장 안에서도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언제나 소모품처럼 대체 가능한 스페어 역할을 하는 이들. 당연히 책임감이나 소속감은 없었다. 그녀들에게 직장은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니 노동의 지속 또한 어려웠다.

인터뷰 내용 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여성노동자들이 모두 일·생활 균형을 이루기 위해 정시퇴근에 대한 욕구가 가장 높았다는 것이다. 가사 분담, 적절한 양육, 보육 대책, 성차별적인 노동시장의 해소와 같은 문제제기도 있었지만, 모두들 하나 같이 입을 모아 외쳤던 건, 정시퇴근이라도 잘 지켜진다면 일과 삶에 여유가 좀 생길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요구인데, 근로기준법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여성노동자들의 처지를 생각할 때, 마음 한편이 뭉클해졌다.

지난 1908년 3월 8일, 미국의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1만 오천 명의 여성노동자들의 외침이 있었다.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정당한 임금을 보장하라!" 그러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느꼈던 건, 우리는 여전히 100년 전의 요구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절반이 비정규직으로 최저임금이나 최저임금 미만의 저임금을 받고 있으며, 남성노동을 대신하는 보조인력 취급을 받고, 산업재해는 끊이지 않으나 적절한 보상은 없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도, 활동하기도 쉽지 않다. 또한 투표권은 부여받았으나 여전히 정치세력화 되지 못하여,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의 정치는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상황이 비록 이렇게 더딜지라도 언제까지나 바뀌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해서 대안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다. 시대의 한축은 끊임없이 이상을 그려내고 지향하는 바를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에 의해 틈이 생기고 경계가 무너진다고 생각한다. 나와 같이 이런 일에 즐겁고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대전여민회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은 이런 것 들이지 않을까? 당신의 연결 속에 우리가 있기를 바란다.

대전여민회는요
1987년 설립된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여성단체다. 마을사업, 성매매 피해 여성 지원 사업, 여성정치세력화, 한부모문제, 성평등교육 등 여성 관련된 모든 이슈를 다루는 대표적인 여성단체다.

대전여민회는 2007년 여성정치세력화를 이루겠다는 꿈을 담아 정치 부서를 대전여성정치네트워크로 분화시켰다. 전업주부를 마을의 리더로 키우는데 성공한 마을사업 파트는 마을 숲 이란 마을기업으로 2012년 분화했다.

대전의 성매매 피해 여성을 지원한 여전여민회 성매매 상담소는 티움이란 이름으로 2010년 분화돼 대전 지역의 유일한 성매매 피해 여성 지원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2007년 분화한 대전평화여성회도 모태가 대전여민회다.


덧붙이는 글 이은주 기자는 대전여민회 사무국장입니다.
#대전여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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