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마리아의 출현, 가톨릭 개종 붐이 일어나다

[세계일주 인문기행 - 일곱 번째 편지] 라틴아메리카 정체성의 전형, 멕시코시티에서

등록 2017.03.09 11:23수정 2017.03.29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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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신영복의 세계여행)을 처음 접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문명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따뜻한 글과 그림 엽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그 감동으로 막연하게 세계일주에 대한 꿈도 품게 됐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2017년, 배낭여행자가 되어 그 꿈을 실행에 옮깁니다. 당신이 보낸 첫 번째 엽서에 적혀있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에 무모한 용기를 얻어 여행지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이 여행기는 당신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당신들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기자 말

상상이 안 가는 일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고산지역으로 인식되어 있는 멕시코시티가 아주 먼 옛날도 아니고 불과 몇 백 년 전에는 거대한 호수였고, 그 호수를 매립하여 만들어진 도시라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13세기부터 스페인의 침략자 코르테스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번영을 누렸던 아즈텍 제국이 건설했던 수도 테노치티틀란. 그 시절부터 7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멕시코시티는 영광과 수난의 멕시코 역사를 함께 한 고도(古都)였습니다. 멕시코시티의 외곽에 위치했던 미스터리의 고대 도시국가 테오티와칸의 전성기가 4세기~7세기 사이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 도시가 갖는 역사적, 문화적 깊이를 더 올려 잡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멕시코시티는 중심부 인구가 약 9백만 명이고 외곽까지 범위를 넓히면 약 2천만 명에 이르니, 서울과 경기도가 하나의 생활권을 공유하는 한국의 수도권과 유사한 환경입니다.  이 국제적인 메트로폴리탄은 지하철 티켓을 300원 정도에 구매할 수 있고, 우리 물가의 절반 정도면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 물가가 착했습니다. 배낭여행객에게는 주머니에서부터 호감이 가는 도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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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시티 외곽에 위치한 테오티와칸 유적. 태양의 신전 정상에서 바라본 달의 신전과 그 주변 일대의 모습 ⓒ 정수현


멕시코를 지리적으로 구분할 때 북아메리카로 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역사적 전통과 언어 및 문화적 특징으로 보았을 때 아메리카대륙의 남단 아르헨티나부터 멕시코까지를 하나의 라틴아메리카 문명권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 볼리비아, 페루를 거쳐 멕시코에 이르는 여정 동안 나는 줄곧 '라틴아메리카다운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왔습니다. 


그리고 '가장 라틴아메리카다운 장소'가 여기 멕시코시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정할 수 없는 표현이지만 '신대륙 발견' 그 이전의 고대 문명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스페인이 지배한 3백년 식민지의 영향이 뚜렷하게 존재하며, 독립 이후 독재와 혁명으로 점철된 격동의 현대사를 모두 간직한 곳이 바로 멕시코시티이기 때문입니다. 

과달루페 대성지, 국민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그리고 삼문화광장은 라틴아메리카 정체성의 전형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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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바실리카 성당 내부에 전시된 '과달루페 동정녀 마리아'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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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루페 대성지 안에 조성된 기념공원. '갈색 마리아'는 라틴아메리카에 현지화 된 가톨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정수현


과달루페 대성지는 1531년 후안 디에고라는 원주민 개종자에게 동정녀 마리아가 2번 나타나 교회를 세우라고 명했다는 장소입니다. 

특히 동정녀의 두 번째 출현은 '과달루페 동정녀 마리아'라고 불리우는 그림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 때 마리아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금발에 하얀 피부를 지닌 여인이 아니라 갈색 피부의 원주민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멕시코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붐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훗날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을 받아 이곳은 세계적인 기적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나는 '과달루페 동정녀 마리아'의 출현과 그림에 대한 신비로운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검증하는 문제는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갈색 마리아'의 출현과 그 이후 일어난 변화들을 통해, 스페인 침략과 함께 강압적으로 이식된 가톨릭이 라틴아메리카에 토착화되어 가는 과정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히 정치적이었던 종교가 토착민들의 신심 속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벗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당 주변을 가득히 채운 신자들의 믿음과 소망, 그리고 최초의 비유럽권 출신 교황으로서 감동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에서 가톨릭 인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재를 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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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국립대학 중앙도서관에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건물 외벽 4면을 이용하여 멕시코의 과거, 현재, 미래를 표현했습니다. ⓒ 정수현


멕시코 500페소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디에고 리베라는 국민화가로 불리우며 많은 멕시코인들의 사랑을 받는 화가입니다. 

1910년 혁명 이후 멕시코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불안했습니다.  이런 사회적 혼란을 민족적 자긍심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교육부에서는 당시 유럽에서 활동하다 돌아온 리베라에게 건물 벽화를 의뢰합니다. 벽화운동은 당시 대다수가 문맹이던 국민들에게 멕시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데 훌륭한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멕시코 국립대학 중앙도서관과 국립궁전에 그려진 벽화는 생동감 넘치는 독특한 화풍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스페인 침략 이전의 멕시코의 고유한 신화와 역사, 식민지배시절의 고난, 종교, 독립과 전쟁,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 등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멕시코의 영광과 수난사를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벽화는 멕시코의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전통과 전망을 표현했고, 무엇보다 그 역사 현장의 중심에 멕시코 민중을 그려 넣음으로써, 그림이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리베라는 유럽에서 공부하며 앞선 서양미술의 전통을 배웠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벽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습니다.  미술작품이 몇몇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만 향유하는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삶 자체라는 가치를 실현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틀을 넘어 예술사의 새로운 전형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유럽의 아류가 아닌 라틴아메리카의 자부심을 웅변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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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궁전 내부 1층에서 2층 계단 복도 사이의 벽면에 그려진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가운데 부분은 스페인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수난, 전쟁과 독립 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 정수현


아즈텍 제국의 유적과 식민시절 지어진 스페인풍의 산티아고 성당 그리고 현대적인 빌딩이 한 공간에 자리잡고 있어서, 멕시코의 과거/현재/미래가 공존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유명한 삼문화 광장은 예상보다 고요했습니다. 

아즈텍 제국의 병사들이 스페인 침략군에 맞서 결사항전을 벌이다가 최후를 맞은 비통의 땅이요, 1968년에는 수많은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사회변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군경의 발포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비정의 땅이었지만, 화창한 햇살이 내리 비추는 광장은 세월의 무상함만큼이나 적막했습니다.

텅 빈 광장 앞 기념비에는 'Adelante'라는 문구가 크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우리말 번역을 찾아보니 '앞으로, 더 저쪽으로'라는 의미를 가진 스페인어였습니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달려온 멕시코와 라틴아메리카가 과거와 현재를 딛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희망과 의지를 조용히 표현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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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문화 광장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 맨 앞쪽이 아즈텍 제국의 유적, 뒤에 보이는 성당이 스페인풍의 산티아고 성당, 오른쪽에는 현대적인 고층빌딩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 정수현


언젠가 당신이 멕시코의 대학생들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코르테스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너무 오래 전 이야기 아니냐'고 당혹해 하면서도, 유럽의 하위문화로써의 라틴아메리카가 아니냐는 짓궂은 질문에 단호하게 응수하던 그들의 자신감과 균형잡힌 인식에 호되게 당했다고 했습니다.  인디오 원주민과 백인 정복자라는 이분법을 거부하는 '혼혈의 독립'은 현실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은 아시아 독립투쟁의 치열함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독립 이후 지금까지 견지해온 독립의지와 자부심은 훨씬 앞서며, 정체성의 기본은 독립"이라던 당신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렇다면 반문해보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라틴아메리카 만큼의 치열한 독립의지와 정체성이 과연 있는가?  디에고 리베라와 같은 거장의 존재 유무 이전에, 그런 작가가 설 수 있는 주체적인 문화적 토양을 가지고 있는가?  중국과 일본, 미국으로 이어져 온 역사적 종속에서 생긴 식민근성과 서구사회에 대한 동경 속에서 형성된 문화적 콤플렉스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조선이 되고,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조선을 위한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를 위한 조선이 되며,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조선을 위한 예수가 되지 못하고 예수를 위한 조선이 된다'고 통탄하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얼마 전 한 친박단체가 주도한 대통령 탄핵 반대집회에 등장한 성조기,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이스라엘 국기까지 등장하는 웃지 못할 장면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과 독립성에 대한 문제를 다시 한 번 씁쓸히 돌아보게 됩니다.
덧붙이는 글 2016년 말부터 약 1년간의 일정으로 세계일주 인문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멕시코시티 #테오티와칸 #과달루페 #디에고 리베라 #라틴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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