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페미니스트 같이 안 생겼는데 왜 그래?"

[3.8 여성의 날 ⑤] 페미니스트 생김새를 규정하려는 속내... 결코 '단일화된' 존재 아냐

등록 2017.03.07 21:18수정 2017.03.07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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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살기 좋아졌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뭐가 좋아졌는지 잘 모르겠는 순간이 더 많습니다. 여전히 '여자'라서 차별받고 억압받고, 특정 역할을 하길 강요받죠.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우리 사회 여성들의 목소리, 여성을 생각하는 목소리들을 몇 차례에 걸쳐 전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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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SNS에서 이 구호를 활용한 해시태그 운동이 일기도 했다. ⓒ 김예지


여느 잉여한 스마트폰 중독자들이 그렇듯이, 유튜브에서 영상과 영상 사이를 횡단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많다. 그날도, 어딘가의 금손들이 자막까지 만들어 준 페미니즘 영상들을 보다가 그 영상을 만나게 되었다. 제목은 "여자가 말하는 페미니스트 피하는 법"이었다. 당연히 페미니스트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웃는 영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영상을 눌렀다. 놀랍게도, 영상의 논조는 진지했다.

연애상대가 알고 보니 페미니스트일까봐 두려워하는 이성애자 남성들에게, 영상 속의 여성은 페미니스트를 피하는 몇 가지 방법을 안내해 주었다. 그 방법은 쉽고 간편하게도 모두 외모에 기초한 것이었다. 다 함께 체크해 보자.

1. 빨간색이나 파란색으로 밝게 염색한 짧은 머리.
2. 다리털이나 겨드랑이 털을 깎지 않고, 때론 겨드랑이 털을 염색함.
3. 타투와 피어싱을 하고 있음.
4. 살이 쪘음.
5. 이상하게 생긴 안경을 낌.
6. 빨강, 분홍, 파랑, 검정 립스틱을 바름.
7. 남자 같은 스타일링을 함.

짜잔, 여러분은 진정한 페미니스트 스타일링 시험에 통과하셨습니까? 이 영상은 끝에 가서는 무난한 색깔의 긴 머리 여성과 짧은 머리 여성 사진을 가져다 놓고 어느 쪽이 페미니스트일지 맞추는 실전 문제까지 냈다. 영상 속에서 여성들은 '더 사회적인' 스타일링과 그렇지 않은 스타일링이라는 기준에 따라 노골적으로 분류되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나는 기껏해야 하나 정도만 간신히 체크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는 빨간색도 아니고 파란색도 아닌 아주 무난한 갈색의, 무려 '긴 생머리' 여성이다. 가수 빛과 소금이 1990년대에도 '샴푸의 요정'에서 애타게 찾던, 2013년에도 틴탑이 그렇게 불러대던 '긴 생머리 그녀'. 영상 만든 사람이 내 사진을 보고 "네, 이분은 페미니스트가 아닙니다"라고 상냥하게 설명해 줄 걸 생각하니 순간 억울해서 미용실에 가서 쇼트커트에 탈색을 해 버릴까 하는 충동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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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말하는 페미니스트 피하는 법'이라는 영상은 페미니스트를 낙인찍고 혐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은 영상 중 캡처 ⓒ 유튜브 영상 캡처


그들의 '확증편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영상 속에서 드러나는 경험적 재단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설득력있게 느껴질 것이다. 그 이유는 영원히 인터넷을 밈(인터넷상에 재미난 말을 적어 넣어서 다시 포스팅 한 그림이나 사진)으로 떠돌아다니는 '메갈 인증 캡처'나 구글에 Feminist meme라고만 쳐도 와르르 나오는 'ugly'라는 글자들과 연관되어 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페미니즘에 대한, 무엇보다 페미니스트 여성에 대한 중요한 마타도어는 '사랑을 못 받아서'로 시작했다. 이것은 자신들이 '상식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다정하고도 우려 가득한 분석이기도 하다. '애인 하나 없을 것'이라는 이상한 조소는 일베에게도 적용되는 규칙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상식'과 어긋나는 주장을 할 때마다 딱하다는 말투로 말한다.

"너희가 사랑을 못 받아서..."

이 주장은 때로는 다른 형태로 발화되기도 한다. "사랑받는 여성은 자신이 받는 차별에 대해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이를테면 1월 초에 여성신문에 실린 '페미니즘이 싫다는 젊은 누이께' 같은 글에서 드러나는 정서다. "뭇 남성들이 떠받드는 젊은 여성"은 "여성차별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부분을 읽으며 착잡했다. 젊은 시기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뭇 남성들이 떠받드는" 문제를 결코 행복하게 여기지 않는다. 섹슈얼리티 문제에 집중하는 "젊은 여성"들은, 그들의 '젊은' 섹슈얼리티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양상을 밀접하게 느낀다.

'페미니스트는 못생겼다', '사랑받지 못해서 이러는 것이다'는 주장과 이 문장을 함께 언급하면 이 글을 쓴 사람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는 여성이 '성적 대상'으로서 가장 높게 '평가'되는 시기가 지나가면 다른 종류의 억압이 실질적 문제로 다가온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장 속에는 페미니즘적인 주장 뒤에도 숨을 수 있을 만큼 "사랑받지 못해서"의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사실도 들어 있었다.

1960년대 초, 여성 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플레이보이 클럽에 위장취업해서 폭로기사를 썼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플레이보이 바니걸들이 받는 정당하지 못한 보수, 노동 착취, 매춘 강요에 대해서만 놀란 것은 아니었다. 페미니스트가 '바니걸'로 취직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사람들은 왈가왈부했다.

"페미니스트가 미인일 수 있다니."

물론 그 사건이 있었다고 해서 페미니스트가 '못생겼다'는 사람들의 편견이 사라진 건 아니다. 플레이보이지는 오히려 스타이넘의 사진을 잡지에 넣어서 바니걸로 취업하라고 광고를 해댔다. 그러나 그녀가 '페미니스트의 외모'에 대한 대중적 인식에 낸 균열은 그 이후에도 계속 중요한 문제로 남았다. 지금도 저런 영상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편견으로 된 안경을 확고하게 장착하고 세상을 본다면 저 주장이 틀릴 확률이 실제로 낮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확증편향이라는 것은 이런 사안에서는 아주 광범위하게 작동할 수 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형화된 외모'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그다지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확증편향을 공고히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자신이 내키는대로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체중 문제에 연연하지 않는 여성들이라면 저 바운더리에 속할 확률이 어느 정도는 높아진다.

이 여성들에게 '못생겼다'는 놀림은 별다른 상처를 주지 못한다. 당연히 그 기준이 그들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이 일정한 방식으로 아름다워야만 한다는 당위는 이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 힘도 없다. '못생겼다'는 것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놀림거리로 삼는 사람들에게 분노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페미니스트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움 그 자체보다는 누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느냐의 문제다. 미감은 주관적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실제로 미감을 느끼는 시선은 그 존재가 어떻게 '통제되고 있는지'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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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생머리를 하고 있으면 페미니스트가 아닌가요? ⓒ pixabay


'전형적 페미니스트 생김새'를 규정하는 속내

겨드랑이털을 제모하라고 압력하는 사회 속에서 겨드랑이털을 염색하는 것은 '아름다움'으로 해석되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이 여성들은 세상에 혼란을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분명 미를 추구하는 행동인데, 규범을 탈주해버리니 규범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쾌감을 줄 수밖에 없다. '자연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화려한 색깔의 머리카락, 피어싱, 타투는 모두 가부장 이데올로기 내에서 예측 가능한 범주에 있지 않다. 통제되지 않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데에서 이들은 위험을 느낀다.

그렇기에 '전형적 페미니스트 생김새'를 정해놓는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이 외모규범의 탈주를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런 건 '페미니스트들'이나 하는 것이고, 내 주변의 평범한 '긴 생머리' 여성들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이를테면 이런 언어들의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넌 페미니스트 같이 안 생겼는데 대체 왜 그래?"
"난 네가 벗고 다녀서 그런 소린 안 할 줄 알았는데..."

슬프게도 내가 실제로 들어본 이야기다. 여성을 외모로 파악하는 일은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여성도, 어김없이 외모의 굴레 속으로 돌아오곤 한다. 저렇게 생겼으니까 공부라도 잘해야지, 같은 말이 드러내듯이.

그렇다고 아름다운 여성이 뛰어난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자들은 얼굴만 반반하면 살기 편하다는 분노를 토하는 남성들의 맥락에서, 끊임없이 여성들은 외모로 회귀한다. 뛰어나면서도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이상향에서 여성들 자신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이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성은 아름다운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의 이미지가 성적 대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위에서 이야기한 '외모규범의 탈주를 감행하는 여성들'에게도 열외가 되지 않는다. 인터넷 댓글들에서 끊임없이 호출되는 '메갈년'에 대한 분노는 언제나 성적 대상으로서의 회귀, 외모에 대한 평가로 반복된다. 그 여성이 어떤 외모와 어떤 차림을 하고 있건 무관하다.

여성의 중요한 가치를 외모로 한정짓고 나면, 결국 여성들은 이 남성들의 쾌락을 만족시키는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스스로 추구한 자신의 외모가, 타인의 쾌락을 위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우울감은 깊다. 심지어는 스스로의 선택을 믿지 못하게 한다. 아름답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든 것이, 자신을 옭아맨다는 생각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욕망당하는 몸'의 규칙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절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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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코르셋처럼 여성의 몸을 규율하러 든다 ⓒ pixabay


페미니스트는 단일화될 수 없다

하지만 욕망당하는 몸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규범과 통제를 의도적으로 무시할 권리가 있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분출할 수 있다. 마주하고 있는 세상에는 부당한 규범들이 존재하지만, 그 규범에 재단되는 몸들은 일괄되게 재단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새빨간 쇼트커트를 한 페미니스트들이 단일화될 수 없는 것처럼, 긴 생머리를 한 페미니스트들도 단일화될 수 없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체현하고 있는 사람들은 외모 같은 규범으로 묶일 수 없다.

때때로 '여성의 외모가 어때야 하는지'를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이 사회의 여성들이 진정으로 아름다울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규범은 끊임없이 여성들을 쫓아다니고, 여성들의 몸을 획일적 기준을 통해 여러 조각으로 뜯어놓는다. 하지만 언젠가 여성들을 해체하던 이 규범이 해체된다면, 그때는 정말로 아름다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페미니스트들은 힘이 세고, 무기력하고, 우아하고, 활달하고, 소심하고, 우울하고, 목소리가 크고, 수줍어하고, 잘 울고, 무표정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그들은 모두 같지가 않다.

몇 년 전 여성의 날에 있었던 캠페인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캠페인에 참여한 사람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여성이었다. 캠페인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여성비정규직축소'라는 피켓을 들고, 상징적 의미로 여성과 남성이 공동으로 육아를 하는 펭귄 탈을 썼다. 캠페인이 끝나고 이 펭귄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는데, 담배를 피우느라 펭귄 탈을 벗자, 짧은 쇼트커트, 긴 생머리, 탈색머리, 양 갈래까지 아주 다양한 스타일과 다양한 외모가 드러났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나는 쇼트커트에 탈색은 잠시 미루기로 했다. 지금은 내 긴 머리가 마음에 드니까. 언젠가 내가 하고 싶어지면, 그때 탈색을 할 생각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전형적 페미니스트'의 외모가 어떻건 상관없이.

예전에 DOZ라는 힙합 그룹이 '긴 생머리의 처음 봤던 그녀 모습'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던 적이 있다.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단발머리 여자였고, 대체 이 사회에서 긴 생머리란 어떻게 소비되는 것일까에 대해 생각했었다. 혹시 당신이 '페미니스트'의 스타일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재단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보다 조금 더 쫄아도 좋다. '긴 생머리의 페미니스트인 그녀 모습'이 생각하는 것보다 가까이 있을 테니까.
#페미니스트 #페미니즘 #여성의날 #글로리아스타이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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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을 씁니다.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혹은 그 역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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