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성 사이' 독일인들의 트라우마

[중년 부부 유럽 여행기 2] 루터의 종교 개혁과 독일인의 콤플렉스, 일본인은 왜 다른가?

등록 2017.03.08 13:17수정 2017.03.14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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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중년의 부부가 유럽 다녀온 여행 이야기입니다. 독일, 이태리, 프랑스를 두 달 동안 자동차와 기차 그리고 버스로 자유롭게 다녔는데요. 맛과 명소를 탐방하는 관광과는 조금 다른 여행 얘기를 담고 싶습니다.

안전망 없이 어쩌다 길 위에 있게 된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과는 다른 여러 가지 체험을 하게 되지요. 전혀 예상치 못한 우연한 사건을 겪거나 특별한 유대 관계를 맺곤 하는데요. 


길 위에선 수없이 많은 직관적 판단을 하게 되더군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고 때로는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기도 했습니다. 돌아서 보면 과거의 또 다른 경험을 떠올리며 편견을 극복하고 서로 다른 문화적 차이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 그리고 관대한  견해를 얻는 과정을 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정말 우리가 부러워할 만큼  매력적이고 행복한 곳인가를 얘기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이 꿈꾸고 고민하는 문제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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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 프라우엔 교회 앞의 마틴 루터 동상 앞에서 루터파 개신교회로 1726-1734에 건축됨. 마틴 루터는 1483년 작센 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했고, 드레스덴에서 종교 개혁이 시작된 비텐베르크까진 차로 2시간 남짓한 거리이다. 작센주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3세가 종교 개혁 당시 루터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 김성수


독일인의 첫 인상이 아주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남녀 모두, 특히 여자들의 키가 대단히 크고 체격이 좋았는데 표정은 재미없어 보였다.

뮌센으로 오는 비행기 안의 루프트 한자 독일인 승무원은 동료 한국인 승무원에 비해 친절함이 살짝 어색해 보였다. 뮌센 공항 보안 검색대의 한 덩치 하는 여직원들은 약간 위압적으로까지 느껴졌다. 출발 지연에 대해 문의했을 때 그라운드 스태프는 적당히 사무적인 표정으로 응대했다. 뮌센의 호텔 돌체 직원은 친절했지만, 3월 일본 유후인 여행 때 본 료칸 스태프의 간드러지는 듯한 음성으로 대하는 깍듯한 말투와는 조금 달랐다.

뮌센에서 드레스덴으로 오갔던 비행기 안에서 본 독일 승객들 표정도 비슷했다. 비상 상황에서도 차분하고 조용히 지켜보며 절대로 호들갑스럽지 않았다.


독일 중동부 드레스덴은 차로 한 시간 거리인 캠니츠로 가는 길에 잠시 들렀던 곳이다. 5월 말의 드레스덴은 스산하고 약간 춥게 느껴졌다. 비가 많이 오고 기압이 낮아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웬지 쓸쓸해 보이는 독일인의 분위기와 같았다.

나중에 다수의 독일인과 만나고 대화했다. 뮌센에 거주하며 지멘스에서 일한 50대의 갸드, 한국계 2세인 대학생 다비드와 고등학생 다니엘, 30대 초반의 남자 간호사 알렉스, 동독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 체험하며 동독 붕괴의 실상을 생생하게 알려준 60대의 이삭, 사회 복지사 공무원으로 일하는 30대 후반의 세바스찬, 폭스바겐에서 딜러 견습생으로 일하는 20대 초반의 라인홀드, 루터교 목사의 아내인 라인홀드의 어머니 등.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그들 특유의 진지함은 신뢰감을 주지만, 대부분 평상시에 자유롭게 마음을 표현하는데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가슴 속 어딘가에 감정의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왜 이성과 감성 사이 어딘가에서 고뇌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로마 교황청의 젖소'인 독일, 극심했던 경제적 착취

중세 말인 16세기 독일은 '로마 교황청의 젖소'라고 불리었다. 당시 통일 국가를 이뤄낸 영국, 프랑스는 로마 교황청의 정치, 경제적 압박에 대항했다. 하지만, 제후들이 통치하는 수백 개 연방으로 분리된 나라였던 독일은 사실상 로마 교황청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연방 제후들, 도시의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자신들의 몫을 상실했고, 농민들은 과다한 소작료와 세금으로 피폐한 삶을 살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경제적 착취는 왕권이 확립되지 못한 독일에 집중된 면죄부 판매로 극대화되었다.

이에, 1517년 10월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루터가 면죄부 판매에 대한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의 궁정교회(Schlosskirche) 정문에 게시하면서 종교 개혁은 시작되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독일의 민족주의 컴플렉스를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인간의 탐욕으로 부패한 절대적인 권위에 저항하는 사회 개혁운동이자, 오직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그리스도 본래의 정신을 회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지적인 자유 의지를 구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인의 민족주의 콤플렉스는 루터에 의해 유대인 박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마틴 루터도 처음에는 유대인을 옹호했다. 그가 가톨릭을 공격했던 내용 중의 하나가 가톨릭이 유대인들을 너무 무자비하게 취급했다는 점이었다. 루터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유대인들을 박해한 일을 강렬한 어조로 비난하면서 유대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예수의 사랑이요, 초대 교회 교부들이 권했던 친절과 관심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유대인들은 루터의 말에 큰 기대를 걸고 그를 환영했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관망했다. 그 뒤 루터는 교황의 박해를 피해 피신을 하는 동안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를 통해 근대 독일어의 근간이 정리되었다. 이 번역 <성경>은 인쇄술의 발전 덕에 각지로 전파될 수 있었으며 루터의 의견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덕분으로 가톨릭 평신도들은 금서였던 <성경>을 처음 접할 수 있었다.

루터는 교황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유대인에게 도움을 구했다. 1523년에 쓴 <예수 그리스도는 나면서부터 유대인>이라는 소책자에서, 루터는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하면서, 유대인이 자발적으로 집단 개종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루터가 번역한 <성경>보다 <탈무드> 쪽이 훌륭한 <성경> 해석을 해 놓았다면서 유대인들은 개종의 손짓을 거부했다.

이때부터 루터는 유대인들을 거세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어 간행된 <유대인과 그 허위에 대해>라는 소책자는 홀로코스트를 향한 거대한 첫 발작이라 할 만했다. "먼저, 유대인의 시나고그에 불을 지르고, 타고 남은 것들은 몽땅 뻘 속에 파묻은 다음, 그 초석이나 불탄 재가 사람 눈에 뜨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유대인에 대해 과격한 독설을 퍼부었다. 루터는 이렇게 말로 공격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영향력이 커진 그는 1537년 작센에서 시작해 1540년에는 독일 거리 곳곳에서 유대인을 내쫒았다.

유대인 이야기 (홍익희 지음) p 352~35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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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엔 교회 내부 2차 대전때 폭격으로 완전히 무너진 건물을, 드레스덴 시민들이 돌들을 모아 번호를 매겨 보관하고 있다가 1994-2005 에 재건함 ⓒ 김성수


1871년 비스마르크가 최초의 독일 통일국가를 세우다

19세기 초반까지 독일은 수백 개 연방으로 나뉘어져 있어 통일 국가의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유럽의 주도권을 지닌 국가가 아니었다. 1871년 비스마르크가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우면서 형성된 독일의 국가주의는 심화되어 결국 나치 시대의 극단적인 민족 우월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나치 정권은 기본적으로 선거에 의해 독일 국민이 선택한 정권이고 독일 국민은 나치가 가져다 준 경제적 풍요를 마음껏 누렸다. 한편으로 나치는 언론을 장악하고 감시와 통제로 국민의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를 탄압했다.

'1935~1937년 사이에 나치가 훌륭한 업적을 달성한 시대'(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무시되는 사실이기도 하지만)가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 기간 동안 히틀러는 아무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던 두 가지 목표를 이루었다.

600만 명에 달했던 실업자들이 1937년을 기준으로 모두 일을 하고 있었고, 독일은 다시 세계의 주목을 받는 강대국이 되었다. 거대한 인프라 건설로 항구와 도로를 재정비함으로써 새로운 직업들이 생겨났고, 이로 인해 수백만 명의 노동자 가족이 돈을 벌 수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이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호사를 가져다 주었다. 모든 가정에서 가정용 라디오를 보유했고, 최초의 폭스바겐 자동차가 공장을 떠났다. 1936년에 있었던 올림픽 기간 동안, 제국 우체국은 세계 최초로 텔레비전 생중계를 시도했다. 나치 조직인 '즐거움을 통한 힘'이 저렴한 단체 관광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공장 노동자도 뮌센으로의 주말 여행이나 가르다 호수로의 기차 여행, 마테이라 섬을 왕복하는 크루즈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미래에 대한 신뢰도를 나타내는 가장 믿을 만한 매개 변수인 출산율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지 1년 만에 거의 25% 가량 증가했다.

1933년에 열린 선거에서 자유당, 사회민주당, 기독교 연합, 공산당을 지지했던 수많은 사람이 193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심지어 강제 수용소마저 특정 측면에서 많은 독일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요소가 되었다. 예컨대 '반사회적인 인물'이나 '기생충 같은 사람', '범죄자', '건달', '외국인 부류' 등이 마침내 길거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수많은 신문 기사, 팸플릿, 공개 간담회, 영화를 통해 '인종적 순수성의 회복'이 강조되었다. 1939년 여름에 접어들면서 심신장애자 안락사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전국적으로 6곳에 가스 살포를 위한 시설이 들어섰다. 7만 여명의 정신 질환자 중에서 다섯 명중에 한 명 꼴로 죽임을 당해야 했다.

유럽사 산책 1 (헤이르트 마크 지음, 강주헌 옮김) p 439~44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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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 츠빙거 궁전 관광객이 많아 비교적 활기차 보인다. 아우구스투스 2세가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하여 짓게 한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1719년 준공됨. ⓒ 김성수


나치의 극단적인 행동은 경제적 풍요에 흠뻑 취하면서 감시와 통제에 길들여진 독일 국민을 무감각한 마비 의식에 빠지게 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저에 깔린 게르만 민족주의 콤플렉스가 나치 정권의 타민족 지배와 홀로 코스트에 한몫했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고통을 당한 자는 트라우마에 시달리지만, 독일 국민 또한 마음의 기저에는 벗어나기 힘든 죄의식이 있다. 소원해지면 더 잘 보이기 마련이다. 벗어나서 보면 세월이 지날수록, 잊혀지기보단 지우기 힘든 또 다른 콤플렉스가 된다.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듯한 독일인의 진지한 모습엔 이런 여러 가지 콤플렉스가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해 고민하고 사색하는 철학이기도 하다. 종교 개혁은 한편으론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말하는 중세 철학적 신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끊임없이 과거의 잘못을 되뇌이고 반성하는 데는 이런 복잡한 역사적 배경과 속내가 숨어 있다.

메이지 유신 시대에 탈아 입구(脱亜入欧)를 외치며 서양을 미치도록 닮고 싶어 했던 일본. 그래서, 외면적으로 독일과 흡사한 면이 있는 일본은 어떻게 다른가?

일본인은 근본적으로 욕망의 만족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청교도적이지 않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육체와 정신이라는 두 개의 힘이, 각자의 생활에서 패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서구의 철학을 근저에서 뒤엎는다. 일본인의 철학에서 육(肉)은 악이 아니다. 가능한 육의 쾌락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정신과 육체는 우주의 대립하는 2대 세력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인은 이 신조를 논리적으로 밀고 나가, 세계는 선과 악의 싸움터가 아니라는 결론으로까지 가져간다. 조지 센섬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인은 그 역사의 어느 시대에서나, 이와 같은 악의 문제를 인식하는 능력이 결여되거나, 혹은 그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을 회피하는 태도를 어떤 정도로든 유지해온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일본인은 악의 문제를 인생관으로 승인하는 것을 시종 거부해 왔다. 그들은 인간에게 두 가지 영혼이 있다고 믿는데, 그것은 서로 싸우는 선의 충동과 악의 충동이 아니다. 그것은 '온화한' 영혼(니키타마)과 '거친' 영혼(아라타마)으로, 그들은 모든 인간의 생애에는 온화해야 할 경우와 거칠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 믿는다. 한쪽의 영혼이 지옥으로, 다른 한쪽이 천국으로 간다고 정해져 있지 않다. 이 두 개의 영혼은 모두. 저마다 다른 경우에 필요하며 선이 된다.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 오인석 옮김) p 191. p 203~204 참조

이렇게 일본인은 전통적으로 본능의 세계에 충실하다 보니 도덕과 윤리적 규제가 약할 뿐만 아니라 철학적 물음에 근거해서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는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민중 혁명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제대로 쟁취한 역사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전쟁 범죄에 대해 철저히 냉담한 이유는 독일인이 지닌 기독교 정신에 근거한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혁명과 고뇌의 역사가 없기 때문이지는 않을까?

#마틴 루터 #종교 혁명 #드레스덴 #비텐베르크 #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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