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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신 찍을 때 정말 찔렀나? 부끄러운 줄 알아라"

[현장] 배우 김꽃비와 여성단체들 '그건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 기자회견

17.03.08 19:02최종업데이트17.03.09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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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해 서초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여러 여성 단체들이 모여 '이건 영화가 아니라 성폭력입니다'는 이름의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들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촬영 도중 성폭력을 저지른 남자 배우 A씨의 1심 '무죄' 판결을 비판하고 영화계 내부에 만연한 성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 유지영


어떤 여자 배우가 있었다. 그는 마침 15세 관람가의 로맨스 영화에 배우로 캐스팅이 돼 촬영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이날 예정돼 있던 신은 '가정폭력' 장면. 협의하고 촬영에 들어간 그는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성폭력을 마주했다. 카메라가 켜지자 그와 신을 같이 찍던 남자 배우는 여배우를 폭행했고 옷을 찢고 가슴을 만지거나 바지 안에 손을 넣는 등의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했다. 그 과정에서 카메라 앵글 밖 여자 배우의 신체에까지 남자 배우의 손이 닿았다.

"당초 시나리오와 콘티에는 바지를 찢기로 되어 있었지만, 감독은 현장에서 바지를 상의로 변경했다." - 이예지 기자, <씨네21>, [포커스] #STOP_영화계_내_성폭력(1월 19일)

감독은 현장에서 남자 배우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주문했다.

이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어떨까. 1심 재판부의 판결은 '무죄'였다. 남자 배우가 "감독의 지시대로 '연기'를 했"고 여배우가 "억울한 마음에 상황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재판부 판결에 저항한다는 의미로 8일 오전에 열린 제33회 한국여성대회 시상식에서 '성폭력'을 '연기'라고 판단하고 '무죄' 판결을 내린 인천지법 부천지원 제1형사부에 '성 평등 걸림돌' 상을 주었다.

여성 영화인들이 영화계 내부 자정작용 주도해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단체들은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그건,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입니다'는 이름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을 비롯해 배우 김꽃비씨가 소속된 페미니스트 영화인 모임 '찍는페미'가 공동 주최한 이번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연기'나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이제는 끊어내야 한다"고 외쳤다. 원래 8일 남자 배우의 2심 재판이 고등법원 앞에서 예정돼 있었으나 배우 측 요청에 따라 29일로 미뤄졌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여성문화예술연합 신희주 감독은 "1심 판결문을 읽고 크게 분노했다"며 "합의되지 않은 추행을 업무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피해자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어렵다"고 말했다. 또 신 감독은 "단 한 번도 영화를 그렇게 찍은 적이 없다. 매 순간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고 작은 행동조차 논의해 허락을 구하고 촬영을 진행한다"며 "(남성 배우에게) 다른 남배우를 상대로 폭행 신을 찍을 때 말도 없이 주먹을 휘두른 적이 있나. 살인 신을 찍을 때 정말 사람을 찔렀나. 부끄러운 줄 알라"고 외쳤다.

8일 오전 서초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여러 여성 단체들이 모여 '그건 연기가 아닌 성폭력입니다'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중 '찍는페미'의 배우 김꽃비씨가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찍는페미'는 페미니스트 영화인 모임으로 여성 영화인들이 연대하고 페미니즘적 영화 현장을 위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단체다. ⓒ 유지영


지난 2016년 10월부터 번진 트위터상의 해시태그 운동 #영화계_내_성폭력 이후 페미니스트 영화인 모임 '찍는 페미'를 제안한 배우 김꽃비씨도 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영화계 내부의 협회나 기관 등이 성폭력 근절을 위해 나설 것과 영화 현장에서 성희롱 예방 교육 시행,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징계를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이날 현장에서는 8년 전인 2009년 3월 7일 자신이 성 상납을 한 리스트를 적고 유명을 달리한 배우 장자연씨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여성단체들은 "장자연씨가 사망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 이 시점에서 아직도 영화계 내부의 여성에 대한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영화계 내에서 '연기' 또는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끊어내야 한다. 이는 연기가 아닌 성폭력"이라고 외쳤다.

다른 영화 현장은 가능하다

'연기'라는 이름 아래 여자 배우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여자 배우의 동의 없이 감독과 남자 배우가 공모해 갑작스럽게 키스를 하는 장면을 연출(<한여름의 판타지아>)하거나 '배우'가 아니라 "'여성'으로서 수치심을 느끼길 원한다"면서 합의되지 않은 강간 장면(<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을 예술로 둔갑시켰다는 지적이 잇달았다. 또 영화 촬영 현장에서 배우가 아닌 여성 스태프들에게도 일상적으로 성폭력이 노출되고 있다.

여성 영화인들은 자신이 영화 현장에서 겪은 성폭력 경험을 고백하는 행동으로 업계 내부에서 쉬쉬하던 관행을 정면으로 깨트렸다. 이런 흐름은 2016년 10월부터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과 더불어 진행됐다. 익명으로 또는 본인의 이름을 걸고 여성 영화인들은 본인의 성폭력 경험을 '떠들기' 시작했다. 영화 주간지 씨네21은 자사에서 활동하던 평론가도 성폭력을 하고 있다는 걸 발견, 대내외적으로 이를 알리고 영화계 내 여성들의 목소리를 모으는 연속 대담을 열어 대안을 모색했다. 한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은 '성희롱 예방 교육'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여성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영화 현장을 다시 재편해보려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배우 김꽃비씨가 제안해 만들어진 '찍는 페미' 같은 페미니스트 영화인 모임은 좋은 예시다. 이들은 영화 현장에서부터 폭력과 여성 차별을 해결하는 활동을 한다. '성희롱 예방교육' 자료를 공유하거나 '관행'적으로 계약서 없이 촬영이 진행되는 영화 현장에서 스태프나 배우 구인/구직 시 정확한 페이를 명시하는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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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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