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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공포증' 내가 2700미터 등산 계획하다니...

칠레 토레스 델파이네 국립공원 하이킹 생존기

등록 2017.03.19 11:22수정 2017.03.19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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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1

토레스 델 파이네 칠레노 산장으로 가는 협곡 ⓒ 조수희


2월 23일, 생리를 시작해버렸다. 2월 24일부터 3박 4일의 80km 등산을 앞두고 터진 일이다. 동네 뒷산도 아니고 북한산 높이의 3배 이상인 2천 7백 미터 급의,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 하이킹을 계획했으니 난감했다.

빙하, 암벽, 협곡, 호수, 강, 폭포 등의 거대한 자연을 근육은 부족하고 지방만 넘쳐나는 두 다리로 걸어야 하건만, 자궁은 그런 사정 따위 봐주지 않았다. 평소보다 몸이 약하고 아랫배가 아플 게 분명했다. 부랴부랴 배낭에 생리대 한 팩을 넣었다.

토레스 델파이네 국립공원 W 하이킹 트랙의 정상은 '토레스 델 파이네'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우리 말로 3개의 푸른 봉우리다. 봉우리 이름이 국립공원의 이름이 됐다. 등산객들은 보통 토레스 델 파이네 정상에 일출을 보러 간다.

정상 봉우리에 비치는 붉은 아침 햇살이 장관이기 때문이다. 5시간 이상 등산해 본 적 없고 북한산 족두리봉도 겨우 올라가는 고소공포증 환자에 생리까지 하지만, 지구 반대편 남미까지 왔으니 정상에 도전하고 싶었다.

# D-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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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 조수희


국립공원 입구까지 오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산들이 보였다. 산 정상은 순백의 만년설과 빙하로 덮였고, 중턱에는 구름이 드리웠다. 산 아래에는 빙하수로 된 강이 흘렀다. 아름답다고 생각할 틈도 없이 승모근이 쭈뼛 서고, 손에 식은땀이 가득 찼다. 괜한 기분일까, 생리 탓일까. 아랫배까지 시큰거렸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망했다. 나 정말 괜찮을까."  

정상을 가겠다는 결심이 국립공원 입구에서부터 흔들렸다. 다른 이들의 가벼운 배낭과 내 10kg 배낭이 비교됐다. 국립공원 초입에서 만난 한국 대학생, 한솔이의 가방은 작은 크로스백이 전부였다. 한솔이의 가방에는 빵 한 봉지, 삶은 계란 3개, 핸드폰, 초경량 침낭, 물병, 간단한 세면도구만 들어있었다.

한솔이는 3박 4일 중 2박을 산장의 3-4만 원짜리 식사를 예약했고, 나는 모든 식사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4일 치 식료품을 짊어졌다고는 해도 내 가방은 너무 무거웠다. 라면, 견과류 같은 건조식품 대신 양파, 오이, 버섯, 아보카도, 토마토같이 수분이 든 식품을 챙긴 탓이었다.

첫날은 10kg 배낭의 여파가 적었다. 국립공원 초입 파이네 그란데 산장에 가방을 내려놓은 후, 그레이 빙하를 보고 다시 파이네 그란데 산장으로 돌아오는 왕복 22km, 7시간 코스였다. 복병은 대여한 등산화였다.

가게에서 빌릴 때 약간 꽉 끼는 듯 했지만, 그때는 대수롭지 안게 여긴 게 문제였다. 오르막길을 가는 내내 엄지발톱이 쪼개지는 듯 했다. 실수로 돌부리라도 한번 차면 신음이 절로 나왔다.

고통을 견뎌내고 올라가 본 그레이 빙하 앞에서 외마디 환호성을 질렀다. 만년설이 가득한 고봉이 옥빛 호수를 둘러싸고, 거대한 호수의 끄트머리에 빙하가 절벽처럼 서 있었다. 상상하던 영롱한 푸른 빙하 대신 자갈과 흙이 섞인 검푸른 빙하였지만 그조차 신비로웠다. 

발톱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은 하산하며 다시 시작됐지만, 아직은 첫날이었기에 견딜만 했고 경치 감상할 여유가 있었다.

# Day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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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등산화가 발톱을 압박했다. 목적지까진 너무 멀었다. ⓒ pixabay


전날 묵었던 파이네 그란데 산장에서 다음 목적지인 프란세스코 산장까지는 지도상 10.6km, 4시간 코스였다. 둘째 날에는 10kg 배낭을 메야 했고 작은 등산화는 발톱을 압박했지만, 지도에 4시간 코스라고 나와있으니 금세 도착할 듯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파이네 그란데 산장에서 중간 지점인 이탈리아노 산장까지 4시간이 걸렸다. 목적지인 프란세스코 산장까지 아직 반이나 남았다. 경치 감상하느라 느긋이 걸은 것도 아니었지만, 자꾸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따라 잡혔다. 길 따라 펼쳐진 빙하도, 호수도, 폭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발 아파 죽겠네, 이놈의 가방안에 든 식량 빨리 먹어버리자'는 두 가지 생각만 가득했다. 이따금 자궁에서 생리혈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아래 배까지 찌릿했다. 날씨까지 험했다.

30분 동안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 입김이 나오고 폭우가 쏟아지더니, 가방에 건 침낭까지 날려버린 강풍이 불었다. 몇 분 후,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 사이로 여름 햇살이 빛났다.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는 하루 안에 사계절을 다 겪는다더니, 30분 만에 그 말을 확인했다.      

둘째 날 최종 목적지인 프란세스코 산장까지 8시간이 걸렸다. 지도상 4시간이라고 했던 길이었다. 객관적인 정보를 맹신한 게 문제였다. 사람마다 제각기 길이 다르고, 상황이 다른 법이다. 산행 경험이 많고 짐이 적은 성인 남성에게는 지도상의 시간도 넉넉하겠지만, 겁도 짐도 많은 그러나 체력은 없는 내게 국립공원 센터의 객관적 정보는 누군가의 주관적 정보일 뿐이었다.

# Day-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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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 조수희


밤새 잠을 못 이루고 산장의 매트리스에 긴장한 채 누워만 있었다. 지도에 따르면 오늘 걸어야 할 거리는 19km, 8시간 반이었다. 그건 지도상 정보일 뿐, 내가 직접 걸으면 얼마나 걸릴까. 둘째 날 묵었던 프란세스코 산장에서 다음 목적지 칠레노 산장까지 10시간 안에는 도착해야 저녁을 먹고 쉴 시간이 생겼다. 어제처럼 걸었다간 토레스 델 파이네의 광활한 숲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지도 몰랐다. 밤새 잠도 못 자고 내일 걸어야 할 길만 떠올렸다.

동이 트는 아침 7시에 길을 나섰다. 셋째 날 숙소인 칠레노 산장으로 가려면 수십 개의 암벽, 자갈 투성이에 절벽이 있는 협곡을 넘어야 했다. 경치를 구경하겠다고 고개를 돌리면 발에서 10cm 떨어진 아찔한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절벽 밑에는 빙하수가 흐르는 강이 있었다. 고소 공포증 때문에 등산 스틱을 잡은 손에 땀이 차 자꾸만 등산 스틱을 절벽 밑으로 떨어뜨릴 뻔했다. 토레스 델 파이네 하이킹은 정상 정복이 목표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로 바뀌어 버렸다.

앞으로 이어질 여행 걱정 따위를 하면 집중력이 흐려져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지고 발을 헛짚었다. 신기하게도 '살아남아서 엄마한테 잘 다녀왔다고 말하자'는 문장 하나만 떠올리면 걸음이 빨라졌다. 퉁퉁 부은 다리와 발은 신경이 마비된 채 움직이는 듯 얼얼했다.

4시간 반쯤 걸으니 정오였다. 간식을 먹으러 낭떠러지가 바로 앞에 보이는 암벽 위에 앉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달리 다른 장소가 없었다. 시선은 최대한 짧게 둬서 고소 공포증을 줄였다. 마침 옆에 앉은 아르헨티나 커플이 GPS 지도를 보고 있었다.

"실례지만 저 여기가 어디쯤이에요? 칠레노 산장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칠레노 산장까지 거의 다 왔어요. GPS로 보면 2시간 거리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암벽 위에 엉덩이를 털썩 깔고 앉아 10분쯤 눈물에 콧물까지 흘리며 대성통곡을 했다. 어제보다, 지도상의 시간보다 훨씬 빨리 걸었다. 숲속에서 자야 할지 모른다는 공포는 사라지고 어젯밤부터 나를 옥죄던 근육의 긴장감이 조금 사라졌다.

# Day-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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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 조수희


산행 셋째날부터 목표를 '생존'으로 수정했기에, 정상 등반은 생각도 안 했다. 대신, 칠레노 산장에 올 때 거쳤던 아찔한 협곡을 다시 거슬러가야만 국립공원의 출구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안 후 또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칠레노 산장에서 국립공원 출구까지 지도상 2시간. 내 걸음으로 최소 3시간은 걸릴 것 같았다. 엄지손톱만 한 작고 얇은 자갈이 내리막 길에 깔려 있어 자꾸 미끄러졌다. 등산 스틱으로 자갈 사이 맨땅을 쿡쿡 찍어가며 부들거리는 종아리를 겨우 움직였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낭떠러지 산을 다 내려와 평지에 도착하니 그때야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탁 트인 평지 뒤 거대한 토레스 델 파이네의 만년설과 빙하는 첫날이나 마지막 날이나 순백색으로 빛났다. 뒤를 돌아보며 3박 4일간 나를 울고 웃게 한 거대한 산에 고마웠다고, 다시는 보지 말자고 인사했다.

고소공포증 환자, 1박 이상 등산경험 전무, 10kg 배낭, 생리. 이 험난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세계 일주 하는 동안 딱 한 번만이라도 비경을 즐기고 싶어 도전했다. 경치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았지만, 나에게 맞는 경험은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 국립공원에서 준 지도는 타인의 '길'이었지 내게 맞는 '길'은 아니었다. 3박 4일이 아니라 더 천천히 걷고 자주 쉬어도 괜찮은 4박 5일이였으면 어땠을까. 나만의 조건에서 나만의 길로 토레스 델 파이네를 걸었더라면, 토레스 델파이네를 진정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첨부파일 DSC0738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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