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죽음은 어느 누군가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방법 ⑨]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과 사망, 불가피한 일이라고?

등록 2017.03.15 09:44수정 2017.03.20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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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이 죽고, 17명이 중상을 입었던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가 지난 2월 11일로 10년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보호소 시설은 변한 게 없고, 이주노동자들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 사회의 시선 역시 변한 게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주노동자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그간 가까이서 지켜봤던 피해자들 이야기를 정리하고자 한다. 국내에서 사망한 이주노동자들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다. - 기자 말

2016년도 세계은행 '이주와 송금 팩트북'에 의하면 2014년 말 기준으로 인도네시아는 410만 명의 해외이주노동자로부터 연간 10.5억 달러(1724억 원)의 외환을 송금받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구직 기회가 많지 않은 시골 소도시 청년들은 실업과 저임금을 피해 이주노동이라는 기회를 잡으려고 안달이다. 전국 400여 개의 해외인력송출업체가 그들을 낚아채는 건 일도 아니다.

인도네시아 서부 자바 인드라마유와 중부 자바의 찌레본, 끈달, 스마랑까지 자바해를 접하는 지역들은 해외 이주노동자가 많기로 유명하다. 도시 곳곳에서 해외송출업체 지역사무소를 볼 수 있고, 이주노동 경험자들을 만나는 일은 한국에서 군 제대자를 만나는 것처럼 흔한 일이다. 그곳에서 이주노동자들은 흔히 '외환 영웅(Pahlawan Devisa)'이라고 불린다.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고, 집도 장만하고, 사업기반을 닦고 귀국한 외환 영웅들은 나름대로 유지역할을 하며 지역사회에 정착한다. 그러나 정착하지 못하고 또다시 해외이주노동을 떠나거나 이주노동을 떠날 이들을 모집하는 스폰서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 결과 해외이주노동 벨트를 구축하고 있는 자바해 연안 도시들은 이주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곳에서 이주노동은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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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달 입구 해외 이주노동자가 많은 끈달 입구-환영 푯말 ⓒ 고기복


끈달(Kendal)은 중부 자바 주도인 스마랑과 인접하고 있는 도시다. 끈달 군 소재지에서 승용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쯔삐링(Cepiring)은 '한 집 건너 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주노동자가 많은 마을이다. 부드러움 속에 강인함을 자랑하는 전통무술 펜칵 실랏(Pencat Silat)에서 유래한 춤과 노래를 흔히 볼 수 있고, 접시에마저 재스민 향이 묻어난다 할 정도로 여유롭고 활력 넘치는 땅이다.

그곳에 담배 농사와 소 장사를 하며 열두 남매를 키운 어르신이 있다. 독실한 무슬림으로 세 명의 부인을 둔 무함마드 푸아드가 그 주인공이다. 열두 남매 중 위로부터 넷을 해외 이주노동을 떠나보냈던 그는 남들과 달리 이주노동을 떠나지 못해 안달인 젊은 사람들이 영 못마땅하다. 어린 자식들이 부모 품을 떠나는 거야 당연한 거지만, 해외에까지 가서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답답함을 토해낼 길이 없다고 한다.

2006년 4월 26일, 무함마드는 그렇게 못마땅하게 여기던 해외 이주노동을 떠난 아들이 돌아왔지만, 그 아들을 반갑게 안을 수 없었다. 소 장사를 떠날 때면 마을 밖까지 소몰이를 돕던 싹싹하기 그지없던 아들, 누르 푸아드(Nur Fuad)는 일주일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싸늘한 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출입국 단속 피하다 사망한 이주노동자

2006년 4월 18일, 부천시 도당동에 있는 한 중소기업 3층 기숙사에 인천 출입국관리사무소 소속 단속반원 12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공장 옆 건물에 있던 주택 옥상을 통해 기숙사 3층으로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출입국 직원들은 공장주 허락을 받지 않았다. 출입국이 미등록 외국인을 단속하고자 할 때는 보호명령서를 소지하고 건물주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규정은 단속 실적을 올리려는 출입국 직원들에게는 사문화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할 방법으로 기숙사에 진입한 출입국 직원들은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 11명을 붙잡고 수갑을 채웠다. 이어 신원 확인을 마치자, 기숙사를 나서기에 앞서 옷을 갈아입으라며 잠시 수갑을 풀어주었다. 그중 1999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입국했던 누르 푸아드가 그 틈을 이용해서 창문턱에 오른 후, 옆 건물 옥상으로 뛰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높았던 옥상 벽을 붙잡지 못하고 추락했다. 곧바로 119구급차로 순천향대 부천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장기와 대동맥파열로 다음 날 숨을 거뒀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출입국사무소는 "단속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주노동자의 사망이나 부상 등은 공무원의 귀책사유에 해당되지 않아 배상책임이 없다"며 누르의 죽음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기발하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단속하며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지만, '불법체류자' 한 명의 죽음쯤은 감수해야 할 불가피한 사고 정도로 치부했다. 하지만 누르의 장례식장을 찾은 많은 이주노동자들은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단속이다"라는 말로 출입국의 단속 행태를 비난했다.

장례식장에는 출입국 단속을 피하다 발목이 부러졌지만, 단속반원들이 방치하는 바람에 부상 부위가 감염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던 토니도 있었다. 그는 미등록자라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라며 울분을 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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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 푸아드 장례식장 출입국 단속을 피하다 발목이 부러졌던 토니(노란 조끼) ⓒ 고기복


"누르가 당한 일은 절대 남의 일만이 아니다. 나도 같은 일을 겪었다. 출입국 직원들이 창문으로 뛰어들어온 것을 보았다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누구나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창문 너머에 건물이 보이는데 그 정도 모험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다."

울산에서 산업연수생으로 일하고 있던 누르의 동생은 형의 사망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한국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남은 체류 기한을 뒤로하고 형의 유해가 송환될 때 같이 귀국했다.

먼저 죽은 아들을 원망하며 이주노동 탓만 하는 아버지

누르가 유해로 송환된 날로부터 두 달이 지나 '자발적 귀국과 사회 재통합'을 위한 귀환 이주노동자와 예비 이주노동자 조사차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였다. 누르의 아버지, 무함마드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누르가 어떻게 죽었는지 빤히 아는 마당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렇다고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아버지가 위로받고자 만나자는 것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쯔삐링 도착이 아직 멀었을 때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을 요량으로 차를 세웠다. 그는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반색하며 길을 안내했다.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들부터 겨우 걸음마를 뗀 아이들까지 낯선 사람의 방문에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무함마드의 집은 자식이 넷이나 해외에서 돈을 벌었다는 데도 이웃집들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집 앞 밭에 콘크리트 타설 작업만 하고 벽도 올리지 못한 터는 꽤 넓어 보였다. 짓다 만 건물터에 앉을 것을 권한 무함마드는 눈짓으로 트럭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들 녀석이 살아 돌아왔으면 이 집을 마저 지었을 텐데... 짓다 말았지. 대신에 녀석이 돌아오면 꼭 사고 싶다던 트럭을 한 대 샀어. 나는 평생 소 장사를 하면서 먼 길을 걸어 다녔어. 며칠씩 걸어서 소를 사 오고 팔고 그랬지. 그게 안 돼 보였는지 아들이 툭하면 그랬어. 트럭 사서 장사를 돕겠다고 말이야."

무함마드가 가리킨 트럭은 화물트럭치고는 작은 짙은 청색으로 1톤쯤 돼 보이는 덤프트럭이었다. 옆에는 '누르 푸아드' 라는 이름과 이슬람을 상징하는 아랍어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뜨거운 재스민 차가 접시에 들려 왔다. 운명인데 어쩌겠냐며 덤덤하게 죽은 자식 이야기를 전한 무함마드는 의외로 차분했다. 반면, 다른 자식들에게 '당장 들어오라'고 하는데도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할 때는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어디서 근본도 모르는 짝을 만나 결혼했다고 하질 않나. 난 도무지 그런 결혼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 동네 창피한 일이야. 우리 애들은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 젖도 떼지 않은 애를 아무렇지 않게 조부모 무릎에 던져 놓고 외국으로 가 버리면 그 애는 무슨 죄야. 나는 외국에 가지 않아도 열둘을 키웠어. 돈 번다고 자식 버리면 뭣에 쓸 거여!"

자식들이 해외에서 부모 없이 결혼했다는 사실이 동네 창피한 일이라고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해외에서 결혼하고 아이만 낳고 다시 출국하는 젊은이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무함마드는 누군가로부터 누르가 죽기 전 한국에서 임신한 애인이 있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었다. 하지만 유해 송환을 책임졌던 누르 동생으로부터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우리 애들은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며 목에 힘이 들어갔다.

"누르가 유해로 송환될 때 같이 온 여자 때문에 그런 소문이 있던 거 같아. 하지만 난 그 애를 공항에서조차 본 적도 없어. 임신했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누르와 같이 한국에 있던 아들이 그랬어. 만일 그랬다면 같이 살아야 했겠지. 누르 몫도 떼어줄 건 떼어주고. 죽은 사람 가지고 누가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알아보고 싶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말이야." 

무함마드는 아이를 낳아도 직접 키우기보다 돈 벌러 가는 걸 택하는 젊은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평생 우직하게 고향 땅에서만 일한 그는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아등바등하는 자식들에게 서운함을 숨기지 않았다. 먼저 죽은 아들을 원망하며 탓할 수 있는 건 '해외 이주노동'이라는 시스템밖에 없었다. 머리가 굵은 자식들은 귀를 막고 있었고, 사람이 죽어도 불가피한 일이라고 말하는 대한민국에는 달리 하소연할 방법이 없었다.

생때같은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간 대한민국이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저항할 힘이 없고, 방법도 모르는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원망을 토해내는 대신, 죽은 아들과 상관없는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원인을 알려고 했다. 그게 궁금하다고 했다. 그것은 혹시 죽은 아들이 무책임하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욕보이지나 않는지 노심초사하는 부모의 마음이었다. 사람의 죽음과 그 뒤를 따르는 소문에 대해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주노동자 #미등록이주노동자 #불법체류자 #출입국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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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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