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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한-중 갈등 해법, 2017년에 적용해보자

조선-청나라 갈등에 떠났던 청나라 상인들 돌아와... 미일 영향력부터 축소해야

등록 2017.03.19 13:32수정 2017.03.19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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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청나라 간에도 무역관계의 위기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이번 사드보복보다 훨씬 심각한 위기였다. 지금으로부터 123년 전인 1894년에 그런 일이 있었다.

1859년부터 1948년까지의 중국 해관(세관) 무역통계를 집대성한 <중국 구해관 사료>라는 대형 통계집이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의 해관 자료라서, '해관'이란 표현이 사용되지 않고 '구(舊)해관'이란 표현이 사용됐다.

<중국 구해관 사료>의 '조선 부록'에 따르면, 1885~1893년 조선과 청나라의 순 무역액은 1179만 멕시코달러였다. 제3국에 되팔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재수출액을 제외한 순 무역액이 그랬다. 당시에는 멕시코에서 주조된 은화가 국제무역에 사용됐다. 그것이 멕시코달러로 불렸다. 한편, 이 기간에 조선의 전체 순 무역액은 4654만 멕시코달러였다.

그래서 청나라와의 무역이 조선의 전체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5.3%였다. 74.2%를 차지한 일본에 이어 청나라가 2위였다. 이처럼 조선의 대외무역에서 청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일본보다는 못해도 상당한 것이었다. 

임오군란이 있었던 1882년, 조선과 청나라는 신하국과 황제국의 입장에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라는 무역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황제국인 청나라가 우세한 지위를 갖도록 했다. 이 점을 활용해 청나라는 비록 일본을 능가하지는 못했어도 조선 시장에서 2위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무역 통관사무를 처리하는 청나라 사람들. 중국 광주(광저우)에 남아 있는 옛 세관 건물인 월해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이랬던 조선과 청나라의 무역관계가 1894년 갑자기 중단됐다. 이 해에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했다. 이것 때문에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 사정이 있었다. 동학혁명이 발생하자, 당황한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기꺼이 수용했다.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무역관계에서도 일본을 제칠 목적이었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청나라가 파병을 결정하자, 일본군까지 덩달아 출동했다. 청나라가 군대를 보내는 의도를 눈치챘기에, 일본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동학군, 조선 정부, 청나라 정부 모두 당황했다. 이들은 사태 수습에 나섰다. 동학군은 정부군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조선 정부는 양국 군대의 철수를 요청하고, 청나라 정부는 '함께 철군하자'고 일본에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동학군·조선정부군·청나라군이 모두 당황해서 전쟁을 피하는 틈을 타서, 일본군은 한양을 장악하고 조선 정부를 수중에 넣었다. 그런 뒤에 일본이 벌인 일 중 하나가 조선과 청나라를 갈라놓는 것이었다.

1894년 7월 25일(음력 6월 23일), 일본은 조선 정부를 압박해서 청나라와 국교를 끊도록 만들었다. 또 무역관계에 영향을 주는 조치를 강요했다. 이에 따라 친일 내각인 제1차 김홍집 내각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포함한 무역조약들을 모두 폐기한다'는 공문을 청나라 측에 발송했다. 무역관계를 보호하는 조약들이 폐기됐으니, 양국의 무역관계는 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2017년과 1894년, 한중 갈등의 본질은 닮았다

미국의 사드 배치로 2017년에 한국과 중국의 무역관계에 위기가 발생한 것처럼, 1894년에는 일본의 조선 정부 장악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무역관계가 위기에 빠졌다. 1894년과 2017년의 공통점은, 제3국의 개입이 양국을 분열시키고 무역관계에 악영향을 줬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1894년 사태와 2017년 사태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1894년, 갑작스러운 사태로 인해 양국 무역은 된서리를 맞았다. 조선 인삼을 청나라에 팔던 조선 상인들, 만주 콩을 수입해서 조선 북부에 공급하던 조선 상인들, 조선에 돈을 빌려준 청나라 상인들, 영국산 면직물을 조선에 판매하던 상해(상하이) 및 광동(광둥) 상인들한테는 한마디로 날벼락이었다.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한양·인천 등지에 체류하던 청나라 상인들도 본국으로 급히 철수했다. 조선이 일본의 수중에 놓이는 바람에, 조선·청나라 정부는 물론이고 양국 상인들까지 피해를 봐야 했다.

조선 정부를 장악한 일본은 여세를 몰아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켰다(청일전쟁). 여기서 일본은 의외의 대승을 거두었다. 여세를 몰아 일본은 동학 농민군까지 제압했다. 이렇게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막강해져 갔으니, 두 나라 상인들은 계속 한숨을 쉬어야 했다. 어떻게 살아가나, 어디서 활로를 뚫어야 하나, 고심했을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청일전쟁 때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난국 돌파의 실마리가 되었다. 일본의 과욕이 단초로 작용했다.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895년에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마관조약·하관조약)을 통해 대만(타이완)과 요동반도(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서 할양받았다. 대만 강점을 통해 동지나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요동반도 강점을 통해 중국대륙에 발을 들여놓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급상승에 가장 크게 당황한 나라가 러시아였다. 일본의 청일전쟁 도발을 은근히 방조했던 러시아는, 전쟁으로 일본이 요동반도까지 차지하려 하자 화들짝 당황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조선 평안도 서쪽의 요동반도는 자신들을 남쪽 바다로 안내하는 통로 중 하나였다. 그런 곳을 일본이 갖게 될 경우, 러시아의 극동 정책이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안 되겠다 싶었던 러시아는 행동을 개시했다. 중국 시장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독일·프랑스의 협조를 끌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시모노세키조약에 이의를 제기했다. 대만은 몰라도 요동반도까지 일본이 빼앗는 것은 너무하다는 국제여론을 조성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삼국간섭이다. 영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인 러시아가 유럽 강호인 독일·프랑스와 함께 압박을 가하자 일본은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동반도 강점을 포기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연쇄적 결과를 초래했다. 일본이 러시아에 밀리는 것을 확인한 고종 임금은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러시아 세력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일본이 러시아에 신경을 쓰는 틈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 내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상당 부분 약해지게 되었다. 

조선과 청나라 상인들, 양국 정부에 압력 넣다

이 같은 변화는 조선·청나라 상인들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이들은 상황 변화를 활용해 자국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무역관계 정상화에 나서달라고 압박을 가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본국으로 돌아갔던 청나라 상인들도 속속 귀환했다. 일본의 영향력이 약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움직임에 힘입어 두 나라 정책결정자들은 무역관계 정상화에 나섰다. 청일전쟁으로 국교가 단절됐기 때문에, 양국 정부는 편법을 동원했다. 청나라 정부가 조선에 주재한 영국 총영사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영국 총영사는 그 권한을 근거로 조선에 주재한 청나라 상인들의 활동을 보호했다. 그런 방식으로 무역관계 정상화를 추진했다.

동시에 양국은 외교관계 정상화에도 착수했다. 그렇게 해야만 두 나라 무역이 하루빨리 정상화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작업은 생각대로 신속히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일본의 견제 속에서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1899년에 두 나라는 한청통상조약 체결을 통해 국교를 정상화하고 무역관계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1897년에 조선의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1899년에 체결된 조약은 '한'청통상조약으로 불렸다.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한청통상조약을 계기로 두 나라는 현대적인 국가관계는 물론이고 현대적인 무역관계까지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양국관계는 이전보다 업그레이드될 수 있었다. 

1882년 이후로 청나라 상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된 인천 차이나타운. 인천역 인근에 있다. ⓒ 김종성


조선과 청나라의 무역관계가 정상궤도로 복귀된 결정적 원동력은 일본의 영향력 약화였다. 일본으로 인해 파탄된 관계였으니, 일본으로 인해 재개되는 게 당연했다. 제반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는 했지만, 위기의 결정적 원인인 일본의 영향력 확장이 사라지면서 무역관계가 정상궤도로 복귀될 수 있었다.

지난 15일 <조선일보> 오피니언 란에는 '대(對)중국 무기로 반도체 D램 활용하자'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이 반도체 D램 세계시장의 87.3%를 점유하는 상황을 이용해서, 중국에 대한 한국 기업의 반도체 D램 수출을 금지하고 이를 통해 중국을 압박하자는 논지였다. 충심에서 나온 제안이겠지만, 이런 식의 대응방식에 침몰했다가는 대한민국은 정말로 절단 난다.

중국의 과도한 보복 조치에 대해서는 당연히 맞대응해야겠지만, 지금 사태의 근본적 해법은 그것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 한반도에 대한 미국·일본의 영향력이 과도하게 확대된 데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그래서 중국이 위협을 느끼고 뿔이 난 것이다. 

외세로부터 생긴 문제는 외세로부터 풀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본질적 해법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일본의 영향력을 적정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근시안이 만들어낸 사드 배치를 비롯해 미국과의 현안들을 재조정하고 미국의 과도한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것이 이번 사태의 해법이다. 중국의 과도한 행위에 맞대응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미국의 과도한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보다 뒷순위에 놓여야 한다.

한국에서 떠난 중국이 돌아오도록 하려면, 중국이 돌아올 자리를 비워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과도하게 자리를 차지한 미국한테서 일정 부분을 도로 거두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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