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민석 '민족대표 33인' 발언의 거짓과 진실

3.1운동 지도부 역할 지나치게 낮게 평가... 시민 대중과 민족대표 33인은 분리되지 않아

등록 2017.03.18 16:01수정 2017.03.18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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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에 관한 역사 강사 설민석의 발언이 논란을 일으켰다. 발언 요지는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야외공간에서의 만세시위에 부담을 느껴, 이완용 단골집이자 룸살롱인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겨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낮에 술판을 벌였다. 그러다가 천도교 대표 손병희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경찰에 전화해 자수했다. 3·1운동은 이들 민족대표 33인이 아닌 학생과 대중에 의해 벌어진 일이다'라는 것이다. 

발언의 의도는 '일반 대중이 적극적이었던 데 반해, 민족대표들은 소극적이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었다. 이 의도에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33인이 대낮에 룸살롱에서 술판을 벌이고 술에 취한 채 자수했다는 설명은, 그들이 3·1운동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은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고급 요릿집인 태화관이란 모임 장소를 룸살롱으로 지칭하고 이곳을 이완용과 연결하는 설명은 33인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논란을 촉발한 원인이다.

지금의 우리는 민주공화국 시대에 살고 있지만, 민족대표 33인이 살던 시대는 그렇지 않았다. 1919년이면 조선왕조가 멸망한 지 9년 뒤다. 그들은 생애 대부분을 왕조 치하에서 보냈다. 그렇기 때문에 3·1운동 당일 태화관에서 그들이 어떤 분위기를 연출했을지 이해하려면, 민주공화국 시대의 문화적 잣대가 아니라 왕조시대의 문화적 잣대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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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들의 회의 장면. 그중 불교 대표인 만해 한용운의 집에서 찍은 사진. 한용운의 집인 심우장은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다. ⓒ 김종성


3·1운동은 제국주의의 착취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났지만, 이를 직접 촉발한 계기는 그해 1월 21일 고종황제의 사망이다. 고종이 일본에 의해 암살됐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대중의 분노가 촉발됐고, 이런 속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일반 대중이 호응한 결과로 3·1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탄생했다.

당시 민족대표 33인은 왕조 치하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냈기 때문에, 그 시대 일반 대중과 마찬가지로 군주에 대한 존경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종교인이었다 해도 다르지 않다. 고종황제의 국상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준비한 사실은, 군주에 대한 일반대중의 존경심을 그들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국상 기간 중에 고종황제에 대해 예의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국상도 끝나지 않은 3월 1일 대낮에 술판 수준의 모임을 했을 리는 만무하다. 국상 기간을 활용해 독립운동을 준비하면서 예법을 무시하고 술판을 벌인다는 것은, 왕조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죽은 고종을 앞세워 독립운동을 하는 상황에서 고종의 국상을 무시하고 술판을 벌이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기다가 33인 내부의 상호관계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민족대표라는 이름으로 한자리에 모이기는 했지만, 이들은 각각 기독교·불교·천도교를 대표했다. 이 중에서 천도교의 원래 이름은 동학(東學)이다. 서양 종교인 기독교에 맞선다는 의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천도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인들 앞에서 특별히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자리를 함께한다 해도, 내심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독교 지도자들이 동석한 자리에서 천도교 대표 손병희가 취할 정도로까지 술을 마셨다는 설명은 지나치게 과한 이야기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상호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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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묘의 만해기념관(한용운 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설민석 강사의 설명은, 3·1운동에서 운동 지도부가 수행한 역할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했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그는 '3·1운동은 민족대표 33인이 아닌 일반 대중에 의해 벌어졌다'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이것은 타당하다.

그렇지만, 33인이 룸살롱에서 대낮에 술판을 벌이고 취하기까지 했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그들의 모임 장소를 이완용과 연관시킴에 따라, 그들이 이 운동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들었다. 사실상 일반대중에 의해서만 운동이 벌어진 것 같은 느낌을 만든 것이다.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대중이냐 지도자냐의 논쟁이 항상 있지만, 어느 한쪽이라도 없으면 역사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어느 쪽의 기여도가 더 컸는가를 따질 수는 있어도, 오로지 어느 한쪽만이 전적으로 기여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 역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대중이지만, 그것을 이끌고 조직하는 힘은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도자가 없거나 부실하면 역사적 사건의 성사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오로지 대중의 힘만으로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우리 사회가 잘못된 지도자들 때문에 이토록 고민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주기적으로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도 지도자의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이 작년 10월 하순부터 지금까지 마음이 상해 있는 것도 거기에 있다. 지도자 없이도 사회가 잘 굴러갈 수 있다면, 지난 몇 달간 토요일마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대표 33인이 일반대중보다 소극적으로 행동한 것만을 근거로 그들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은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좀 더 적극적이지 못했던 부분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그들이 없었어도 운동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식의 설명은 올바르지 않다. 전문적인 정치투사가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들이 그만큼 해준 것에 대해서도 충분히 경의를 표할 수 있을 것이다.

설민석 강사는 33인이 일본 경찰에 자수한 부분을 낮게 평가했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처벌을 각오하고 만세운동을 조직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법처리를 두려워했다면, 처음부터 민족대표에 끼지도 않고 그 자리에 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33인 중에서 최린·박희도 같은 사람은 나중에 변절했지만, 이들 대부분은 징역 1년 6월에서 3년 정도의 형을 받았다. 당시의 일본 사법 현실에서 이것은 꽤 높은 형량이었다. 손에 무기를 들지 않은 사상범에는 그 이상의 형량을 가급적 부과하지 않는 게 당시의 일본이었다. 만약 이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일본이 그런 형량을 부과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또 민족대표 33인이 시민 대중과 함께 벌인 일이 세계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함께 일으킨 3·1운동은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싸운 역사적 사건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운동 중에서 이 운동만큼 세계사에 강한 인상을 남긴 것도 많지 않다. 

당시 일본은 세계 최강 중 하나인 러시아를 격파한 데 이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세계 주요 열강이었다. 그런 일본을 상대로 손에 무기도 없이 맞서 싸웠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3·1운동을 경험한 일본이 식민통치 방식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꾼 것만 봐도 이 운동이 얼마나 위력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3·1운동을 기획하고 준비한 이들이 바로 민족대표 33인이다. 사회적으로 무게감을 지닌 이들 종교 지도자들이 앞장섰기 때문에, 젊은 실무자들이 신뢰를 하고 운동을 준비할 수 있었다.

시민운동단체나 정당의 연로한 고문들이 겉으로는 별다른 일을 안 하는 것 같지만, 그들이 성명서에 서명해주고 모임에 참석해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는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 어른들이 있었기에 젊은이들이 마음 놓고 운동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33인이 대중보다 소극적으로 움직인 것을 근거로, 3·1운동에 대한 그들의 기여도를 낮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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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동상.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의 성균관대학교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비타협적인 불굴의 독립투사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심산 김창숙이다. 유학자 출신인 그는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며 살았다. 전향서만 쓰면 부귀영화를 보장하겠다는 회유를 거부하고, 경찰 수사과정과 법정 재판에서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로 인해 극심한 고문을 받다가 두 다리가 마비된 그는 8·15 해방 뒤에도 지조를 잃지 않았다. 미 군정의 자문위원이 되어달라는 요구도 단호히 거부했다. 이 땅을 지배하는 외세에는 자문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김창숙을 보고 백범 김구는 "나는 땅벌레이고 당신은 고니요"라고 감탄했다. 이렇게 고고한 길을 걸은 까닭에 김창숙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 핍박과 고난을 당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꼿꼿한 선비의 자세를 단 한 순간도 흐트러트리지 않고 민족 사랑을 실천했다. 

그런 김창숙이 부끄러워한 게 있었다. 회고록인 <벽옹 73년 회상기>에서 그 부끄러움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회고록은 심산사상연구회가 편집한 <김창숙 문존>에 수록되어 있다. '벽옹'이란 말은 앉은뱅이 노인이란 뜻이다. 고문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자기 자신을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민족대표 손병희 등 33인이 서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는데, 거기에 서명한 사람은 천도교·예수교·불교 3파의 대표였다. 나는 선언서를 읽고 통탄하였다. 우리나라는 유교의 나라였다. (중략) 지금 광복운동을 선도하는 데에 3교의 대표가 주동을 하고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중략) 이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있겠는가."

김창숙은 유림들이 민족대표 33인에 끼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그가 목숨을 걸고 벌인 일이, 유림들의 서명을 받아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운동이었다(파리 장서운동). 뒤늦게나마 유림들의 독립청원서를 만들어 세계무대에 보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수많은 유림들이 체포되고 투옥됐다. 이것이 제1차 유림단 사건이다.

만약 민족대표 33인이 시시하게 보였고 그들이 3·1운동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면, 김창숙처럼 꼿꼿한 선비가 그들을 그렇게까지 부러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그들의 행동을 따라 청원 운동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꼿꼿한 선비 김창숙의 회고록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민족대표 33인이 3·1운동에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약소민족의 저항운동을 이끈 역사적 사건의 주역들이다. 시민 대중과 그들의 힘이 결합했기에 3·1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급 요릿집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해도 그 점은 바뀌지 않는다. 그들이 대중보다 소극적으로 행동한 것은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들을 3·1운동으로부터 사실상 분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시민 대중과 그들 모두가 3·1운동의 주인공이었다.
#설민석 #민족대표 3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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