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은 이 먼 거리를 어떻게 다녔을까?

보령 남포 최치원 유적과 성주사지를 향유

등록 2017.03.20 13:37수정 2017.03.20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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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바위보령시 남포면 월전리 813-8에 소재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5호 최고운 유적 ⓒ 하주성


충남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 813-8에 소재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5호 최고운 유적. 고운은 최치원을 일컫는 말이다. 벌써 대천을 다녀온 지 10일이 훌쩍 지났다. 요즈음은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자료 정리를 하는 데만 며칠이 걸리고는 한다. 자료정리를 하고나면 바로 글을 써야 하는데 이젠 옛날 같지 않아 마음이 그렇게 바쁘지 않다. 이것도 나이가 먹은 탓이려니 하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게으름을 떨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보령(대천) 여행을 하면서 첫날 찾아간 곳이 바로 남포면에 소재한 최고운 유적이다. 이곳은 보리섬이라고 하는 백도였다고 한다. 1995년 님포방조제를 건설하고 난 후 육지와 연결된 이곳은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이 선유한 곳이라고 전해진다. 최치원(857~ ?)은 당에 유학을 하고 돌아왔지만 신분제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관직에 미련을 버리고 전국을 유람하였는데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을 선유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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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지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외에 소재한 사적 제307호 성주사지 ⓒ 하주성


보리섬은 지금은 육지와 연결이 되어있지만 과거에는 백도라고 하는 섬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백도 전체가 육지와 연결이 되어 포구가 없다면 섬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을 정도이다. 보리섬은 작은 산봉우리가 솟아있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가 있다. 예전 물이 이곳에 들어왔다고 하면 절경 중 절경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서 이름을 날렸다는 최치원이 쓴 한시가 암벽에 적혀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석양 무렵 찾아간 보리섬. 3월의 꽃샘바람이 부는 날 찾아간 보리섬은 최치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대신 북녘을 향하는 철새무리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최치원은 이곳 보리섬과 성주면 성주사지를 왕래했다고 하는데 그 옛날 어떻게 그 먼 길을 다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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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탑비. 비문은 최치원이 썼다 ⓒ 하주성


성주사지를 돌아보다

전하는 말에는 최치원이 보리섬과 성주사지를 왕래하면서 향유했다고 전한다. 이튿날 아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외에 소재한 사적 제307호 성주사지를 찾았다. 성주사지는 신라시대의 절로 신라시대 낭혜화상이 다시 세운 선종사찰이다. 그동안 상주사지를 몇 번이고 답사를 했지만 최치원이 이곳을 다니면서 선유했다는 말에 너른 사지가 새롭게 보인다.

"최치원은 보리섬에서 이곳까지 어떻게 이동을 한 것일까?" 차로 이동을 해도 족히 20분은 걸리는 길이다. 이곳을 최치원은 무엇을 이용해 다닌 것일까? 성주사지는 백제 법왕 때에 처음 세워진 절로 당시는 오합사(烏合寺)였다. 통일신라 때는 선문구산 중 하나인 성주사는 1금당 1탑식으로 세워진 절이다.

성주사는 당시에도 외곽은 돌담을 쌓아 경계를 삼았으며, 넓이는 8800평이나 되는 너른 경내를 갖고 있는 절이었다. 현재 성주사지에는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탑비가 서 있으며 이 탑비는 신라 진성여왕 2년인 890년에 세운 것으로 낭혜화상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에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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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층석탑금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3기의 삼층석탑. 보물 및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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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과 오층석탑성주사지 금당 위에 있는 불좌대와 오층석탑 ⓒ 하주성


현재 4기의 탑과 석등 등이 전하는 성주사지

지난 5일 찾아간 성주사지. 예전에는 주차장에서 사지로 들어가는 돌담이 트인 곳이 있었으니 돌담을 막아놓았다. 아마도 예전 성주사지의 돌담을 재현하느라 터진 곳을 막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상주사지에는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탑비를 비롯하여 보물 제47호 서삼층석탑, 보물 제20호 중앙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동삼층석탑 등이 서 있다. 이 3기의 석탑은 모두 다른 곳에서 옮겨 온 것으로 밝혀졌다.

3기의 석탑 앞으로는 신라시대에 조성한 금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있다. 이 돌계단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재14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계단 양편에 돌사자를 조각하여 세웠다. 하지만 이 사자상은 1986년 도난당하고 현재 것은 사진을 기초로 복원한 것이다. 금당터 앞에는 보물 제19호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이 서 있다. 이 오층석탑은 성주사의 불탑으로 조성된 것이다.

오층석탑 앞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성주사지 석등이 서있다. 통일신라 말기에 세운 이 석등은 파괴되었던 것을 근래 수습한 것이다. 이 외에도 성주사지에는 미륵불 한 기가 서 있으며 그동안 발굴조사에서 발견 된 삼천불전지 기단석 해체부지와 낭헤화상탑비 옆에 놓인 와편과 석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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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통일신라 때 조성한 성주사지 금당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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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상성주사지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의 사자상. 분실 후 사진을 보고 복원하였다 ⓒ 하주성


최치원은 이 먼 거리를 어떻게 다닌 것일까?

성주사는 본래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절이라고 한다. 당시 이름은 오합사(烏合寺)라고 불렀다는데, 오합사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도 언급하고 있고, 발굴조사 때 나온 기와 명문에도 오합사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성주사는 임진왜란 때 전부 소실이 되었으며 오늘날 폐사지만 남아있다. 8800여 평에 달하는 넓고 평평한 성주사 터에는 금당 터 앞에 5층 석탑과 석등이 남아있다. 사지 뒤편 중앙에 남아있는 낭혜화상탑비 하나만으로도 이 성주사지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낭혜화상 무염은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성은 김씨, 호는 무량, 혹은 무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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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등과 오층석탑성주사지 금당 앞에 자리한 석등과 오층석탑 ⓒ 하주성


최치원은 성주사지에 소재한 낭혜화상백월광탑비문(朗慧和尙白月光塔碑文)을 지었다. 아마 보리섬에서 이곳 성주사지를 왕래하며 풍광을 즐겼다고 전하는 이야기도, 이 비문을 짓기 위해 성주사를 찾았음을 뜻한다. 이곳 성주사에서 보리섬의 풍광을 즐기기 위해 먼 길을 다녔을 최치원, 당시 이곳의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웠기에 그 먼 길을 다녔던 것일까?

지금은 육지가 되어 옛 풍광을 찾아볼 수 없지만 현재 남아있는 병풍과 같은 바위만 보아도 당시의 모습을 조금은 유추해 볼 수 있다. 봄바람이 불고 꽃이 피는 계절이 되면 시간을 내어 이 보리섬에서 성주사까지 최치원이 걸었던 길을 찾아 걸어보고 싶다. 그 가운데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티스토리 블로그 '바람이 머무는 곳'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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