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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토해서 살아남은 박정희, 검찰 출두 앞둔 박근혜는?

남로당 행적으로 처형 위기... 솔직히 털어놓아 조사관들 마음 움직여

등록 2017.03.20 14:43수정 2017.03.20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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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에 있는 박정희 흉상. ⓒ 김종성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버지한테 배울 게 있다. 수사기관에 가서 솔직한 태도로 진솔하게 조사를 받는 태도다. 서른두 살 때 그의 아버지는 그런 태도 덕분에 자기 목숨을 구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지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에서 육군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남한 단독정부에 반대하는 반란이고, 제주 4·3항쟁에 대한 진압 명령을 거부하는 반란이었다. 예전에는 여순반란, 지금은 여수·순천 사건 혹은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불리는 군사반란이었다.

이틀 뒤인 21일, 대한민국정부는 반군 토벌 사령부를 구성했다. 사령관에 원용덕, 참모장에 백선엽, 작전 및 정보 참모에 김점곤이 임명됐다. 서른두 살 된 박정희 소령은 김점곤의 부관으로 합류했다. 이 토벌대는 닷새 뒤인 24일 여수 전역을 탈환했다. 그 뒤 각자의 부대로 복귀했다. 박정희는 서울로 돌아갔다.

3주 뒤인 11월 11일,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토벌대 장교였던 박정희가 반군과 한 편이라는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그가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의 군사 담당 간부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박정희는 국군 정보국(방첩부대의 전신)의 김창룡 대위에게 체포되어 서울 남산의 헌병대 영창에 수감됐다.

해방 5년 전인 1940년, 박정희는 교사 생활을 접었다. 그러고는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거쳐 일본군 장교로 변신했다. 친일파의 길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때는 1944년 4월, 스물여덟 살 때였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장교가 된 것이다.

꿈에 그리던 일본군 장교가 됐다는 그때의 감격은 불과 1년 뒤인 1945년 8월 15일 충격과 허탈로 바뀌었다. 박정희가 믿었던 일본은 패망했다. 45년 당시의 그는 운이 너무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스물아홉 살은 그렇게 우울했다.

마음을 추스른 박정희는 서른 살 나이로 1946년 9월 한국 육사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에 이어 한국 육사까지 입학했으니, 요즘으로 치면 대학에 세 번째 들어가는 셈이었다. 그만큼 우수한 인재였다는 징표도 되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일이 잘 안 풀리는 사람이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서른 살에 대학 새내기가 되는 사람의 부담스러운 심정을 그는 갖고 있었을 것이다.

사태 짐작한 박정희, 도망가지 않았다

이렇게 돌고 돌아서 어렵사리 국군 장교가 됐는데, 불과 2년 만인 1948년 11월 국군에 의해 체포돼 헌병대에 수감된 것이다. 군사반란에 연루된 데다가 남로당 간부라는 사실까지 드러났으니 박정희는 사형당할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서른두 살의 박정희는 '서른 즈음부터 내 인생이 왜 이리 안 풀리는 건가?'하고 탄식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헌병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박정희는 이미 사태를 짐작하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장교가 체포되는 것을 보고, 조만간 자신한테도 화가 미칠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당신도 체포될 것 같다"는 동료의 귀띔까지 있었다.

박정희가 체포를 예견한 시점과 실제 체포된 시점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충분히 도망갈 수도 있었다. 대역죄 혐의자로서 처형이 거의 명확했으니,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도망갔을 수도 있다.  

그런데 박정희한테는 낭만이 있었다.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제2권에 따르면, 체포가 임박한 그는 긴박한 상황에서, 동거녀 이현란에게 체포 사실을 예고해주는 동시에 사랑을 표시하는 쪽지를 남겼다.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 이것 하나만 믿어주라. 아침에 국방부에 출근하니 어떤 사람이 귀띔해주더라. 내가 얼마든지 차 타고 달아날 수 있었는데,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 갔다.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불리한 것인지 아는가?"

북에서 남하한 뒤 이화여대에 다니던 미모의 학생 이현란은 박정희가 처음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열렬한 구애를 받고 어쩔 수 없이 사귀기는 했지만, 당장에라도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 이현란을 박정희는 어떻게든 붙들고 싶었다. 그래서 체포 직전의 긴박한 상황에서도 이현란과의 관계를 걱정했던 것이다. '나, 너 때문에 도망 안 가고 체포되는 거다'라는 공치사 같은 쪽지를 남긴 것도 그런 심정에 기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현란은 박정희가 여·순 사건에 연루되는 것을 보고 확실한 결별을 단행했다. 안 그래도 공산당이 싫어서 남하했는데, 그 남자까지 공산당이었다니! 장교라는 것만 빼면 별로 마음에 들지도 않는 남자가 공산당 간부였다니! 이현란의 결단은 어렵지 않게 단행됐다.

자신의 체포를 일찌감치 예견했으며 체포 직전까지도 낭만적 태도를 유지했다는 점은, 박정희가 체포 이후를 사전에 미리 대비할 여유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심리적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체포됐다면, 체포된 뒤의 행동 계획을 미리 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체포 이후를 대비한 매뉴얼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헌병대에 끌려간 박정희는 수사 초기의 곤경을 극복하고 조사관들의 마음을 사는 데 성공했다. '수사 초기의 곤경'이란 것은 기골이 장대한 이한진 대위한테 혹독한 고문을 당한 일이다.

박정희를 심문한 또 다른 장교 김안일을 다룬 2017년 1월호 <월간조선>의 '박정희를 구했던 숙군 주역 김안일 장군 이야기'에 따르면, 대화로써 수사하는 기술이 부족했던 이한진은 피의자를 완력으로 다루다가 팔을 부러뜨리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 수사관을 만난 탓에 박정희는 심한 고문을 당했다. 끝내 그 때문에 동지들의 이름을 실토하고 말았다. 개중에는 박원석 대위처럼 억울하게 거명된 장교도 있었다.

이한진한테는 그렇지 못했지만, 박정희는 다른 장교들한테는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를 체포한 뒤 심문에 참여했던 김창룡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헌병대에 끌려가자마자 "내 이런 때가 올 줄 알았다"며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고 자술서도 술술 써내려갔다.

박정희는 "내가 이러려고 군에 들어왔나!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홀로 탄식했다. 그러더니 혐의를 부인하지 않고, 마치 일기를 쓰듯이 자술서를 술술 써내려갔다.

이 모습이 김창룡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이렇게까지 수사에 적극 협조해주는 역모사건 관련자도 드물 것이다. 여기에 감동받은 김창룡은 박정희 구명운동에 적극 나섰다. 박정희한테서 혐의를 찾아내야 할 사람이 엉뚱한 일에 나선 것이다.  

김창룡으로부터 '박정희를 살려주자'는 제안을 받은 김안일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다. 박정희를 따로 불러 조사할 때 받은 느낌을, 김안일은 "그는 자포자기도 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생에 대해 애착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는 말로 표현했다. 피의자에 대해 인간적 감정을 느낀 것이다. 결국 김안일은 백선엽 정보국장에게 '박정희를 살려주자'는 제안을 했다. 김창룡이 김안일에게 했던 말을, 김안일이 백선엽에게 했던 것이다.

김안일의 말을 듣고 박정희를 만난 백선엽은 김안일보다 훨씬 더한 느낌을 받았다. 백선엽은 인간적 감정을 느끼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진한 감동까지 받았다. 백선엽을 만난 자리에서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한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가입 동기를 담담하게 설명했다. 박정희가 백선엽에게 토로했을 이야기를 간략히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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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의 백선엽.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솔직함' 덕분에 위기 모면한 박정희

'1946년 10월 대구 사건(대구 폭동) 때 저의 친형인 박상희(통일 지지론자)가 경찰의 총격에 피살됐습니다. 형의 집에 갔더니, 남로당 간부 이재복이 유족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이재복은 제게 <공산당 선언> 등의 책자를 주면서, 남로당에 가입해서 형의 원수를 갚으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공산주의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단순히 형의 죽음이 서러워서 그랬을 뿐입니다. 동생으로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저 좀 도와주십시오!'

'저 좀 도와주십시오'라는 말은 진술의 끝부분에 있었다. 이 한마디에 백선엽은 가슴이 울컥했다. "도와드리지요"라고 그는 대답해버렸다. 저렇게까지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도와달라고 애걸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훗날 백선엽은 '도와드리지요'라는 말이 자기 입에서 무심코 나왔다고 회고했다. 박정희의 솔직한 태도가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이처럼 이한진을 제외한 나머지 장교들은 박정희의 솔직한 태도를 보고 살려주자는 마음을 먹었다. 그런 뒤에 적극적으로 구명운동을 벌였다. 박정희 수사팀이 박정희 구명팀으로 변한 것이다. 군대 내에 존재하는 민족주의파 장교들을 견제하려면 박정희 같은 유능한 친일파 장교가 있어야 한다는 전략적 고려도 작용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조사관의 심금을 울려주는 박정희의 솔직한 전략이 효과를 발휘한 측면도 있었다. 시를 쓰고 곡을 쓰는 박정희의 예술적 재능이 효과를 발휘한 게 아닐까.

여수·순천 사건은 대한민국정부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처럼 중대한 사건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에 연루된 박정희가 무사히 살아난 것은 대단한 기적이었다. 수사에 비협조적이었다면 그는 극형을 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혐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동지들의 이름까지 술술 실토하며 그것도 모자랄까봐 엉뚱한 이름까지 거명하는 '성의'를 보여준 게 참작되어, 그는 구속된 지 한 달 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석방 1주일 뒤부터 부대에 출근한 박정희는 군법회의 재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군부에서 이미 박정희 구명계획을 세워놓은 뒤였다. 얼마 안 있어 징역 10년으로 감형되고, 다시 얼마 안 있어 형집행 면제 조치가 내려졌다. 그 뒤 한동안 문관 신분으로 군복 대신 검정 양복을 입고 출근해야 했지만, 그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넘겼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처형 위기를 모면한 비결은 솔직한 전략 덕분이었다. 혐의가 명백해 처벌을 면키 어려운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고 수사에 적극 협조하는 동시에 '도와달라'는 읍소로 조사관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2016년 10월부터 지금까지 혐의를 살짝 인정했다가 다시 부인하고, 잘못을 뉘우치기보다는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 아버지를 신처럼 떠받드는 그가 막상 검찰 조사실에서는 아버지의 솔직 전략을 답습할까. 아니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다른 '마이웨이'를 선택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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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가족.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박근혜.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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