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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무보수는 기본... 그래도 사람들이 줄을 섰지"

50여년 역사의 충남 예산군 '충남교통 1급 자동차 정비공장'

등록 2017.03.20 17:08수정 2017.03.20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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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고속 1급 정비공장을 정문 앞에서 본 전경이다. 아치형 간판은 설립당시 판금부에서 자체제작했다. ⓒ <무한정보> 이재형


1960년대. 희뿌연 흙먼지를 뒤집어 쓴 마이크로 버스가 예산차부(충남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 예산버스정류장)로 들어서면 차부 뒤편에 있는 허름한 차량수리소가 바쁘게 돌아갔다. 자갈길 신작로를 누비고 들어온 조립 버스는 손볼 데가 한두 곳이 아니었다.

1967년 예농(예산농업고등전문학교) 축산과(53회)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청년 윤영복씨는 공무원이나 교직 또는 농업의 길로 가지 않고 차부 뒤편에 있는 차량수리소에 취직해 손에 망치를 잡는다. 그리고 1년 뒤 이 허름한 수리소가 전국에서 두 번째라면 서러울 충남 유일의 자동차정비공업사로 발전한다.

1968년 6월 13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 주교리 주교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 아래 대지 2000평에 '충남교통 1급 자동차정비공장'이 역사적인 낙성식을 갖는다.

바야흐로 자동차 정비와 버스 제작의 태동기였다. 전국적으로 1955년 하동환공업사와 신진공업사가 미군 군용차를 재생해 사용했고, 1960년에 새나라자동차가 국내 최초로 조립승용차(소형) 생산체계를 겨우 갖췄을 때였다. 수요가 많지 않았던 버스는 조립이나마 생산시스템을 갖춘 전문기업이 없었다.

1967, 충남유일 정비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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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교통 1급 자동차 정비공장 신축 낙성식 장면(위)과 현재 썰렁하기만한 정비공장 내부 모습(아래). ⓒ <무한정보> 이재형


현재 충남고속에 근무하는 박상혁 전무에 따르면 1936년 충남여객이라는 도단위 통합버스회사가 발족된 이후 1966년에 충남교통(예산)과 금남여객(대전), 삼흥여객(공주), 천안여객(천안) 이렇게 4개 회사로 분리독립했다.

충남교통 1대 사장은 동아약국 옆에 살던 박선린씨였고 전무이사 임덕로, 총무상무 김응태, 사업상무 박상호, 기술상무 김재순씨였다.

예산을 본거지로 한 충남교통은 서태안까지 내포권 일대 대중교통의 발이 됐고, 버스를 굴러가게 했던 원동력은 충남교통 1급 정비공장에서 나왔다.

"그 당시엔 우리 정비공장에서 버스를 필요한 만큼 만들어 썼어요. 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엔진과 하우징(데오) 이런 중요부품만 사오고 차체를 포함해 대부분은 철판을 두드려서 만들었죠. 그 때 그걸 보면서 사람 손이 참 대단하다는 걸 느꼈어요. 정비공장 직원수만 150명이 넘었는데 늘 기술 배우러 온 젊은이들이 줄을 섰어요. 무보수로 일을 하는데도 빽을 썼을 정도였으니까."

1966년 6월 21일 충남교통 서기로 입사했다는 박 전무가 초창기를 회상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야 말로 정비기술을 가르쳐 주는 곳도 없었고, 참말로 기술자들이 무섭게 교육을 시켰어요. 지금 세상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 내가 66년도에 입사해 초봉이 월 6000원이었는데 정비사들 월급이 더 높았어요. 그러니까 푸대접을 받고도 기술 배우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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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고속 박상혁 전무와 정지윤 이사가 옛날 장부를 펼쳐보며 정비공장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그렇게 망치소리가 멈추지 않던 충남교통정비공장도 시대변화를 맞는다. 1980년대까지는 번성기를 누렸지만 이후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충남교통도 예산·당진·서산·홍성·대천·서천·청양군에 완행버스를 떼어 주고(분리독립) 충남고속으로 명칭이 바뀐다.

"우선 정비사 수급이 안됐어요. 기술자들이 서울을 선호했고, 또 각 영업소마다 정비사를 따로 두니까 일도 많이 줄었고요. 그러니 자꾸만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지."

충남고속 1급 정비공장의 현재 직원은 9명이다. 이 가운데 정비사는 5명 밖에 남지 않았다. 그나마 오는 5월 예산에서 첫 망치질을 시작한 이래 50년 동안 수많은 정비사들이 애환을 함께했던 둥지가 충남 서산시(운산면 갈산리 768-1)로 이전한다.

박 전무는 "서운하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참으로 많은 정비사들을 배출한 공장인데…. 고인이 된 분들도 많고, 예산근처에서 독립해 카센터, 철공소 등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전국으로도 퍼져 나갔죠. 충남교통 정비공장하면 실력을 알아줬으니까."

무보수로 기술 배우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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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공장의 주역이었던 대흥특장 윤영복 전무와 허길용 사장이 나란히 앉아 정비공장이 잘나가던 시절을 회상했다. ⓒ <무한정보> 이재형


50년 전, 예농 졸업 뒤 엔지니어의 길로 간 청년 윤영복씨는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그는 트레일러(츄레라) 분야에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달리고 있는 향토기업 대흥특장(오가 월곡리)에서 전무로 근무하고 있다. 하체부에서 갈고닦은 50년 경륜으로 트레일러 제작 전 과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대흥특장 허길용(70) 사장 역시 충남교통 정비공장 출신(자재부품 조달)으로 50년 지기 한 길을 가고 있다.

"원래는 운전기사가 멋져보여서 운전을 배우려고 옛날 차부 뒤에 있던 차량수리소에 들어갔는데 한봉석 공장장님이 기술을 배우라고 권유했어요. 그래서 임덕환씨 밑에서 차량 하체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죠. 그 당시엔 제대로 기술자가 되면 한달 월급타서 하숙비 내고도 송아지 한 마리 사서 집으로 가져갈 수 있을 정도라고 했으니까."

사람 좋게 웃는 윤 전무의 각진 얼굴에서 강한 엔지니어의 이미지가 읽힌다.

옆에서 앉아 듣고 있던 허 사장이 한마디 거든다.

"그 때 봉급을 안 받아도 좋으니까 기술만 가르쳐 달라는 사람이 수두룩 했어요. 6개월은 기본으로 무보수였지. 공무원이 한달에 5400원 받을 때 우리 기술자들이 9300원 받았으니까."

1970년대 충남교통 정비공장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우리나라 버스회사 중 충남교통만이 정비공장에서 직접 버스를 만들어 자체공급했다고 한다.

정비공장은 그렇게 유명세를 떨쳤고, 충남 서해안 일대를 굴러다니던 중소형 자동차들까지도 고장이 나면 예산으로 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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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차체를 도장하는 열처리실과 작업실. ⓒ <무한정보> 이재형


정비공장 안에 부서만 해도 판금부, 하체부, 기관부, 전장(전기)부, 공작부, 도장부, 시트부, 목공부, 소형부, 검사장 등으로 세분화됐다. 각 부서별로 많게는 20~30명씩 정비사들과 기술을 배우는 인력이 배치됐고, 가장 인기있는 부서는 철판을 두드려 버스외형과 각 부속품들을 만들어 내는 판금부였다고 한다.

"하체부만 해도 30명이 넘었는데 내가 1급 자격시험에 합격해 하체부 반장을 했어요. 그래서 한동안 고참들한테 미움을 사기도 했고요. 하지만 실력으로 승부하던 때니까 나를 따를 수밖에 없었죠."

윤 전무가 40여 년 전 일을 추억하며 감회에 젖는다.

"정말 밤을 새워가며 일했어요. 운행하던 버스가 차축이 부러져 멈춰섰다고 하면 한밤중에도 연장 챙겨서 출동했으니까. 그 땐 길이 보통 사나웠간. 툭하면 (차가) 고장났지. 처음 일을 배울 땐 네바대(쇠막대)로 숱하게 맞아가면서 배웠는데…. 그래도 생각해 보면 그 때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예산시대 50년 마감… 서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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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가 지키지 않은 수위실에는 진돗개 한마리가 대신 경비를 서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버스 한 대를 제작하는 데는 대략 세달 가까이 걸렸다고 한다. 기관과 미션 등 주요부품만 중고로 나온 것을 사오고 나머지는 9개 부서가 합심해 만들고 조립했다. 정비공장은 망치질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용접불꽃이 밤을 밝혔다.

"철판을 자르고 불로 궈서 망치로 두들겨 둥글게 오므리고 군대에서 굴러나온 엔진, 도요타차 하체 뜯어다 조립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주먹구구였지만 우리가 하동환자동차 보다 버스는 먼저 만들었으니께."

윤 전무의 표정에 자부심이 묻어난다. 부품 조달 업무를 보았던 허 사장이 곁들여 옛 얘기를 한다.

"버스 한 대 만드는 데 2만가지 부품이 들어가요. 그러니 얼마나 손이 많이 가겠어요. 그 때 만든 버스 넘버가 176, 185였지 아마…. 버스가 다 만들어지면 사장님도 오고 꽃다발 걸어놓고 한바탕 잔치를 했어요. 물론 고사도 지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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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사들이 일을 끝내고 피로를 풀던 목욕탕. 지금은 물이 끊어진지 오래됐지만 건장한 청년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 <무한정보> 이재형


즐거웠던 추억도 많다. 정비일을 마치고 공장 안에 있는 큰 공동목욕탕에서 서로 등을 밀어주며 피로를 풀었고, 휴식시간엔 담장을 사이에 둔 주교국민학교 운동장으로 올라가 배구와 축구도 했다. 또 때때로 무한천으로 야유회를 나가 천렵을 하고 모래사장에서 공을 차고 놀기도 했다.

"수철리 계곡으로 쓰리고다(3/4톤 트럭) 끌고 가서 돌하고 나무 캐다가 회사에 화단도 꾸몄어요. 한 번은 공장 앞 냇가(예산천)로 몰려가서 카바이트 똥 풀어서 장어도 잡고 참 재밌게 지냈는데…. 서산으로 옮긴다니 많이 서운하네요. 그래도 가끔씩 그 앞을 지나가며 추억에 젖었었는데."

기관부 장학주·이동우씨, 판금부 조중근·최영철씨, 용접 유정용씨, 공작 이시우씨, 소형부 임창선씨, 목공부 김종성씨, 하체부 이인호씨…. 허 사장과 윤 전무는 지금 몇몇은 고인이 되기도 한 기라성 같았던 정비 반장들의 이름을 기억해 낸다. 몸을 부대끼며 함께 고생한 사람들은 이렇게 늘 그리운 법이다.
덧붙이는 글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와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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