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서 빈곤층으로 추락...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대선기획-100인의 편지 ⑨] 보건의료계 '박정희 잔재' 거둬내고, 공공성 강화하자

등록 2017.03.23 09:50수정 2017.03.23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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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나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입니다. <오마이뉴스>는 '내가 살고 싶은 나라, 내가 꿈꾸는 국가'에 대한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대선 기획 '100인의 편지'를 통해 전하고자 합니다.

이번 기획은 '열린 기획'으로 시민기자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차기 정권에 하고 싶은 말, 바라는 바에 대해 적어 기사로 보내주세요. '이게 나라냐'는 탄식을 넘어 '이게 나라다'라는 새로운 지향점을 여러분과 함께 열어나가겠습니다. [편집자말]

'4대 중증질환 국가보장 100%'는 박근혜를 당선시킨 보건의료 핵심 공약이었다. 이 공약의 의미는 다층적인데, 우선 국가가 의료를 책임진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즉 기존의 한국 의료체계에 국가 책임이 결여되어 있다는 스스로의 반성이 들어있었다.

다른 하나는 100%라는 지점인데, 이 부분은 공적 보험이 있지만, 높은 본인부담금, 비급여의 존재로 국민 부담이 높다는 것을 반증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의료의 보편적 국가보장 100%'가 아니라 '4대 중증질환'만 언급한 것은 우선순위에 따라 중증, 돈이 많이 들어가는 진단에 대해서 우선 적용하겠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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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 12월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강원도 강릉 택시부광장에서 유세하는 모습. 선거운동원이 '암 진료비 국가부담 100!'라고 쓴 피켓을 들고 있다. ⓒ 유성호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공약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집권 1년 차에 이미 완전 누더기가 되었다. 간병비는 일찌감치 비용에서 제외되었고, 비급여도 차등 병실료와 선택진료비는 일부만 절감되었다. 공적 보험의 보장 범위도 국가 보장 100%가 아니라, 노무현 정부의 로드맵을 따라가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4대 중증질환' 단어에 집중해서 기존 로드맵에 따르면 혜택을 보는 여타 질환자들의 초음파 급여화는 축소되기까지 했다.

공약 폐기도 심각한 문제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박근혜 정부는 이런 공약 일부도 지킬 수가 없었다. 박근혜 정부의 기반 자체가 의료를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의료산업화'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의료산업화는 박정희의 유산

혹자는 '박정희가 건강보험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는 박정희 정부 시절(1977년) 건강보험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만 사실이다. 실제로 건강보험은 당시 국민의 요구와 기업의 요구가 결합된 산물이었다.

도리어 박정희도 자신의 공약사항이었던 건강보험 도입을 무려 10여 년간 미뤘다. 거기다 박정희는 건강보험에 단 한 푼의 국고 지원도 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면 그에게서 건강이란 개개인의 국민이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할 소양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국가주의'는 국가가 책임지는 개념이 아니라, 국가의 헌신하는 개인들의 집합을 뜻했다.


암튼 국고 지원이 없었던 관계로 박정희 표 건강보험은 500인 이상 사업장에 소속된 노동자에게만 가입이 허용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상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진료의 범위도 의료보험 적용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거의 반반 수준이었다. 정말 꼭 필요한 절실한 진료의 일부만 의료보험이 적용되었다. 이것이 현재도 지속되는 급여와 비급여 구분의 시작이다.

또한 의료보험 제도를 만들어서 늘어나는 수요에 대응할 공급은 철저하게 시장원리를 따랐다. 때문에 직장건강보험이 도입되고 난 다음해(1978년)에는 대규모 민간병원의 개원 러시가 불붙었다. 일부 논문은 1961부터 1977년까지의 병원투자 규모를 이때 단 1년 만에 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암튼 건강보험을 만들면 의료서비스를 공급할 병원은 최소한 공공에서 책임져야 했는데, 박정희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미 1970년 삼성이 만든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등이 들어서 있었고, 민간 대학병원과 곳곳의 민간 중소병원이 성행하고 있었다. 병원은 박정희에겐 애초부터 돈이 되는 사업에 지나지 않아보였다.

그런데 유신 시절에 엉망으로 만든 건강보험, 의료공급체계가 아직까지 한국의 의료체계의 근간이 되고 있다. 물론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대투쟁은 건강보험의 대상을 임금노동자에서 전 국민으로 확대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1990년대의 시민, 노동단체의 요구로 건강보험도 단일보험자로서 통합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도 경험하듯이 급여와 비급여가 혼용되고, 민간병원들이 확장되며, 의료가 돈벌이인 상황은 결코 달라지지 않았다.

그 아버지에 그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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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민경제자문회의에 참석한 박근혜 전 대통령. ⓒ 청와대


2001년부터 '서비스 산업'으로 한국의 성장을 바꿔야 한다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이론이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신지식인'이니 IT-소프트웨어 발전 등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확고한 수익성이 발생하는 공공 부분을 민영화하는 요구로 나아갔다.

이명박 정부는 이런 요구를 제대로 구현하여, 민간이 도로, 철도, 수도, 가스 등에 진출할 수 있는 틈을 열어주었다. 박근혜 정부는 아예 철도, 수도, 가스를 상당 부분 민영화해냈다. 이런 과정에서 병원으로 돈을 벌겠다는 부자들의 욕심도 덩달아 커졌다. 그래서 투자이윤을 배당받을 수 있는 '영리병원'을 전면 허용하자는 주장이 진행되었다.

이는 국민 반발로 경제자유구역에 한정된 외국인 영리병원 허용으로 축소되었다. 이런 '외국인 영리병원'조차 외국인뿐 아니라 내국인도 진료할 수 있게 규제 완화되고, 의사들도 내국인이 하게끔 끊임없이 규제 완화 되었다. 이런 '영리병원'을 국내에서 최초로 허용(제주도 녹지병원)한 것이 박근혜 정부다.

이외에도 시종일관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에 의료를 집어넣어 기획재정부 마음대로 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청년 일자리 확대를 운운하면서 '원격의료', '의료기기 규제 완화', '국제의료' 등을 부르짖었다. 국내 영리병원을 허용하는 효과인 '영리자회사', '부대사업확대'도 밀어붙였다. '병원인수합병 허용'을 통해 국가에 기부채납된 비영리병원의 자산을 사적재산으로 전락시키려고도 했다.

문제는 이 모든 의료영리화, 산업화의 대가는 국민이 지불했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의료비 때문에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비율(재난적의료비)은 여전히 OECD 국가 중 독보적 1위였다. OECD 국가 중에 본인부담금이 높은 1, 2위 국가였고, 공적보험이 있는데도 별도의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한 세대가 80%를 돌파하는 후진국형 보험제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공공의료기관이 전체의 5% 밑으로 추락했고, 때문에 2015년 메르스 사태일 때 제대로 대응할 자원이 없어 고통받았다.

여기에 국민은 과잉진료 논란으로 병의원을 제대로 신뢰하지 못하고, 여전히 고가진료(비급여)의 유용성을 스스로 인터넷이나 주변 사람들의 정보로 확인해야 한다. 아마도 공적보험이 있는 나라 중에 이렇게 '건강정보'가 TV와 인터넷에 범람하는 곳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더 특이한 현상은 건강보험의 급여범위를 늘릴 재정은 충분했다는 점이다.

건강보험의 흑자는 놔두고 국고지원 축소

박근혜 정부 기간 건강보험은 매년 4~5조의 흑자를 기록해 현재 20조 원 이상의 막대한 건강보험 흑자가 남아있다. 상식적인 정부라면 이 흑자를 모조리 국민의 의료비 절감에 썼어야 했지만, 박근혜 정부는 그렇지 않았다. 도리어 2023년이면 재정 재앙이 닥친다는 공포 마케팅으로 남아도는 재원조차 적립해서 쌓아둬야 한다고 겁박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건강보험이 흑자이니 국고지원금은 축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물론 박근혜 자신이 1% 부자들이 이용하는 '차움' 의원을 이용하고, 비선 의료진의 별도 진료를 받으며, 무엇보다 효과도 불분명한 각종 주사치료 및 미용시술에 빠져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의료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천박하고 비합리적인 사고는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만든 엉망인 민간중심의 한국 의료체계를 정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건 나만의 과도한 생각은 아닐 것이다. 왜냐면 대부분 국민이 현재 의료제도의 근본적인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1977년의 의료체계의 특징(민간중심 의료공급, 선별적 건강보험, 공적책임이 없는 수익자 중심 재정부담)이 계속 확대 재생산된 것이 현재의 의료산업화 과정이고, 의료영리화과정이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그 막장의 끝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제 박근혜를 끌어내린 시점에서 보건의료 적폐의 제1 과제는 보건의료의 유신잔재(1977년 체제)를 일소하는 것이고, 여기에는 의료의 공공성 회복, 건강보험 재정의 공적  책임 강화가 포함되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4대 중증질환 국가 보장 100%'같은 공약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실제로 국가가 재정과 의료 공급에 책임있는 주체로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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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2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보건의료인력 확충, 최저임금 1만원인상, 노동법 개악 저지를 위한 총력투쟁결의대회'에서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조합원들이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 최윤석


이런 과정이 물론 한 번에 이루어지기는 힘들다. 우선 당장 남아도는 건강보험 흑자 20조로 비급여를 없애고, 민간 병원을 공공화하는 데 사용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의료비가 없어서 진료받지 못하거나, 의료비 때문에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 비급여가 포함된 건강보험 상한제, 그리고 비급여 없는 제대로 된 건강보험제도를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

사실 이 정도는 누구든 집권하는 세력이 의지만 있다면 당장 가능하다. 왜냐면 당장 영국이나 스웨덴처럼 병의원을 공공화하자는 주장이 아니고 있는 재원을 재배치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끝으로 박근혜 정부 집권 다음 날 한국 최초로 공공병원(진주의료원)을 폐원한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당시 "공공의료는 박정희 때 시작된 좌파정책"이라는, 기가 막히는 '박정희 색깔론'까지 들먹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박근혜를 계승하는 자유한국당의 대선후보가 될 듯하다. 이런 과정을 보고 있자니, 과거 홍준표가 막말을 하다 보니 실수했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라고 느껴진다.

아마도 한국의 강성우파들은 애초에 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박정희가 공공의료를 완전히 잘라버리고, 건강보험이 아니라 미국 같은 민간보험 천국을 만들지 않은 것이 불만인 건 아닐까? 그리고 우익들은 박근혜가 그런 역할을 해낼 줄 알고 지지했던 것이 아닐까? 이것이 박근혜를 끌어내린 만큼 유신체제와 유신 망상도 걷어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다.
#건강보험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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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집행위원, 재활의학과 전문의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에디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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