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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머 들고 화장실로 달려간 케빈 코스트너, 뭘 때려 부쉈나

[리뷰] 영화 <히든 피겨스>, 인종차별에 맞선 세 여성의 아름다운 분투기

17.03.23 15:57최종업데이트17.03.23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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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들은 한동안 열등 인종 취급을 받았다. 백인들은 편견을 조장해 인종차별을 합리화했다. 백인 지배계급은 인종차별 합리화를 위해 모든 학문을 끌어들였고, 과학마저 이 같은 일에 거리낌 없이 동원됐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2013년 작 <장고: 분노의 추격자>에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연기한 백인 농장주 캘빈 캔디는 '흑인들은 골상학적으로 굴종할 수밖엔 없도록 타고났다'고 조롱한다. 이 같은 조롱은 미 헌정사장 최초로 흑인 대통령을 배출한 오늘날까지 백인 우월주의자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흑인들은 끝내 인종적 편견을 무너뜨렸다. 이는 1960년대와 1970년대 한창 불붙었던 흑인 민권운동의 결과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흑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일궈낸 성과였다. 23일 개봉 예정인 <히든 피겨스>는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세 흑인 여성 캐서린 존슨, 도로시 본, 매리 잭슨의 이야기다.

중요한 순간마다 사라졌던 그녀

<히든 피겨스>는 뛰어난 능력과 성실성으로 인종장벽을 극복한 세 여성들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린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영화의 배경은 미 항공우주국(NASA)이 우주개발을 두고 구소련과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던 1960년대다. 이 시기는 흑인 민권운동이 타올랐던 때와도 겹친다. 영화는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유인 우주선을 보내는 데 성공하자 미국이 느꼈던 충격, 동시에 인종차별이 횡행했던 당시 분위기를 동시에 보여준다. 사뭇 대조적인 시대 분위기는 세 주인공의 활약상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로 작동한다.

캐서린 존슨(타라지 헨슨)은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NASA도 그녀의 능력을 높이 사 우주 임무 프로젝트팀에 합류한다. 그러나 캐서린은 우주보다 화장실이 더 멀다. 우주 임무 프로젝트팀이 백인 일색이어서 그녀가 일하는 사무공간 화장실 역시 백인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캐서린은 '볼 일'이 생기면 자신이 일하는 사무실에서 800m 떨어진 흑인 전용 근무동의 화장실로 가야 한다. 또 흑인을 백안시하는 다른 팀원들의 편견도 그녀의 어깨를 짓누른다.

이 같은 환경에도 캐서린은 자신의 임무를 등한시하지 않는다. '볼 일'이 급해지면 자신이 맡은 일거리들을 화장실까지 들고 간다.

도로시(옥타비아 스펜서)는 흑인 직원들을 관리하는 직책이었지만, 기계도 곧잘 다룬다. 특히 그녀의 혜안은 놀랍다. NASA가 IBM을 들여오자 재빨리 컴퓨터 언어인 포트란을 배워 업무 전산화에 대비한다. 그녀는 함께 일하는 다른 직원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어떤 기계를 만들어내도 버튼을 누르는 건 사람이 하는 일이야. 그러니까 새로운 기계가 나오면 잘 배워두라고."

그녀의 혜안은 옳았다. 그녀는 IBM에 익숙해졌고, NASA는 그녀를 '주임'으로 승진시킨다.

매리 잭슨(자넬 모네)은 당차기 이를 데 없다. 매리 잭슨은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 한다. 자신의 꿈을 이루려면 가까운 학교인 버지니아 공대에 입학해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이 학교는 백인 학생만 입학할 수 있었다. 잭슨은 고민을 거듭하다 장벽에 도전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일단 주 법원에 이의신청을 제기한다. 법정에선 잭슨은 탁월한 언변으로 담당 판사를 '구워삶는다.' 판사는 그녀의 설득에 넘어가 입학을 허가한다. 그녀가 판사 앞에서 한 말은 누가 들어도 감동적이다.

"오늘 보시는 많은 재판 중에 100년 뒤 기억될 재판은 뭘까요? 어떤 판결이 판사님을 최초로 만들까요?"

"유색인종 화장실 따위는 없다"

케빈 코스트너는 <히든 피겨스>에서 한층 중후해진 연기를 선보인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영화는 글렌궤도니 하는 천체물리학 용어가 수시로 튀어나온다. 그러나 이 용어들을 이해 못 해도 좋다. 영화는 우주과학을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우주개발을 둘러싼 미소의 첨예한 각축도 어디까지나 곁가지다.

영화는 세 여성이 인종장벽을 뛰어넘고자 벌이는 분투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나간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인종장벽을 허무는 세 여성의 투쟁은 실로 아름답다.

이 영화의 명장면을 꼽으라면 우주 임무 프로젝트의 수장 앨 해리슨(케빈 코스트너)이 '유색인종 화장실'이라고 적힌 팻말을 인정사정없이 때려 부수는 장면이다.

앨 해리슨은 캐서린 존슨의 천재성을 알아챈다. 그래서 그녀를 가까이 두고 프로젝트를 진행해 나가려 한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녀는 자리에 없다. 800m 떨어진 화장실에 가는 바람에 수시로 자리를 비운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앨 해리슨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곤 큼지막한 해머를 들고 가서는 '유색인종 화장실' 팻말을 부숴버린다. 그리고 모든 직원 앞에 이렇게 선언한다.

"앞으론 모두 같은 색 화장실을 쓴다. 유색인종 화장실 따위는 없어!"

앨 해리슨으로 분한 케빈 코스트너의 연기는 참으로 중후하다. 그는 <워터월드> <포스트맨>의 대실패로 한동안 침체를 겪었다. 그러다 <맨 오브 스틸>부터 한층 성숙해진 연기를 과시하고 있다. 앨 해리슨 연기는 코스트너의 중후함이 한층 돋보이는 연기라고 칭찬하고 싶다.

앞서 적었듯 흑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함과 최선의 능력을 발휘해 마침내 인종편견을 무너뜨렸다. 포레스트 휘태커 주연의 <버틀러 - 대통령의 집사>가 남성 흑인 집사 세실 게인스의 이야기라면 <히든 피겨스>는 흑인이자 '여성'인 주인공들을 통해 인종편견을 극복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린다.

영화 제목 '히든 피겨스'는 우리말로 '감춰진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국 NASA의 우주개발에 숨겨진 흑인 세 여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인종편견을 허무는데 공로를 세운 세 명의 '숨은 조력자'로 이해하고 싶다.

영화 <히든 피겨스> 포스터.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잡은, 좋은 작품이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미국 뉴욕에 있는 한인매체 <뉴스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히든 피겨스 케빈 코스트너 N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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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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