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안 됐으면, 괴롭힌 사람 찾아 복수했을지도"

[선감도의 비극 ③-2] 혜법 스님의 수용소 일기

등록 2017.03.28 12:14수정 2017.03.28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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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기사를 통해서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힐 계획이다. [편집자말]
⇒ 전편 ("밤만 되면 지옥, 곱상한 애들은 피할 수 없어") 에서 이어진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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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 나루터, 소년들은 배를타고 이곳에 내려서 선감학원까지 걸었다. ⓒ 이민선


소년 곽은수는 함께 지내던 친구들의 죽음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름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광수와 여명구라는 소년이다. 그는, '광수라는 소년은 분명 선생한테 맞아 죽은 것'이라고 몇 번을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학적부에는 익사로 기록돼 있다.

"여명구는 도망치다가 물에 빠져 죽어서 떠내려와서 묻어 주었어요. 그나마 섬으로 떠내려 왔으니 다행이지 바다로 떠내려 갔으면 시신도 못 건져요. 광수는 사실상 맞아서 죽은 거예요. 집에 가고 싶다고 자꾸 징징대니까 어느 날 선생이 불러 가서는 얼마나 두들겨 팼는지, 돌아왔는데 일어서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런 애를 여름에 목욕시킨다고 저수지에 넣었으니 '어이구!' 애를 건져냈는데 온몸이 아주 새파랬어요."

탈출하다 붙잡혀... 개구리 생으로 씹어 먹고

스님 곽은수는 '물좌수(별명)'라는 인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가장 심하게 괴롭힌 선감학원 선생이다. 그는 첫 번째 탈출에 실패하고 붙잡혀와 물좌수라는 선생한테 죽음의 공포를 느낄 만큼 심한 매질을 당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다. 그는 선감학원에서 생활하면서 선감도에 있는 유일한 학교인 선감 초등학교에 다녔다. 물이 빠지는 썰물에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그는 물때를 못 맞추고 그만 밀물 때 바다에 뛰어들어 탈출에 실패했다.

"그때 물좌수한테 정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매를 맞았어요. 곡괭이 자루로 100대 넘게 맞았는데, 속옷이 피하고 엉겨 붙어서 엉덩이에서 떨어지지를 않는 거예요. 맞다가 땅에 엎어지면 허리고 등이고 사정없이 내려치고, '어~휴' 그래서 지금도 제가 허리가 안 좋아요. 그때 저는 이미 죽은 거예요. 피범벅이 된 채로 3일을 굶었으니 살아난 게 기적이지요. 거긴 아프다고 해서 밥 갖다 주고 그런 거 없어요. 죽으면 그만이에요. 살려면 자기 발로 걸어서 식당에 가야 돼요.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막사에서 나와 도랑까지 기어가서 속옷을 물에 불려서 떼어내고 보니, 땅강아지가 한 마리 기어가는 거예요. 그거 주워 먹고 논물 마시고 개구리 잡아서 산 채로 씹어 먹고. 그러고 나서 기운 차려서 움직인 거죠."


이때만 배가 고팠던 것은 아니다. 폭력과 함께 배고픔도 소년들의 일상이었다. 밥이라고 해 봐야 꽁보리밥에 단무지 반찬 정도, 그나마 한 주먹도 안 되는 양이었으니 성장기 소년들 배를 채워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이나마 거르지 않고 먹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소년들은 그럴 수 없었다.

"툭 하면 굶었어요. 뽕잎 따기 풀 뽑기, 산을 논으로 개간하는 일을 했는데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식당에 들여보내질 않는 거예요. 어떤 날은 새벽에 일하러 나가기도 했는데 작업량을 못 채우면 아침을 거르게 되는 거죠. 간신히 작업량을 채우고 식당에 갔는데 밥이 없으면 정말 피눈물 납니다. 특히 힘이 약한 아이들 고통이 심했어요. 힘센 아이들한테 툭 하면 밥을 빼앗겼으니까요. 밥 먹는데 집합을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선착순이니까 맞기 싫으면 밥숟가락 놓고 뛰어야 하니, 그때도 굶는 것이고요. 밥을 손에 쥐고 먹으면서 뛰기도 하고 주머니에 넣고 뛰기도 했는데, 어떤 날은 주머니 검사도 했어요. 밥풀이 나오면 맞는 것이고요. 이래나 저래나 맞는 거예요."

배고픈 소년들 배를 채워 준 것은 개구리, 뱀, 쥐 같은 동물들이었는데, 그마저도 귀했다. 먼저 발견한 사람이 임자였다. 쥐를 그슬려서 든든하게 배를 채운 날은 '횡재수'가 있는 기분 좋은 날이었다. 인체에 치명적인 독이 있다는 복어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어느 부위에 독이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해 내장을 빼고 머리를 자른 다음 구워서 먹었다. 다행히 복어 독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었다.

쥐 고기 먹은 날은 '횡재수' 있는 기분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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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은수 스님 ⓒ 이민선


소년 곽은수는 두 번째 탈출에 성공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물때를 잘 맞춰 썰물을 탄 덕분이다. 절친 윤동수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선감학원생 3명과 함께 총 5명이 바다를 헤엄쳐 선감도를 빠져나왔다. 공무원에게 납치되어 붙잡혀 간 지 8년여만의 탈출이었다.

마산포(경기 화성)에 당도한 그는 주민들 눈을 피하며 그의 고향 수원까지 걸어서 갔다. 주민들 눈에 띄면 다시 선감학원으로 붙잡혀 가든지, 아니면 머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 선감도 인근 주민들은 '돌아가서 죽도록 맞을래, 우리 집에서 일할래?'하는 식으로 탈출한 소년들을 괴롭혔다. 실제 머슴이 되어 수년간 일을 한 소년도 있고, 주민들 신고로 붙잡혀 와 죽도록 맞은 소년도 있다고 한다.

소년 곽은수는 절친 윤동수와 자신의 고향인 수원까지 함께 왔다. 나머지 일행과는 마산포 인근 바다에서 헤어졌다. 물살이 센 곳을 헤엄쳐 건넜는데 돌아보니 일행 셋이 보이지 않았다. 스님 곽은수는 그들이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바다로 떠내려가서 죽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갖은 고생 끝에 고향인 수원에 도착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따뜻한 집이 아니었다. 절망뿐이었다. 집을 찾기 위해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그가 꿈에도 그리던 집은 찾을 수 없었다. 너무 어릴 때 떠났기 때문이었다. 수원시청을 찾아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집을 찾아 달라고 했지만 돌아온 것은 '호적도 없는데 무슨 수로 찾느냐'는 대답뿐이었다. 이름도 정확하지 않고 주소도 모르는 상황에서 집을 찾아 주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야 소년 곽은수는 자신이 호적도, 주민등록도 없는 이 사회의 외톨이라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하다못해 관공서에 집을 찾아 달라고 하는데도 호적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선감학원에 다시 돌아가야 했다. 선감학원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는 증명(성장 증명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소년 곽은수는 탈출한 지 5년만인 1982년 1월에 다시 그 지긋지긋한 선감학원을 자기 발로 찾게 된다.

"그때도 물좌수란 놈한테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어요. '도망간 놈이 왜 왔느냐, 여기가 네 집 안방이냐'고 하면서, 허~참! 정말 어질어질할 정도로 많이 맞았어요."

스님 곽은수는 이렇게라도 호적을 만든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미처 호적을 만들지 못한 선감학원생들의 미래는 정말 비참했기 때문이다.

"호적을 못 만든 애들은 대체로 일찍 죽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호적이 없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이건 뭐 간첩도 아니고. 취직을 할 수 있었겠어요. 결혼을 할 수 있었겠어요. 구두닦이, 신문팔이 전전하며 실의에 빠져 살다가 술독에 빠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나이 들면 죽는 거지요. 범죄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 아이도 있고요. 실제로 마흔 안팎에 죽은 아이들이 많아요. 내 친구 동수도 그렇게 죽었고요."

만약 호적이 없다면, 어떻게 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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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암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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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은수 스님이 선감학원에 살았다는 기록, 스님은 엉터리 기록이라고... ⓒ 이민선


소년 곽은수는 서두른 덕분에 마음씨 착한 임 형사라는 경찰 등의 도움으로 호적을 만들 수 있었다. 그 뒤 양평에 있는 한 농가에 맡겨져 농사일을 거들면서 비교적 순탄한 생활을 했다. 스님 곽은수는 임 형사와 양평에 사는 농부를 '고마운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소년 곽은수는 스무 살 무렵에 불교에 발을 들였다. 절에서 만난 스님들 보살핌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성직자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스님이 되기 전 그의 사회생활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집을 끝내 찾지 못한 것은 지금도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다.

"일하면서도 계속 집을 찾기 위해 수원을 들락거렸는데, 끝내 찾지 못했어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성직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이 소원은 버리지 못했어요. 사회생활! 호적이 있어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적응할 수가 없었어요. 누가 대접을 해 주겠어요? 양평 농가에서 나온 뒤에 배도 타 봤고, 김 양식장에도 들어가 봤고 하여튼 안 해 본 게 없어요. 호적도 없이 집 찾는다고 떠돌 때는 깡통 들고 다니며 한데서 잠을 잤어요. 신문팔이 같은 거 해서 돈 생기면 쌀 사서 깡통에 넣고 끓여서 먹고, 그것도 없으면 풀 같은 거 뜯어서 끓여 먹고 그랬어요, 소새끼처럼. 기차 몰래 타고 가다가 들켜서 두들겨 맞기도 하고요."

'큰스님'이라는 스승님 말에 따라 여러 차례 1000일기도를 하면서, 그는 집을 찾는 일을 비롯한 세속의 일을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도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스님 곽은수가 되기 이전, 소년 곽은수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절에는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해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승려가 되지 않았다면 정말 복수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비장감이 감돌았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 누구 때문에 내 인생이 곤두박질쳤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그때, 그 사람들이 나를 잡아가지 않았다면! 그 생각이 안 떠나니까 속에서 뜨거운 게 막 올라와서 괴롭고. 그럴 때마다 찾아서 복수하고 싶고. 내 전생의 업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생각은 못 한 거죠. 중(스님)이니까, 다 용서하고 살면 되지 않겠느냐? 그게 아니에요. 나 하나 묻는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너무 비참하잖아요.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죠. 지금도 꿈속에서 '기상'이라는 소리를 들어요. '제2반 인원보고'하고 소리 질러서 같이 자던 스님들 깨우기도 하고요. 공무원한테 붙잡혀 오는 꿈도 꾸고 선착순 하는 꿈도 꾸고요. 국가에서 저지른 일이니, 국가로부터 사과라도 받아야겠어요."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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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창작센터(옛 선감학원)에 전시된 사진, 칠판에 지원병이 되어 전선에 나가자란 글이 쓰여 있다. 삽을 총처럼 들고 있다. ⓒ 이민선


소년 곽은수에 관한 기록은 선감학원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원아 대장'에 남아 있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2년간 구걸을 하며 부랑아로 떠돌다가 수원시에서 단속에 걸려 1971년 11월 25일에 선감학원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스님 곽은수는 멋대로 적은 놓은 잘못된 기록이라 지적하며 가족을 만나 제대로 된 자기의 기록을 갖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이 기록도 스님 곽은수가 지난해 경기도청을 직접 방문해서 힘겹게 찾아낸 기록이다.

"제가 선감학원에 들어간 것은 1969년이고 제 이름은 박은주 아니면 곽은주입니다. 여자로 기록돼 있을 수도 있어요. 1971년에 이름 같은 것을 다시 조사했는데, 이게 그때 기록입니다."

성직자로서의 깊은 수양 덕분인지 스님 곽은수의 얼굴에는 늘 미소가 흘렀다. 하지만 소년 곽은수를 회상할 때만은 미소가 걷히고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스님 곽은수는 소년 곽은수에게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라고 속삭이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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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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