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망진 아가씨의 제주살이, 위태로워 보이지만

[서평] 김지은 글 <제주도에서 한 번 살아 볼까?>

등록 2017.03.24 15:11수정 2017.03.24 15:11
0
원고료로 응원
삼국지에서 조조는 이런 말을 했다. "여우도 죽을 때는 태어난 언덕 쪽으로 머리를 돌리거늘, 어찌하여 고향을 잊을 손가!" 비록 죽을 때가 됐다고 말하기는 아까운 나이긴 하나, 고향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지갑에 '재외제주도민증'을 늘 갖고 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이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고향 내려간다"고.

내 고향은 제주다. 남들이 가고 싶어 안달인 그곳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제주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나 다를 바 없을 만큼 제주 물정을 모른다.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고향을 떠나 살았다. 수년째 귀향을 말하면서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제주 말로 나는 이미 '외방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는 육지 사람이나 매한가지다.


몇 년 전에는 제주에 돌아갈 수 있는 징검다리를 찾고자 서귀포시 도시민유치지원센터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귀농귀촌교육을 신청하려고 했는데, 접수 첫날 오전에 모집 정원을 넘겼다고 해서 헛걸음을 해야 했다. 제주살이를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걸 그때 알았다. 제주 토박이도 주저하는 제주살이를 실천에 옮긴 사람들의 용기가 대단하다. 그렇다고 마냥 부러워할 수만 없는 일, 나도 뭔가 계획을 세워야겠다고 하던 차에 눈길을 끄는 책을 만났다.

a

<제주도에서 한 번 살아 볼까> 김지은 글, 처음북스 출판 ⓒ 처음북스

<제주도에서 한 번 살아볼까?>는 돈 없고, '빽'도 없고, 가진 거라고는 들끓는 마음밖에 없는 1983년생 서울토박이의 제주 '이민' 이야기다. 제주살이 4년차인 저자는 자칭, '청춘의 제주 이민 성공기'라 쓰고, 낭만부터 현실까지 경험담을 전하고 있다. 귀향을 꿈꾸는 제주 토박이 입장에서는 공감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다만, 저자의 용기 있는 결단은 분명 배울 부분이었다.

"갈까 말까 고민될 때는 가고, 살까 말까 고민될 때는 사지 마라." - 36p.

갈까 말까 고민하는 게 아니라, 가겠다고 마음먹고도 주저하는 제주토박이에 비하면 저자의 용기는 돈키호테 저리 가라다. 그런 저자를 제주 사람들은 '요망지다'고 했다.

"잘도 요망진 아가씨네......" - 56p.


제주어를 모르면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다. 저자도 그런 오해를 했던 모양이다. '요망지다'는 말을 사람이나 그 언행이 요사스럽고 간사하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제주에서 '요망지다'고 하면 '똑 소리 난다'는 말이다. 똑똑하고 야무지고 딱 부러진 아이를 보고 '요망진 아이'라고 한다. '잘도 요망진 아가씨'라고 불렸다면 '정말 똑 소리 나는 아가씨'라는 칭찬을 들었다는 말이다. 저자는 어떻게 요망진 아가씨 소리를 듣게 됐을까?

"제주어를 전혀 못 알아들으면 어딜 가서 누굴 만나든지 이주민이라는 딱지를 뗄 수 없다. 이건 단순히 제주어를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몇 년을 살았는데도 제주어 한마디 못 알아듣는 사람을 제주 사람들이 좋게 보진 않는다는 말이다. 단지 그 '모른다는 사실'이 '제주에 대한 무관심' 또는 '제주인화 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로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60p.

요망진 아가씨는 제주어를 배우며 어딜 가나 둥글둥글하게 살아가는 법을 체득했다. 그 덕택에 귤을 돈 주고 사 먹어본 적이 없고, '요망지다'와 '곱닥하다'는 칭찬에 익숙해졌다. 곱닥하다는 예쁘다는 말이다.

저자는 제주 이민을 생각한다면 '육짓것' 어쩌고 하는 말에도 상처받지 않는 자존감과 낯가리지 않는 친화력이 자신에게 있는지부터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육짓것'은 육지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다.

제주에서 육짓것들은 괸당에 끼기 어렵다. 여당, 야당보다 더 강력하고 끈끈한 결속력을 자랑한다는 '괸당' 문화는 일종의 끼리끼리 문화다. 괸당은 친척이라는 뜻이면서 혈연, 지연, 학연으로 이어진 연줄 문화이자, 토박이와 외지인을 갈라놓는 말이기도 하다. 육지 사람 입장에서는 제주인의 배타성이 드러나는 말이다.

하지만 제주 토박이가 보기에 제주에선 누구나 '삼촌'이 되고, '조카'가 된다는 사실을 저자는 경험하지 못했다. 제주에서 괸당 소리 듣고 싶으면 '삼촌'을 부르고, '삼촌'이 되면 된다. 가령, 제주 토박이라면 식당에서 '이모'라고 부르는 법이 없다. '삼촌' 혹은 '삼춘'이라고 부른다. 괸당이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된다. 자칭 제주 이민에 성공했다는 저자의 자존감과 친화력이면 이미 사랑받는 '조카'가 돼 있을 거라고 본다.

아름답고 독특한 자연, 소박한 사람들, 아기자기한 카페... 낭만의 섬 제주도, 제주도에서 사는 것 또한 낭만적일까? 휴양지로서의 제주와 현실의 제주는 사뭇 다르다. 그곳에도 거친 삶이 있음을 올레길에서 만난 얼굴부터 손등까지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망치질이나 호미질이나 물질이나 힘든 일에는 다 무슨 '질'이라는 말을 붙인다. 그런데 그 주에서도 제일 힘든 일이 뭔 줄 아니? 그건 바로 젓가락질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먹고 살려고 하는 모든 일은 다 똑같이 힘드니까." - 93p.

a

해녀가 태왁을 지고 가는 모습 내 어깨와 세월에 지고 온 거은 꽃이었더라 ⓒ 처음북스


고향에 돌아가기를 꿈꾸는 제주 토박이 입장에서는 요망진 아가씨가 두 가지 면에서 내심 불안하다. 이민 성공을 자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우선, 그가 제주에서 첫 번째 겨울을 보내며 뼛속 깊이 깨우친 사실에서 그렇다. 저자는 제주에서 첫 번째 겨울을 보내며 뼛속 깊이 깨우친 세 가지 사실을 이렇게 든다.

첫째, 일기예보에 등장하는 온화한 숫자를 믿어서는 안 된다. 둘째, 제주의 겨울바람은 시멘트를 통과하는 초강력 냉풍이다. 셋째, 난방비가 매우 사악하다." - 215p.

저자는 조변석개하는 날씨와 칼바람 때문에 첫 해에 고생이 많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바람을 사랑하지 않고 어찌 제주인이라 하겠는가. 바람 부는 날, 하늘을 날아보겠다고 양팔을 팔딱거려 보지 않고 어찌 제주 바람을 사랑하겠는가. 갑자기 비가 오면 오는가 보다 하고, 바람에 우산살이 부러져도 그런가 보다 하는 날이 많아질 때쯤 제주 바람에서 연인의 입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맛을 모른다면 아직 멀었다.

두 번째로 저자가 제주 이민이 성공했다고 자축하는 부분이 불안해 보인 건 제주의 어떤 점이 서울보다 더 끌렸는지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서다.

"1.바다를 자주 볼 수 있다. 2.경관이 수려하고 녹지가 많다. 3.조용하고 인구밀도가 낮다. 4.사람들이 여유롭다. 5.다른 섬에서는 없는 '공항'이 있어서 서울과의 왕래가 쉽다." - 244p.

솔직히 말해 보자. 사면이 바다인 곳은 제주 말고도 많다. 제주는 지금, 수려한 경관과 녹지가 훼손되고, 조용하던 동네는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소득은 낮고, 물가는 만만치 않은데 여유롭다고 할 수 있나?

1~4번은 상대적이라고 해 두자. 5번은 어떻게 봐야 할까? 아직도 저자는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다. 저자가 서울 토박이라 어쩔 수 없는 이유라 해도 그렇다. 끌림의 이유가 고향과의 왕래가 쉽다고 한 부분은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라는 뜻이기도 해서 위태해 보인다.

그렇다고 당장 제주 이민을 행동에 옮기지도 못하는 주제에 시비 걸 일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가 삶의 의미와 소박한 일상의 행복을 찾아 떠난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앉은 자리를 바꾸지 않으면 눈앞의 풍경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앉은 자리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저자의 행복하고 감사한 나날들이 제주에서 계속되길 바랄 뿐이다. 나는 오늘도 제주로 떠난다. 마음만은.

제주도에서 한 번 살아볼까? - 제주살이, 낭만부터 현실까지

김지은 지음,
처음북스(구 빅슨북스), 2017


#제주이민 #제주토박이 #서울토박이 #제주도 #이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3. 3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