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조선족, 어디에 있고 싶은지 물었다

[중년 부부 유럽 여행기 4] 독일의 한 조선족 청년이 들려준 이야기

등록 2017.03.28 21:22수정 2017.03.2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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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중년의 부부가 유럽 다녀온 여행 이야기입니다. 독일, 이태리, 프랑스를 두 달 동안 자동차와 기차 그리고 버스로 자유롭게 다녔는데요. 맛과 명소를 탐방하는 관광과는 조금 다른 여행 얘기를 담고 싶습니다.

울타리를 벗어나 어쩌다 길 위에 있게 된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과는 다른 여러 가지 체험을 하게 되지요. 전혀 예상치 못한 우연한 사건을 겪거나 특별한 유대 관계를 맺곤 하는데요. 


길 위에선 수없이 많은 직관적 판단을 하게 되더군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고 때로는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기도 했습니다. 돌아서 보면 과거의 또 다른 경험을 떠올리며 편견을 극복하고 서로 다른 문화적 차이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 그리고 관대한 견해를 얻는 과정을 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정말 우리가 부러워할 만큼  매력적이고 행복한 곳인가를 얘기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이 꿈꾸고 고민하는 문제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자 주-

여행을 즐기는 방식이 달랐다

우리는 캠니츠에서 한달간 체류하며 드레스덴, 바이마르, 라이프찌히, 슐로스 아우그스트스부르그, 후라이베르그, 베를린, 뮌센, 아우크스부르크, 로맨틱 가도의 끝자락인 퓌센 등을 여행했고, 아내는 처제와 조카들과 함께 차로 한 시간 반 거리인 체코의 프라하도 다녀왔다. 2000년에 동서네가 떠난 이후 몇 번 한국을 다녀가긴 했지만 우리가 방문한 건 처음이었다. 아내와 처제는 모처럼 긴 시간을 함께 하며 그간의 회포를 풀며 자매간의 정을 가득 나누었다.

여행을 즐기는 방식이 달랐다. 아내는 유럽의 분위기와 느낌 그 자체를 가득 향유하며 담아가고 싶어 했다. 내성적이지만 개방적인 성향의 나는 여행지의 맛과 풍경보단 사람을 탐했다. 우리와 다른 사람에 대한 호기심 가득한 여행에 더 흥미가 있었다.


나는 독일, 이태리 다음으로 간 프랑스 여행 중 두 번의 다른 부상을 당했다. 뜻하지 않게, 남프랑스 시골도시 드라기닝의 가장 큰 종합 병원 응급실과 한 대형 약국, 그리고 파리 몽마르트 언덕 부근의 한 종합 병원을 차례로 방문하게 되었다. 드라기닝 병원 대기실에서 20대의 여대생과 한 시간 이상 북핵 문제까지 거론하며 영어로 편하게 대화를 즐겼다. 그런데, 드라기닝과 파리의 중년 의사와 약사 모두 간단한 상황 설명조차 영어로 자연스레 못하는 것에 약간 당황스러웠던 경험이 있다.

다행히 독일인들은 대부분 영어에 능숙했다. 독일에선 캠니츠와 같이 소련의 영향 하에 있었던 구동독 지역에서 러시아어를 배운 장년층을 제외하곤 그들과 영어로 일상적인 대화나 특정 주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캠니츠 국제 열방 교회(Evangelische Internationale Gemeinde Chemnitz)에는 영어 성경 공부 모임이 있었다. 우연히 그 모임에 참석하니 독일 아저씨 두 분이랑 프랑스인 유학생 그리고 중국인이 한 분씩 있었다. 어릴 때 해외의 국제학교 출신이거나, 한국에서 글로벌 학과에 재학 중이어서 영어에 비교적 능통한 캠니츠 교회의 한국인 교환 학생들은 그 모임에는 없었다.

준비도 없이 시간도 잘못 알아 늦게 참석한 그 모임에서 한 프랑스 유학생에게 끌렸다. 한국에선 보기 힘든 틀에 박히지 않은 그의 자유로운 성경 해석과 표현 방식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다음 모임에 그와의 대화를 잔뜩 벼르고 갔더니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불참한다는 거였다. 그 한 사람은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중국 국적 'Korean-Chinese' 남광훈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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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뮌센의 옥토버 페스티벌에서 ⓒ 남광훈


그 날 모임은 취소된 걸로 하고 우리는 자연스레 대화를 하게 되었다. 이런 우연한 만남과 대화는 유럽 여행에서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는 흥미롭지만 부끄럽고 가슴 아픈 얘기도 함께 들려주었다.

조선족의 중국 동북 지역 이주 과정은 세 시기로 나뉘어 구분할 수 있다. 첫째, 1800년대 말 이후부터 농사를 짓기 위한 생계형 이주로서 함경도와 평안도의 사람들이 이주한 유형. 둘째,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 이주한 사람들. 셋째,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태평양 전쟁을 본격화하면서 군량미 조달을 위해 주로 남한 지역 출신 조선인을 동북 지역으로 이주시킨 경우이다.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곽승지 지음) p.74~75

그렇게 한민족의 아픈 역사를 품고 생존을 위해 고국을 떠났던 조선족은 또 다른 생존을 위해 중국을 떠나 세계 각지로 이주해 왔다.

1992년 한중 수교 전에는 190만 명이던 조선족 중에서 60여만 명이 90개국이 넘는 나라로 이주했고, 옌벤은 70%가 넘는 노동력이 빠져나가 노인과 아이만 남은 상태이다. - <우리는 모두 조선족이다>(신혜란 지음) p.14

아래의 글은 그때 그와 나눈 대화를 최근 수차례의 이메일과 전화 통화로 확인하고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연변대학생, 독일로 유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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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Esslingen 대학 개강 파티에서 ⓒ 남광훈




- 광훈씨도 그런 이주민 중의 한 명인데 어떻게 독일에 오시게 된 건지요?
"실은 독일에 유학 오게 된 계기가 의외로 단순합니다. 제가 중국 연변대학 과학기술대의 기계학부에서 학사 과정을 마쳤는데 재학 중 선배들이나 저보다 연장자들한테서 소위 말하는 '기업 문화'에 대해서 종종 듣곤 했었습니다. 대체로 회식과 같은 '근무의 연장선'에 관한 것들입니다. 제가 그런 문화들을 정말 싫어하는 편이라 고민하던 중 저희 학부에 계시던 독일인 교수님께 고민을 털어놓았다가 독일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또 독일에서 유학생들한테 학비 면제라는 것도 알게 되어 2011년 9월에 독일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 독일은 외국인도 학비 무상 보조를 해주는 이유로 한국인 학생들도 유학을 많이 하는 곳입니다. 독일 유학 중 좋았던 점과 힘들었던 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죠?
"좋았던 점이라 하면 제가 Hochschule Esslingen이라는 학교에서 Software based Automotive System이라는 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는데, 이 과정이 international program이어서 영어로 수강하였고 세계 각지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소통하고 다양한 사람이랑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교가 Stuttgart 부근에 있는 작은 도시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일부 수업은 Robert Bosch사나 Daimler사에서 직접 강사가 학교에 와서 수업할 때도 많았습니다. 물론 Stuttgart에 있는 Mersedes Benz본사나 Zuffenhausen에 있는 Robert Bosch사 같은데 견학도 갈수 있었습니다.

힘들었던 점은 학업이랑 언어였습니다. 독일의 공부하는 양이나 방식이 중국이랑 많이 다르고 아무리 영어로 수강한다고 하지만 영어를 세 번째 언어로 배워온 저한텐 처음엔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강의 하시는걸 기록하기조차 버거웠습니다. 경제적인 면이야 대부분 유학생들이 다 경험하듯 "절약"이 항상 최우선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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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독일어 수업 중 ⓒ 남광훈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유학생활

- 조선족이란 명칭은 중국 동북 지역에 살던 조선인이 1950년대 이후 공식적으로 중국 소수 민족의 일원인 공민의 지위를 가지게 되면서 쓰이기 시작하는데요.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부터 경제적 이유로 한국으로 이주한 그들은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같은 말과 언어를 쓰는 고국이라고 생각하는 땅에서 동포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신분상의 차별과 사회적 편견으로 인한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한국이 아닌 독일로 이주한 광훈씨는 어땠나요?
"사실 저는 여느 사람들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깊게 사고하면서 자라진 않았습니다. 유년시절은 가족의 품에서, 학창시절은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그 시대에 맞는 또 그 나이에 걸맞은 고민과 생각들을 하면서 그냥 '중국에 살고 있는 55개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지내왔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새로운 환경에 가게 되면 누구나 그렇듯이 그러다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새로운 모임이나 활동에 참여할 때 수없이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저는 남광훈이라고 합니다. 중국인이고 중국어랑 조선어가(여기서 조선어라는 표현은 분단되기 전에 훈민정음을 기반으로 사용하던 고유 조선어를 칭합니다.) 모국어입니다. 독일에서 자동차 엔지니어링 석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습니다." 이러고 나면 대개 사람들은 제 전공과목이나 중국이라는 나라보다는 "너는 왜 중국 사람인데 중국어랑 한국어가 모국어냐"는 점에 더 많을 관심을 가집니다.

처음에는 그냥 "중국에 사는 조선족이라는 소수 민족이여서 그렇다. 국적은 중국이고 밖에서 쓰는 언어는 중국어지만 집에서는 조선어로 대화하고 생활방식과 문화는 중국인들보단 조선 사람들과 더 유사하다"라고 대답을 하고 지났었는데, 이런 상황이 잦아지다보니 또 왜 그러냐는 질문을 계속 받다 보니 저도 제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고 다시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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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스위스 Jungfrau 등반하던 중 ⓒ 남광훈


- 독일에서 학위를 취득한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은 독일에서 직업을 구하고 정착하는 것이 쉽지 않아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취업하기까지의 과정을 말씀해 주시지요?
"졸업하면서 곧바로 취직하는 케이스도 있긴 합니다만 대부분 유학생들이 독일에서 학업을 마치고 정착하기가 쉽지 않은 건 사실입니다. 물론 저도 그 악몽 같은 시간들을 경험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취업 신청 메일을 보내고 또 면접도 봤었지만 취직이 생각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졸업해서 학위만 있으면 취직하는데 문제없을 줄 알고 두 학기 동안에 모든 과목을 수강하고 세 번째 학기에 논문을 써내고 일년 반만에 졸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잔혹했습니다. 대체로 독일 학생들은 학부생일 때부터 한 학기동안 인턴(Praktikum) 합니다. 졸업 논문도 회사에 가서 쓰는 케이스들이 많습니다. 거기에 석사 과정에서 또 한번 인턴을 합니다. 졸업 논문을 쓰고 거의 석사 학위를 받을 때쯤이면 2년 동안의 인턴경험을 쌓고 사회에 나오게 됩니다. 아무리 독일인들이 영어를 잘한다 하더라도 독일 기업 내에서는 독일어로 소통하기 때문에 독일어가 필수입니다. 그때까지도 매우 기초적인 독일어밖에 구사하지 못했던 제가 취직이 쉽게 될 수가 없었습니다.

- 광훈씨와 같은 비독일인 학생들이 독일 학생들과 같은 과정으로 취업하지 못하는 게 언어 외 다른 문제가 있나요?
"당연히 다른 원인들도 있겠지요. 언어랑 지식습득의 차이 빼고도 문화 차이, 비자 문제 그리고 자국에 있는 가족 등의 요소들이 회사로 하여금 같은 전제하에서 독일인을 채용하는데 어느 정도는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년 반동안 구직하면서 생계용 알바를 하고 언어학원에 독일어 인텐시브 코스를 신청하여 독일어 공부를 다시 했습니다. 그러다가 1년6개월이라는 취업비자도 끝날 무렵 계속 취직이 되지 않자 취업에 필요한 두 번째 요소인 경력 쌓기에 대해 고민해 봤습니다. 독일에서 인턴은 학교 재학생밖에 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취직은 안되고 이미 가지고 있는 석사 학위 때문에 인턴도 할 수 없었고 막막했습니다.

그러다가 방향을 조금 틀어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쪽으로 석사과정을 하나 더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독일에 있는 대학원 몇 군데를 다시 신청하여 TU Chemnitz의 Automotive Software Engineering이라는 대학원 과정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개학한지 한주쯤 지나서 학부장님을 찾아가 제 상황을 설명하고 경력을 쌓고 싶으니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함께 일하고 싶다고 얘기했습니다.

다행히 제가 전에 Esslingen에서 공부할때 진행한 Quadcopter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이 교수님도 Quadcopter에 대해 연구하는 프로젝트가 있어서 그 연구실에서 함께 학생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듬해 학교에서 있게 된 취업 박람회에서 지금 근무하는 회사 직원(현재는 동료)을 만나 인턴을 시작했고 3개월 후에 정사원으로 입사하여 학교를 자퇴하고 지금은 직장인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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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회사 동료들과 볼링을 즐기던 중 ⓒ 남광훈


수입이 일정선 넘으면 블루카드 받아

- 자퇴를 하면서까지 취업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나요?
"앞에서 얘기한 대로 두 번째 석사 과정에 도전한 주요 목적은 취업을 위한 경력을 쌓는 것이었고 또 석사학위를 두 개 받는다고 제가 하고 싶은 일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쉽게 자퇴를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 아쉬웠던 점이라면 학부장님과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끝까지 할 수 없었던 점입니다. 물론 취직되면서 경제적인 상황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 이주민의 신분은 현지에서 생존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캠니츠에서 현재 노동 비자로 계신 건가요?
"독일에서 대학교나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취직했을 때 수입이 일정선을 넘으면 블루카드(EU Blue card Germany)를 받게 되는데 이 또한 독일에서 인재들을 독일에 남게 하게 위한 정책의 하나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학업이 끝나면 곧장 모국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1년 6개월 동안의 취업비자를 발급해 주는 것도 그런 정책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현재 블루카드 발급을 신청 중이고 취직한지는 거의 1년 반 정도 되었습니다."

- 독일은 관공서나 은행 같은 곳을 제외하곤 근무 시간이 유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캠니츠에서 이른 아침에 거리를 다녀보면 새벽 6시만 돼도 출근하는 차가 많이 보이던데요, 현재 독일에서의 회사 생활에 대해서 들려주시죠.
"우선 먼저 새벽 6시에 출근을 많이 합니다. 간단히 설명 드리자면 그 사람들이 일찍 출근하면 일찍 퇴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회사 같은 경우는 하루 기본 근무 시간이 8시간인데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코어 타임(Kernarbeitzeit, 집중 근무 시간)이고 나머지 시간은 개인이 자유롭게 근무 시간을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 6시 30분에 출근하면 오후 3시(저희 회사의 점심 시간 30분은 근무 시간으로 간주되지 않음. 점심 시간은 보통 1시간임)시에 퇴근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회사마다 직종마다 모두 다릅니다. 예를 들면 관공서나 은행, 우체국 등 기관이나 서비스를 위주로 하는 업계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사이에 근무하고 매장이나 슈퍼마켓 같은 경우는 대체로 오전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오픈합니다.

- 한국은 보통 점심시간이 1시간인데 30분이면 상당히 촉박해 보이는데 이유가 있을까요?
"독일의 많은 회사들은 점심시간이 한 시간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가 30분을 유지하는 이유는 코어타임(Kernarbeitzeit)에 되도록이면 집중해서 업무를 마치고 가능하면 일찍 퇴근하는 걸 직원들이 선호해서인 것 같습니다.

현재 캠니츠에 있는 중소기업에서 Software developer로 근무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지금 맡고 있는 프로젝트는 차세대 자동차 콕핏에 사용되는 소프트웨어 개발입니다. 주요업무는 HMI development 이고 개발과 테스팅을 함께 담당하고 있습니다.

회사생활에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제가 싫어하는 회식(일 년에 크리스마스 시즌일 때 딱 한번 회식 있음)같은 "근무의 연장선"이 없습니다. 회식에서도 술을 권한다거나 부추기는 현상이 없습니다. 음료수든 물이든 맥주든 와인이든 제가 마시고 싶은걸 원하는 만큼 먹고 마시고 말 그대로 동료들끼리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며 릴렉스하는 장소입니다. "근무의 연장선"이 없어진 대신에 주말이나 퇴근 후에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식사나 운동을 하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대기업, 중소기업 급여 차이 거의 없어

- 한국의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높은 급여와 복지 혜택이 주어지는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기를 원합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극심해서 중소기업은 기피의 대상이 되고 있지요. 하지만, 극소수의 대학생만 제대로 된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고, 하급직 공무원 되기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와 불안정성이라는 단면을 잘 보여 주는데요. 독일은 중소기업이 강한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독일의 중소기업에서 일해보시니까 어떤가요?
"독일엔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독일경제를 주도하는 기업군이 대기업들이 아니라 중소기업들인 만큼 중소기업의 인프라나 기업 문화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잘 성숙되어 있습니다. 급여도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크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다 독일이 세금이 높기로 유명한데, 소득에 따른 차등 납세 제도가 잘돼 있어서 세금을 떼고 나면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의 직장인들의 삶의 질이 크게 차이 나는 것 같지 않습니다."

- 독일은 유럽에서 난민을 가장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나라이지만, 민족 우월주의로 인한 고통의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한 민족적 편견이 아직 남아 있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이주민으로서 겪은 차별이 있었던가요?
"난민 문제도 있고 독일에도 현재 배외 정서가 어느 정도 있는 건 사실이고 동부가 서부보다 조금 심하다고들 합니다만 솔직히 말하면 저는 독일인들한테서 편견이나 선입견 같은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제 주위에서도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처음에 독일에 와서 언어도 잘되고 문화랑 사회 시스템차이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여기 생활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종종 봐 왔습니다. 그 분들의 공통점은 독일에 살고 있음에도 독일인들과 어울리기를 두려워하고 꺼려한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저의 독일인 동료들한테 물어봤습니다. 그들도 학생시절 학교에 한국이나 중국 유학생들이 있었을 텐데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함께 어울려 보고 싶었던 생각은 없었는지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 어떤 이는 "우리도 유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들 중 대부분이 자기 나라 학생들끼리 어울리고 우리랑(독일 학생) 대화하기를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지 않는 것 같았다"라고 했습니다. 저희가 외국인이랑 대화하기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들 또한 저희랑 먼저 소통하기를 요청하는데 주저함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대체로 독일 사람들이 조금 시크하고 특히 동부 사람들은 표정도 항상 무뚝뚝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먼저 그들한테 다가가고 인사를 건네면 돌아오는 미소가 그렇게 환하고 친절할 수 없습니다. 옆집에 사시는 할아버지랑 같은 BMW 320시리즈 차량을 소유하고 있다는 우연한 계기로 친하게 되었거든요. 너무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셔서 전에 한번 할아버지랑 얘기를 나누다가 제가 "저는 참 좋은 이웃이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라고 얘기했더니 할아버지께서 "좋은 이웃이 사는지 아닌지는 너 자신이 결정한다"고 하시더군요.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면 편견이나 피해를 받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는 분들한테 "어디서 누구랑 있든지 자신이 처신을 잘하면 편견은 커녕 오히려 환대받는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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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우측 상단이 연변 조선족 자치주임 ⓒ 남광훈


조선족에 대한 나쁜 이미지, 안타까워

- 한국에서 조선족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왜곡되고 부정적이거나 비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론가들 사이에서 꽤 수작으로 평가받은 영화 '황해'에서는 잔혹한 살인 청부업자로 묘사되었고, TV 코미디 프로인 '개그 콘서트'에선 보이스 피싱족으로 희화화되거나, 드라마의 식당 종업원이나 가사 도우미로 흔히 나옵니다. 독일에서 한인들과 어울리면서 그런 편견을 가지고 대하시는 분들을 만나신 적이 있을 것 같은데요?

"객지에서 특히 외국에서 언어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서 친해지기는 실로 쉽고 빠릅니다. 그런 계기로 여기서도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들도 여러분 있습니다. 물론 그 분들이 저한테 조선족, 중국인이라는 편견을 갖고 저랑 어울리기를 꺼려했더라면 친해질 수가 없었겠지요.

한국인들이 대체로 "조선족"이라는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 매체에서 접한 "조선족" 이미지는 "보이스 피싱"을 쉽게 떠올리게 만듭니다. 저는 사람이 죄를 지었다면 그게 누구든지 벌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기치는 조선족이 있으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겠지요.

하지만 그룹중 소수가 죄를 지었다고 그 그룹에 속해있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똑같이 나쁜사람처럼 간주되어야 하는지 참 의문스럽습니다. 사람을 볼 때 인격 자체를 최우선으로 또 일정한 시간 지내봐야지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속한 집단에 딸린 여러 개의 수식어 중 하나로 먼저 선입견을 가져버리고 때로는 아예 그렇게 판단해 버리는 현상을 볼 때 정말 안쓰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 독일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은 광훈씨가 생각하는 "조선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죠?
"저는 1987년에 태어났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연길이라는 도시이고 중국의 영토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중국인으로 자랐고 민족이 조선 땅에서 건너온 민족이라서 조선족입니다.

제6회 한국의 전국 대학생 프레젠테이션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비어스팀의 '대한민국의 13구역'이라는 프레젠테이션 영상에 의하면 1960년도에 조선족은 그나마 국적을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기회가 없었습니다. 제가 한국인들에게 여기까지 얘기하면 그들은 그러면 지금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느 나라 국적으로 바꾸겠냐고 묻습니다. 저는 오히려 왜 이런 물음이 필요한지 궁금합니다(민족에 대한 애착심과 동경하는 마음을 국적으로 가늠할 수 있 는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독일에서 교육받은 인력은 세계 어디를 가든 환영받는다. 한국어, 중국어, 독일어, 영어에 능통하고 일본어도 일상생활에 무리가 없는 구사를 하는 이 청년이 혹시 중국이나 한국에서 일할 생각은 없는지 알고 싶었다.

"하루가 멀다하게 변화하고 성장해나가고 있는 중국이나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자극적이고 도전적이어서 많은 젊은이들의 구미를 당기게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가족 위주로 몸과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생활하는 "독일식" 생활이 저의 적성에 더 맞습니다. 독일에서 대부분 공공시설이나 매장 같은 곳은 저녁 8시면 문을 닫습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독일의 생활을 따분하고 심심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런 사회적 문화적 시스템 덕분에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중국이나 한국사회보다 많다고 생각하며 그 점을 높이 삽니다."

동양인과 같은 이주민이 특히 독일과 같은 서양의 주류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필요한 요소가 있다. 언어는 재능보다 성격과 태도가 많이 좌우한다. 마음을 열고 부족해도 스스럼없이 현지인과 어울리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다름을 인정하는 유연한 사고방식이 필요하단 말이다. 또한, 주눅 들지 않고 부당함에 맞서는 단호한 태도도 필요하다. 기술을 익히고 직업을 갖는 것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문제인 것 같다.

광훈씨는 함께 천천히 대화를 즐기면서 취사선택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생각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한편, 상대방의 체면을 살리면서 급하지 않고 소신 있게 설득해 낸다. 중국인인 그가 한민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어디서든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HOCHSCHULE ESSLINGEN #독일 유학 생활 #조선족 #중국동포 #독일 캠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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