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으로 세상 평정? 파문 일으킨 것으로 족하다

[류외향의 자연주의 음식과 삶의 이야기- 22]

등록 2017.03.28 12:00수정 2017.03.2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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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창고 발견, 눈이 번쩍 띄었다


2014년 여름에 운명처럼 우리 앞에 나타난 낡은 창고 ⓒ 류외향


오후 3시면 가게 문을 닫고 제주를 떠돌았다. 또 다시 옮겨가야 할 가게를 찾기 위해 제주를 몇 바퀴는 돌았다. 무작정 돌아다닌다고 가게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아무런 임대 정보도 없이 여기저기로 차를 몰았다. 부동산에 나온 상가는 다들 너무 비쌌다. 여행객이 좀 온다 싶은 동네면 월세가 몇 백이었다.

그렇기도 하거니와 사실 우리는 무작정 돌아다니고 싶었다. 가게에 앉아 언제 올지 모를 손님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막막함을 길 위에서 떨쳐버리고 싶었다. 그때까지 계속되어 온 불운에 대한 원망과 앞으로도 더 계속될 것만 같은 불운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자꾸만 미루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더 돌아다닐 곳도 없었고, 돌아다니는 일 자체에도 지쳐갈 즈음이었다. 남편이 제주 관련 인터넷 카페를 들여다보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제주 남쪽 바닷가 어디에 있다는 허름한 창고를 임대한다는 게시물이었다. 우리는 눈이 번쩍 띄었다. 게시물에는 이미 수십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창고는 인기가 아주 많았다. 창고를 개조한 유명한 카페도 많아 인기가 더해갔지만, 길가에 널려 있는 창고는 많아도 상가로 내놓은 창고는 귀하디 귀했다. 댓글을 훑어보니, 우리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중에는 자기 돈 들여서 이층으로 올리고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까지 만들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매입이 아니라 임대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건물주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차피 경쟁이 안 될 거, 반은 포기하는 심정으로 말이나 꺼내 보자 싶었다.


"우리는 <먹거리X파일>에 선정된 유~명한 짜장면집이에요. 셀프 리모델링도 잘 해요. 지금 제주시에서 가게를 하는데, 자리를 잘못 잡아 힘들어요. 도와주세요."

마치 면접관 앞에 선 취업준비생 같았다고나 할까. 상가 주인이 이런 얘기에 무슨 관심이 있을 거라고 하소연을 섞어가며 자기소개서를 읊어댔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놀랍게도 건물주는 몹시 사려 깊게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그는 그 당시에 <먹거리X파일>이라는 프로그램도 모르고 있었다.

얼마 후, 건물주는 가게로 찾아왔다. 우리에 대한 사연을 찾아보고 난 뒤, 다른 많은 쟁쟁한 임대 희망자들을 제치고 우리를 선택했다. 사실은 재주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뼈대뿐인 창고를 직접 뜯어 고쳐야 한다는 심각한 대목을 알고서도 그는 우리에게 창고를 맡기기로 했다.

단 한 가지 이유, 자연주의에 대한 공감대 때문이었다. 그는 한때 녹색연합에서 활동했을 만큼 친환경적인 것에 애착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 이제야 하늘이 우리를 보살펴주시는가, 드디어 인연을 이렇게 내려주시는가 싶었다. 그는 우리 같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이 정말 잘 되어야 한다고, 정말 잘 되기를 바란다고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자신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며 여러 편의를 봐주었다. 늘 악덕 건물주에게 을의 신세로 당하다가 이런 친절한 건물주를 만나니, 그 동안의 울분이 다 녹아내리는 듯했다. 마음이 얼마나 따뜻해지는지 페이스북에다 그를 '천사 건물주'라고 자랑할 정도였다. 이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은 창고와 살림집이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나이 어린 아이들이 있는 우리 가족에게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게다가 당시 살림집에는 중년의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계약 기간이 1년 반이나 남았음에도 그 부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이사를 가기로 해주었다. 퇴직 이후 휴가 차 제주살이를 시작한 터라 주거지를 옮기는 일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은 분들이긴 했으나, 계약서대로 살겠다고 한들 누가 뭐라 할 수가 없는데도, 건물주의 입장을 생각해서, 아이 둘 데리고 공사를 해야 하는 우리 부부를 생각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이렇게 미안하고 고마울 데가 또 있을까. 지지리 운도 없던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분들이 연달아 나타나니, 감동의 연속이었다.

건물 뼈대만 남기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

그해 8월부터 제주시의 가게는 문을 닫아걸고 화순으로 가서 창고를 고치기 시작했다. 살림집에 살고 있던 분들이 이사할 집을 구할 동안, 살림집에 붙어 있는 또 다른 작은 창고 안에다 텐트를 치고 살았다. 가게로 쓸 20평 남짓한 창고는 이웃집 할아버지가 고물상으로 쓰던 것이었는데, 창문도, 출입문도 없었고, 천정은 곧 무너져 내릴 듯한 합판으로 얼기설기 얹혀 있었다.

건물 뼈대만 남겨두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쥐뿔도 없이 창고를 멋지게 리모델링하겠다고 큰소리친 배짱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역시 막무가내 정신 하나는 남부럽지 않다. 일은 저질러야 시작된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우리 수중에 있던 현금은 달랑 2백만 원이었다. 그 돈과 신용카드로 2달 동안 생활비와 공사비를 쓰고 나니, 땡전 한 푼 남지 않았다. 궁리 끝에 '소셜 펀딩'이라는 것을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대개 소셜 펀딩이란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어떤 가치를 위해 다수의 대중이 소액을 투자하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의 밥벌이를 위해 돈 좀 빌려 달라고 손을 내밀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선뜻 글을 올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사람들이 냉담하지나 않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평택에서 진 빚을 감당하기 힘들어 개인회생 절차를 밟아 진행 중이었으므로 금융권 대출은 더 이상 받을 자격도 없었다. 자격이 있다 해도 그 구렁텅이로는 또 발을 넣고 싶지 않았다.

소셜 펀딩은 자체적으로 진행했다. 대행 사이트가 많지만, 수수료가 너무 비쌌다. 10%를 수수료로 내야 했다. 300만 원을 모으면 30만 원을 내야 하는 식이니, 얼마나 아까운가. 적게는 1만 원부터 많게는 몇 십만 원까지 십시일반 마음을 보태준 것을 그렇게 허투루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해보기로 하고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투자의 대가로 짜장 소스와 막걸리를 주기로 했다. 가게로 찾아올 사람들에겐 시식권을, 오지 못할 사람들에겐 택배를 보내주기로 했다. 그러나 첫 글을 완성하는 데만 며칠이 걸렸다. 부끄러움과 열패감이 마음을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글을 올린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댓글이 우수수 달리면서 계좌로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원래 알던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그저 페이스북 친구였다. SNS로 사기 치는 사람도 많다던데, 뭘 믿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돈을 보내주는지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것도 이 지독한 불경기에 말이다. 펀딩 글은 공유에 공유를 거쳐 전혀 모르는 사람도 돈을 보내주기에 이르렀다. 펀딩은 12일 동안 이루어졌고, 십시일반 모인 돈은 850만원을 넘었다. 기간은 얼마든지 늘일 수 있었지만, 어떻게든 갚아야 할 돈이었으므로 그 정도로 마감하기로 했다.

투자금에 준하는 만큼의 현물을 보상으로 돌려주기로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분들의 투자가 꼭 무엇을 돌려받기를 원해서가 아니란 걸 잘 알았다. 1만 원, 2만 원에 담긴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오롯이 느꼈기에 그 마음들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 망해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 또한 생겼다. 그 중에 수십만 원에 달하는 큰 액수를 보낸 분들도 여럿 있었는데, 정작 이런 분들은 현물로도 돌려받기를 원치 않았다. 그저 보탬이 되면 족하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고생 끝에 2014년 11월 다시 가게를 열다

3개월 간의 셀프 리모델링으로 새롭게 태어난 창고 가게 ⓒ 류외향


그 사이에 중년 부부가 더 근사한 집을 구했다며 아주 기쁜 마음으로 이사를 가 주었다. 시멘트 가루 올라오는 창고를 벗어나 번듯한 살림집으로 들어가니, 낙원이 따로 없었다. 한여름 내내 아이 둘은 마당에 만들어 놓은 풀장에서 물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고, 우리 부부는 낡고 황량한 창고를 뜯어 고치는 데 석 달을 매달렸다. 둘째가 태어난 지 10개월 무렵이었으므로 때때로 아이를 들쳐 업고 일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고생한 끝에 2014년 11월에 다시 가게를 열었고, 한동안은 소셜 펀딩한 분들에게 짜장과 막걸리를 보내느라 매일 택배를 부쳤다. 지금도 가게 한쪽 벽면에 그 100여 분의 이름이 적혀 있다. 많은 분들의 응원과 도움 덕분에 가게는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갔고, 벌써 3년째로 접어들었다.

물론 여기서도 동네 사람들은 거의 오지 않는다. 초기에 호기심으로 왔던 몇몇 사람들은 많이 남기고 돌아갔고, 더 이상 아무도 찾지 않았다. 충분히 경험했고 예상했던 일이라 우리는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 귀한 짜장면, 짬뽕을 그릇 가득 버려야 하는 마음이 얼마나 씁쓸한지 모른다. 차라리 조미료를 넣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그 맛이 어떠한지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만 찾아오기를 바랐다.

맛집 광고를 하라는 전화가 수도 없이 온다. 무슨 업체가 그리 많은지 늘 유료 광고는 하지 않는다고 단번에 전화를 끊어도 끊임없이 온다. 블로그로 시작해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까지 그 영역도 다양해졌다. 돈을 내고 방송을 찍으라는 섭외도 온다. 출연료를 주지 않으면 방송도 고사하는데 돈을 내라니, 번지수 한참 잘못 찾았다.

특히나 블로그 광고는 광고가 아니라 사기다. 돈을 낸 만큼 맛있다는 글을 써서 파워 블로그에 올려주고, 맛집 검색 상위에 노출시켜 주는 행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다. 경기를 타지 않고 끊임없이 손님이 줄을 서는 식당이 있다면, 십중팔구 광고 탓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이 한 달에 광고비로 쓰는 비용이 적게는 수십 만 원부터 많게는 7~8백만 원까지다. 결국 돈이 돈을 버는 형국이다. 

맛은 몹시 주관적인 것이라서 누군가의 입맛에는 기가 막혀도 다른 누군가의 입맛에는 정반대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맛집 키워드가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는 것은 현대인의 입맛이 전 세계적으로 통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MSG가 통치하는 인공조미료 세상이니 가능한 일이다. 열에 여덟은 맛집 검색의 결과에 그럭저럭 만족을 하고 자신 역시 "괜찮았어"라는 후기를 남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절대 권력의 세상에선 반기를 들기가 쉽지 않다. 외톨이가 되기 십상이니까.

그러나 MSG에 길들여진 입맛은 미각을 상실한 상태를 말한다. 천연 재료 각각의 고유한 맛을 느낄 수 없는 상태 말이다. 미각을 잃는다는 건 건강 적신호를 뜻한다. 다만 스스로 느끼기가 힘들다. 인공첨가물의 첫 번째 역할이 바로 뇌를 공격하여 마비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태의 사람들이 우리 가게를 맛집으로 알고 찾아오면 정말 낭패다. 우리의 맛은 그 맛이 아니고, 우리를 최고의 맛집으로 쳐주는 사람들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광고를 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 가게는 절대적으로 여행객에게 의존해야 하고, 그것도 특별한 입맛을 가진 여행객에 국한되어 있으니, 손님이 들쑥날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곳에서 잘 살고 있다. 그 전까지 우리 부부는 늘 외로웠다.

자연주의 식생활은 사람 관계를 협소하게 만든다. 편하게 아무 식당에서 만나 밥 한 끼 같이 먹는 일이 힘드니, 우리끼리만 지내게 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장사를 하면서도 여유가 생겨 자연재배 텃밭 농사도 짓고, GMO 강의도 하고, 자연주의 식사 모임인 '제주 소셜 다이닝'도 운영하며 귀한 인연을 만났고, 친구들이 생겼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오염되고 식생활이 몹시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정확히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명확히 알기란 쉽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주체적으로 자연주의 식생활을 경험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고 행사를 열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울타리가 되고 있다. 또 그 사이에 <먹거리X파일>에서 '착한 식당' 인증패를 보내주었고, <사람과 사람들>이란 휴먼 다큐 방송에도 나가게 되어 좀 더 유명해졌다. 

이 가게도 임대이므로 5년간의 계약 기간이 끝난 이후엔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자연주의 짜장면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었다. 파란만장한 그 세월을 잘도 견뎠다. 이제 몇 년 후에 남편은 육십이, 나는 오십이 된다. 짜장면으로 세상을 평정하리라던 호기는 이제 없다. 세상에 파문 하나 일으킨 것으로 족하다.

우리 부부는 '자연주의'라는 철학을 만나 생활이 혁명적으로 바뀐 것은 물론이고, 내면까지 넓어지고 깊어졌다. 짜장면 하나로 시작한 세상 공부가 깨달음의 연속이었고, 짜장면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이 일도 손에서 놓아야 할 터이지만, 우리 남은 인생을 환한 빛 속으로 이끌어준 짜장면에 대한 고마움은 영원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경제매거진 <이코노믹리뷰>에도 중복게재됩니다.
#착한식당 #노란자장면 #시인과낚시꾼 #착한식당 #자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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