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절반 후려친 사장, 출국일 말한 걸 후회했다

[하담의 파란만장 한국생활 ①] 귀국일 오른 하담 "형제들과 소주 마시고 싶어요"

등록 2017.04.03 15:24수정 2017.04.03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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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을 하루 앞두고 하담은 노동청에서 사장을 만났다. 퇴직금과 마지막 달 급여를 받기 위해서였다. 사장은 "언제 집에 가?"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고, 하담은 "내일"이라고 짧게 답했다. '내일'이라는 말에 사장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사장은 자기보다 어려 보이는 근로감독관 앞에 굽실거리며 능글능글하게 처신했다. 그는 퇴직금 지급액을 깎을 수 있도록 감독관에게 협조를 구했다. 하지만 근로감독관은 금액 조정은 양측이 알아서 할 문제라며 간섭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했다. 더불어 양측 협상에 앞서 원칙적으로 지급해야 하는 금액을 알려줬다.

그동안 '외국인은 퇴직금 없다, 못 준다'고 하던 사장은 근로감독관이 조목조목 퇴직금을 지급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자 순순히 지급하겠다고 물러섰다.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사장은 뺀질뺀질하면서도 잇속을 챙기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이었다. 근로감독관에게 퇴직금 지급액을 깎을 수 있도록 부탁했지만 거절당하자 하담에게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사장은 감독관이 계산한 금액에서 반을 후려쳤다.

"퇴직금 반만 받아. 지난달 월급은 그냥 줄게."
"……."
"무슨 말이라도 해야 줄지 말지 결정할 거 아냐."
"……."


하담은 골똘히 생각했다. 절반이라도 받겠다고 하지 않으면 사장은 일부러 몇 달이고 미루면서 애를 먹일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회사에는 3년 반을 같이 일했던 고향 친구들과 동료들이 네 명이나 된다. 같이 일하던 일곱 명 중에 셋은 다른 회사로 옮겼지만, 넷은 옮길 수가 없다.

동료들을 생각하면 사장과 싸워선 안 된다. 그래도 절반을 후려친 건 너무 했다 싶었다. 그는 '내일' 출국할 거라고 말한 걸 후회했다. 하담은 기어드는 목소리로 "백만 원 더…."라고 말을 뱉었다. 사장은 쓴웃음을 짓더니, 선심 쓰듯 "알았어. 이거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마!"하며 입단속부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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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 뒷 모습 모자에 베낭을 메고 출국하는 하담 ⓒ 고기복


쌍둥이네를 더 이상 쌍둥이네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

합이 46년. 동네에서 '코리안 브라더스'로 통하는 하담네 형제들이 한국에서 지낸 햇수다. 처음 그가 쌍둥이 동생과 함께 한국에서 산 햇수가 서른 해가 넘는다고 했을 때만 해도 한 평생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형과 동생, 둘이 더 있었다.

하담 형제는 8남매 중 넷이 한국에서 산업연수생과 고용허가제로 왔다 갔다 반복하며 지낸 세월을 합치면 46년이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하담네 형제들을 '사우다라 사우다라 코리아(Saudara saudara Korea)'라고 부른다고 한다. '한국 형제들'이란 뜻이다. 넷 다 결혼했고, 아이들도 뒀다.

하담은 쌍둥이다. 동네에서 이름보다 쌍둥이네로 불렸던 그들이 한국에서 각각 15년씩을 보내고 난 후, 사람들은 더 이상 쌍둥이네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담은 인도네시아 중부자바 남서부에 위치한 찔라짭 출신이다.

찔라짭은 인도양을 접하고 있어 대규모 새우양식이 유명하고, 국영석유회사 뻐르따미나(PT Pertamina)와 대형 시멘트 공장 등이 있어서 신흥 산업단지로 성장하고 있는 지역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직까지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아 해외이주노동을 떠나는 사람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여자들은 중학교만 졸업하고 홍콩, 사우디로 떠나는 일이 예사고, 남자들은 고등학교나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대만으로 떠나는 일이 흔하다. 그중에서 한국과 일본은 남자들이 선호하는 국가다. 한 집 건너 한 사람이 해외 이주노동을 떠났을 정도로 이주노동은 남의 일이 아닌 동네에서 하디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외로 눈을 돌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담은 한국에 처음 산업연수생으로 와서 3년을 일했다. 먼저 왔던 동생이 체류기한을 넘기고 국내에 남자고 했을 때 그는 주저했다. 미등록이주노동자, 흔한 말로 '불법체류자'가 된다는 걸 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생뿐만 아니라 같은 찔라짭에서 온 선배들 중에 이미 오랫동안 불법체류하며 일하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알아봐 준다고 해서 하담은 동생과 뜻을 같이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게 2003년 초였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하담은 다시 체류 자격을 회복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마침 그때, 한국 정부가 외국인 고용허가제 도입에 앞서 '불법체류자 특별사면 합법화'를 단행한 덕택이었다. 체류 기간이 4년 미만인 사람에게 체류 자격을 주는 정책에 따라 하담 형제는 합법 체류자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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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류 기한이 끝났을 때, 고용허가제로 재입국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걸 안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귀국했다. ⓒ pixabay


체류 기한이 끝났을 때, 고용허가제로 재입국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걸 안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귀국했다. 불법체류 기간을 포함해서 5년을 한국에 있다 귀국한 하담은 귀국하자마자 결혼했다. 그리고 고용허가제로 재입국하여 4년 10개월을 일하고 출국했다가 다시 입국했다. 15년 동안 대전에서 가장 오랜 6년을 보냈고, 이후 당진, 천안, 안산, 안성, 용인 참 많은 지역을 돌아다녔다.

마지막에 입국했을 때는 입사 후 두 달 만에 월급 문제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는 인도네시아에 지사를 두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월급을 전액 적립했다가 귀국할 때 준다면서 매달 식비만을 지급했다. 두 달 동안 20만 원을 받았던 하담은 이미 한국생활을 많이 했던 터라 다른 회사와 비교했을 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산업연수생 때도 그런 대우를 받지 않았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이직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담은 미등록자가 되었다. 결국 세 번째 입국 기간 동안 대부분은 체류자격 없이 숨죽이며 일을 해야 했다.

그동안 동료가 눈앞에서 죽는 모습도 봤고, 흰자위가 검은 눈동자를 덮어 눈앞이 침침해지는 익상편 수술을 받았고, 머리에 실핏줄이 터지는 지주막하출혈, 뇌동맥류 치료도 받았다. 귀국을 1년도 안 남기고 죽을 수도 있는 일들을 겪은 셈이었다. 15년 동안 죽으라고 일만 했던 하담은 3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귀국하지 못했다.

그러다 이번에 어머니가 고혈압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형제들이 위급하다고 전했다. 그 소식을 들은 쌍둥이 동생은 올해 초 귀국했다. 하담도 동생과 같이 귀국하려 했지만, 뇌동맥류 치료 문제로 귀국을 늦췄다. 치료받는 동안 3년 넘게 일했던 회사에서 퇴직금을 받기 위해 노동부에 진정했다. 하담은 출국 바로 전날 퇴직금 문제를 해결했다. 비록 원하는 금액을 다 받지 못했지만, 병원비 때문에 동료들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어서 만족했다.

먼저 귀국한 형제들은 소를 기르고, 파는 일을 한다. 하담 역시 귀국하면 소를 키울 생각이다. 먼저 시작한 형제들에게 배우며 하겠다는 각오다. 하담은 말수가 적지만 계획적이고 조심성 있는 사람이다. 형제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고향 물정을 익히고 좀 더 돈을 모으면 새우 양식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귀국해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네 형제가 한국에 있을 때 휴일이면 만나서 술을 마셨던 것처럼, 제일 먼저 함께 '소주나 한잔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무슬림이 술 마시면 되냐는 질문에는 씽긋 웃었다. 그게 대수이겠냐는 표정이다.

"가족끼린데요, 뭘. 눈치 보이면 마을 밖에서 마시면 되고요."

하담은 뇌동맥류 수술 때문에 입원하기 전까지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술을 마시던 습관이 있었다.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건 작년 봄, 동료가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본 후부터였다. 동료가 눈을 감았던 현장이 자꾸 떠올라 잠을 이루기 힘들었을 때였다. 두통이 심했고, 구역질도 느끼곤 했지만 피로가 겹쳐서 그러려니 했었다. 하지만 원인은 지주막하출혈이었다. 다행히 치료는 생각보다 잘 끝났다. 출국을 앞두고 술을 끊고도 잠을 잘 자서 그런지 혈색도 많이 좋아졌다. 몸무게도 평소보다 5킬로 이상 늘었다.

그런 그가 농담이지만 '형제들과 함께 소주나 마시고 싶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 건강에 자신이 생겼나 보다. 병든 어머니 때문에 귀국을 서두른 하담은 꽃피는 4월을 앞두고 파란만장했던 한국생활을 마무리했다. 형제들과 합하면 46년, 그 사연을 다 묶으면 천일야화로도 이야기보따리가 모자랄지 모른다. 3월 29일, 하담은 달콤한 이야기를 풀 생각에 싱글거리며 자카르타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덧붙이는 글 하담은 3월 29일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귀국했다.
#이주노동자 #미등록이주노동자 #퇴직금 #인도네시아 #고용허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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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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