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의 극적이고 살벌한 이야기가 담긴 돌다리

[써니's 서울놀이 ④] 서울 최고(最古)의 다리, 한강 살곶이 다리

등록 2017.04.06 11:39수정 2019.06.26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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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에서 내려 돌다리 위를 걸어다니는 시민들. ⓒ 김종성


자전거를 타고 서울 한강가를 달리다보면 동네마다 연결돼 있는 한강다리를 지난다. 스무 개가 넘는 한강의 여러 다리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다리는 살곶이 다리(성동구 행당동 58)가 아닐까 싶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의 이 돌다리는 지금도 시민들에게 사용되고 있는 서울 최고(最古)의 다리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이 다리는 길이 76m, 폭 6m로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긴 다리였다. (현재는 보행로 설치로 서북쪽 일부분이 매몰되어 길이가 약 62.9m인 상태다.)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12월 보물 제1738호로 승격되었다. 난간이 없는 단순한 구조지만, 돌다리(장석판교, 長石板橋) 특유의 우직하고 질박한 정감이 느껴진다.


시민들이 애용하는 조선시대 가장 길었던 돌다리

살곶이는 '화살이 꽂힌' 자리라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살꽂이 다리였는데 어감이 거세서 살곶이로 부르게 됐다고. 얼마 전까지 살곶이 다리의 한자인 전곶교(箭串橋)로 표기되기도 했으나 다행히 순수 우리말로 돌아왔다.

길이 75m, 폭 6m으로 조선시대 가장 긴 다리였다. ⓒ 김종성


다리를 떠받치는 64개의 둔중하고 정감가는 돌기둥. ⓒ 김종성


구한말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으면서 다리 절반의 석재를 가져다 쓴 후 버려져 있다가, 1913년에는 일본인에 의해 상판에 콘크리트를 발라놓는 '보수'가 이루어졌다. 1925년 한 해에만 네 번의 물난리가 벌어졌던 악명 높은 을축년 대홍수 때 다리 일부가 유실되기도 했다.

1972년 서울시에서 훼손된 부분을 보수하면서 일제가 발라놓은 콘크리트를 제거하고 복원하였으나 원형 그대로 복구되지는 못했다. 행당동 쪽 다리 반쪽만 원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천의 변화로 폭이 넓어진 동쪽 부분에 27m 정도의 콘크리트 다리를 연장 증설했다. 현재 살곶이 다리는 동쪽으로 증설된 다리가 이어져 동서로 왕래가 가능하여 둔치를 찾는 인근 시민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살곶이 다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흐르는 강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꼴로 다듬은 둔중하고 정감 가는 64개의 돌기둥. 물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해 돌기둥에 무수한 흠집을 새겨 놓은 조상들의 친환경 지혜도 눈길을 끈다. 지나는 시민들도 돌다리가 다칠세라 자전거를 타고 함부로 달려 지나다니지 않고 꼭 내려서 걸어 건넌다.


세종 때 공사 시작해 성종 때 완공한 다리

다리 아래로 내려가면 살곶이 다리가 색다르게 다가온다. ⓒ 김종성


세종에서 성종 대까지 63년에 걸쳐 완공된 사연많은 돌다리. ⓒ 김종성


조선을 건립한 태조 이성계는 동방예의지국의 왕답게 중화 격식에 맞춰 무려 삼십년간 궁궐과 종묘를 짓는 일에만 집중했다. 백성들을 위한 길도 닦지 않고 여름이면 장마로 홍수가 나는 하천에 둑도 제방도 쌓지 않았다. 세종 때야 만들기 시작한 이 다리도 처음엔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에 만들기 시작했다. 1420년(세종 2년) 처음 짓기 시작한 살곶이 다리는 63년만인 1483년(성종 14년)에야 완공한다.

세종 즉위 후 태종은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즐겼는데, 강 건너 낙천정(樂天亭)과 풍양이궁(豊壤離宮)에 수시로 행차했다. 이때 강을 건너야 하는 수행 중신들의 고충이 심해지자, 태종은 다리공사를 명했다. 세종 2년(1420) 5월 태종은 영의정 유정현·박자청을 통해 돌다리 공사를 하게 했지만, 기술부족과 홍수 등으로 완공하지 못했다.

태종이 죽은 후 이곳을 통한 행차가 거의 없어지면서 다리는 짓다 말게 된다. 세종 3년부터 시작된 도성 안 개천·제방축조공사로 인해 도성 밖 이곳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길을 이용하는 백성들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마침내 성종 14년(1483년) 조선시대 가장 긴 다리가 완성된다.

조선 최고의 만물박사라 불리는 성현의 수필집 '용재총화'에는 다리가 평지를 밟는 것처럼 탄탄하다 하여 성종이 제반교(濟盤橋)라 명명하였다는 내력이 기록돼 있다. 제반교가 언제부터 살곶이 다리로 불렸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 고장 지명이 살곶이평(箭串坪)이라는 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 다리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동쪽의 광나루를 통해 나가면 강원도 강릉에 닿았고, 동남쪽으로는 송파에서 광주·이천을 거쳐 충주로 나갈 수 있었다. 남쪽으로는 성수동 한강변에 닿아 선정릉(성종과 중종의 능)과 헌인릉(태종과 순조의 능)으로 가는 왕의 배릉(拜陵)길이 되었다.

다리 이름이 된 '살곶이' 지명의 유래 

완공 당시 성종 임금은 다리가 평지처럼 탄탄하다 해서 '제반교'란 이름을 지었다. ⓒ 김종성


이 다리를 만들 때 태종이 몸소 현장에 나와 공사를 지휘했다고 한다. 한낱 다리 공사에 왕이 나선 까닭은 이 다리의 이름과 다리가 자리했던 곳의 지명에 '살곶이'가 들어가게 된 사연과 연관이 있다.

조선 초기인 1398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형제들을 죽이는 '왕자의 난'이 벌어졌다. 속이 상할 대로 상한 이성계는 함흥으로 떠나 은거하게 된다. 태종이 된 아들 이방원이 아버지를 달래기 위해 사자들을 보냈으나 모조리 죽여 버리고 말아 '함흥차사'라는 말을 만들기도 했다.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했을 때 이에 반발한 유생들이 개성 두문동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아 '두문불출'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결국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 태조 이성계를 맞으러 나온 태종이 있었던 곳이 살곶이 다리 자리다. 이성계는 분노를 가득 담아 화살 하나를 날렸지만 태종은 차양을 세우기 위해 세워둔 기둥 뒤로 숨어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이 화살이 떨어져 꽂인 곳을 '살꽂이벌(箭串坪)'이라 불렀다. 아버지와 아들간의 사연이 너무 극적이고 살벌해서였을까, 이 다리가 완공됐을 때 지어진 공식 명칭이었던 제반교(濟盤橋)에서 '살곶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찾아가기 : 서울 전철 2호선 한양대역 3번 출구로 나와 성동교 앞에서 왼쪽 한양대 후문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살곶이 다리가 보인다.
* 서울시 '내 손안에 서울'에도 송고했습니다.
#살곶이다리 #살꽂이벌 #제반교 #한강다리 #왕자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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