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메이크업하고..., '남자다움' 벗어던진 진짜 '나'

[노동당 여성위원회 '남성성들' ①] 나의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페미니즘'

등록 2017.04.22 16:24수정 2017.07.11 18:03
4
원고료로 응원
"언니~ 나도 아이스크림."

언니가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었다. 첫째 언니, 둘째 언니. 나에게 두 명의 언니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은 맞벌이를 했기 때문에 나는 연년생인 두 명의 언니와 항상 붙어 다녔다.

우리는 천방지축 삼남매였다. 먹을 거 안 남겼다고 삐지고, 서로 장난치다가 싸우고 울고 그랬지만 나는 언니들에게 의지를 많이 했었다. 왜냐하면 나는 겁이 많고 소심해서 무엇 하나 쉽게 하지 못했는데 그때마다 언니들이 해결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오랫동안 언니들이 나를 아들이라고 불렀다. 나는 언니들과 높은 유대관계를 형성하면서 유년기를 보냈다.

a

나의 어린 시절 ⓒ 김광원


그 당시 나는 둘째 언니가 첫째 언니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서 '언니'라고 불렀다. 언니는 나에게 당연하고 친숙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정성별 남성이어서 사회규범상 언니가 아닌 누나라고 불러야 했다. 그래서 당시 삼촌은 나에게 "언니라고 부르면 안 돼! 누나라고 불러야지", "너 계속 언니라고 부르면 고추 떨어진다"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언니라고 부르면 안돼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겁이 많아 도망치듯 언니들 옆에 꼭 붙어있었다. 나는 숨어가며 언니라고 계속 불렀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 '언니'라는 말을 혼자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니라고 말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 이후 언니에서 누나로 호칭을 바꾸었다. 당분간 자연스럽게 언니라고 말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언니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었을까?

"남자다움은 당연한 거지"

언니라는 말은 못했지만 언니들과의 시간은 계속됐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우리는 소꿉놀이, 화장하기, 봉숭아 물들이기, 요리하기, 춤추기 등을 하며 보냈다. 또한 누나들은 음악방송과 애니메이션을 자주 보았는데 나도 열심히 따라봤었다. 누나들의 취향과 취미가 나에게 영향을 주었고 비슷한 취미와 취향을 가지게 되었다. 다른 또래처럼 놀이터에서 뛰어놀거나 총싸움 같은 것을 안 한 건 아니지만 나는 내가 더 좋아하고 재밌는 것을 했었다. 소위 여성적인 문화라고 여겨지는 것을 나는 익숙하게 즐겼었다.


a

누나들과 환하게 웃고 있다 ⓒ 김광원


여기에 내향적이고 겁이 많은 성격이 더해져 나는 누구에게나 남자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부모님은 나를 태권도에 보내신 것 같다(한국남자의 필수코스 아닌가!). 태권도를 다니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이 있었다. 바로 겨루기였다. 내 소중한 친구들과 육체적인 싸움을 해서 이겨야 했었다. 이로 인해 서열은 자연스럽게 생겨났고,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도 좋지 않은 감정이 생겼었다. 이때부터 남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던 것 같다. 태권도장을 다니면서 남자는 강해야 하며 싸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익숙하게 학습되었다.

특히 '남중'이 정말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육체적인 체벌이 가능할 때여서 학교에서 툭하면 매로 맞았다. 쪽지시험을 쳐서 틀린 개수만큼 맞는 일은 기본이었고 지각했다고 맞고 준비물 안 가져왔다고 맞았다. 학교를 갈 때마다 '오늘은 매를 맞지 않기를' 하면서 갔던 기억이 난다. 자연스럽게 통제와 폭력에 익숙해졌다. 작은 정글 같았다. 학생간의 서열을 가리기 위한 약육강식의 싸움이 매일같이 일어났고 괴롭힘과 왕따를 당하는 학생을 봐야했다. 나는 그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조용히 지내기 그리고 착한사람이 되기였다. 서열의 아래를 자처하면서 남성의 질서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의 사회를 학습하였다. 남자다움이 당연한 곳에서 나는 남자답지 못해 고통받았다. 그렇게 청소년기를 보냈다.

페미니즘을 접한 뒤, 알게 된 '진짜 하고싶은 것'

나는 오래전부터 성찰과 반성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부족해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나를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으로 고쳐나갔다. 그중에 나의 남자답지 못한 부분을 가장 부족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고치려고 했었다. 그 과정은 언제나 나를 부정하고 혐오함으로써 이뤄졌다. 하지만 고쳐지지 않는 자아가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나는 개성있는 사람, 특이한 사람이라고 자기합리화를 하였다.

남자다움의 기준에 잘 맞지 않았던 나는 페미니즘을 알게 되고 그것이 나의 문제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남성성은 만들어진 것이고 이를 사회화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나를 억압하였던 틀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나에 대한 긍정이 생기면서 나 자신을 부정하거나 합리화하는 일을 그만할 수 있었고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것과 좋아했던 것을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화장은 페미니즘을 접하기 전부터 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누나들의 화장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고 전공분야와 관련이 있어 관심이 있었다. 화장품에 관심이 있는 것과 화장을 하는 것은 많이 다른데 나는 왠지 모르게 후자에 좀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화장을 하기 전엔 화장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한다는 편견이 있었다. 그리고 어렵지 않고 쉽게 할 수 있을 거라는 편견도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화장을 하기 시작한 뒤 화장품의 종류가 엄청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돈을 많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화장하는 건 엄청난 손기술과 시간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화장품과 화장하는 방법을 검색하고 공부까지 한 적이 있었다.

페미니즘을 접하게 전 화장은 대개 남자 연예인 화장법 혹은 자연스러운 남자화장법 등을 따른 것이었다. 외모를 잘 가꾸는 남자가 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페미니즘이 생각을 바꿔놓았다. 남에게 잘 보이는 것보다 내 스스로 느끼는 만족감이 더 중요했고,  화장한 내 모습이 정말 좋았다. 그러다보니 점점 화장이 진해졌고 다양한 화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거리를 거닐다 눈총을 자주 받았다. 그렇지만 나에게 해코지하거나 시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남성이어서 누리는 권력을 직접 느끼는 계기였다.

평상시 나와 화장 관련 이야기를 많이 한 페미니스트 동지가 있었다. 그 동지가 작년 퀴어문화축제(퀴어퍼레이드)에서 드래그 퀸(Drag queen, 옷차림, 행동 등을 통해 과장된 여성성을 연기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게이 남성이나 게이 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지만 게이 남성이 아닌 다른 성정체성을 가진 드래그 퀸들 역시 존재한다)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

a

퀴어문화축제에 나간 나의 모습. 진한 화장을 하고 나시 원피스를 입었다. ⓒ 김광원


남성이 '여성적'인 복장을 했을 때 어색해하고 희화화되는 상황을 많이 겪었을 것이다. 이는 이 사회에 존재하는 많은 이들이 마주하고 있는 편견과 차별과 혐오이다. 드래그 퀸을 통해서 많은 이들의 존재를 드러냄과 동시에 퀴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지우려고 하는 이들에 대한 저항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풀 세팅을 했다. 진한 화장을 하고 나시원피스를 입었다. 빨간 매니큐어는 아름다웠고 치마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그렇게 드래그 퀸 복장을 하고 지하철을 탔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사람들의 눈을 못 쳐다봤다. 겁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속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성별이분법에서 벗어나 나를 나답다고 느꼈고 떳떳하였기에 해방감이 들었다. 그 이후 일상생활 속에서도 성별이분법을 깨는 시도들을 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혐오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페미니즘이 '양날의 검'을 주었다

페미니즘을 접한 후 긍정적인 변화는 사실 많은 반성과 성찰 속에서 나왔다. 남성사회에서 적응하며 살아가던 나는 지난날의 잘못과 과오들을 반성해야 했다. 여성혐오적인 생각을 하며 남성 권력을 비판 없이 누렸고 성차별을 인지하지 못했다. 특히 여남관계를 연애관계로만 바라보고 지낸 적이 있었다. 남성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페미니즘을 통해 그릇된 사고를 인지했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자기부정을 불러일으켰다. 괴로움과 동시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문득 여기서 멈추면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나는 언제나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며 긴장감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아가 적극적으로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사회에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더욱더 열심히 페미니즘 도서를 읽었고 학내 여성혐오와 싸우기 위해 행동을 했다. 페미니즘은 내가 잘못했을 때 나에게 향하는 검이면서 차별하는 자를 향해 싸울 수 있는 검을 주었다. 즉 나에게 끊임없는 성찰과 반성을 요구함과 동시에 만연한 성차별과 여성혐오에 싸우게끔 하였다.

나의 페미니즘은 현재진행형

a

지난해 퀴어문화축제에서 드래그 퀸(Drag queen) 복장을 했다 ⓒ 김광원


페미니즘 모임과 활동 등을 하면서 자주 접하는 질문이 있다. '당신에게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요?'이다. 매번 대답하기 어렵지만 항상 말하는 내용이 있다. 시혜적이고 학술적인 접근이 아닌 '나를 위해' 페미니즘을 한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나에 대한 긍정을 주고 나다운 것을 찾게 해주었다'라고 말한다. 동시에 아직 나는 많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많은 책을 읽은 것도 아니고 페미니즘을 접한 지 오래된 것도 아니지만 나는 계속 나아가고 싶다.

내가 고민하고 성찰했던 것을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고, 주변 동지 혹은 친구들에게 페미니즘을 공부하자고 하고 싶다. 페미니즘이 평등의 가치로 나아가게 할 것이며 평등한 공동체와 평등한 사회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엔 싸우고 바꿔야 할 것들이 많다. 특히 내 안에서의 투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있는 공동체에서의 평등을 위한 싸움 역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의 페미니즘은 현재진행형이다.
덧붙이는 글 글을 쓴 김광원씨는 대학에서 페미니즘 모임을 하고있으며, 페이스북 페이지 '성균관대 페미수다,성대워치'를 운영하고 있는 노동당원으로 이 글을 통해 노동당 여성위원회가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하는 남성 당원들과 함께 시작한 '남성성들: 남성 페미니스트 글쓰기 연재'에 참여합니다. '남성성들: 남성 페미니스트 글쓰기 연재'는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하는 남성 노동당원들이, 노동당 여성위원회와 시작한 글쓰기 시리즈입니다. 여기에서 '남성성'이란 R.W.코넬의 저작 <남성성/들>에서 인용한 것으로, 하나의 '남성성'이 존재한다기보다 만들어지고, 수행되는 개념으로서 한국사회의 남성성이 어떻게 실천되고 유지되는가를 성찰적으로 나누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노동당여성위원회 #남성성들 #페미수다 #페미니즘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3. 3 "총선 지면 대통령 퇴진" 김대중, 지니까 말 달라졌다
  4. 4 민주당은 앞으로 꽃길? 서울에서 포착된 '이상 징후'
  5. 5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