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방

분노에 휩싸여있을 박 전 대통령에게

[박 전 대통령이 독방에서 읽어볼 책] 애도 심리 에세이 김형경 <좋은 이별>

등록 2017.04.18 11:15수정 2017.04.1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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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되었습니다. 정치인 박근혜는 책을 즐겨 읽었다고 합니다. 여름휴가를 독서휴가라 할 정도로, 책을 가까이에 두고 '보고 또 봤다'고 합니다. 남는 게 시간인 독방, 책읽기에 최적의 시간입니다. 시민기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이 독방에서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을 추천합니다. [편집자말]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출구조사에선 분명히 내가 지지한 후보가 앞섰다. 그런데 개표를 시작하자 상대후보에게 점점 밀리기 시작하더니 자정이 가까워지면서 두 후보의 표차는 더 벌어졌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더 지켜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차마 '당선'이라는 두 글자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끄고 돌아누웠다. 잠시 이민을 생각했다. '딱 5년만 외국에서 살다 올까?' 왜 내겐 해외에 사는 친척이 한 명도 없는 건지, 괜한 원망도 했다. 2012년 12월 19일 밤은 정말 암흑이었다.

나는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독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친 끝에 겨우 얻어낸 민주주의가 아닌가. MB에게 5년 동안 눈뜨고 사기를 당한 것도 억울한데 '독재자의 딸'을 다시 대통령이라 불러야 하다니,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어쩌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그의 웃는 낯을 볼 때면 저절로 얼굴이 반대편으로 획 돌아갔다. 한동안 뉴스를 보지도, 듣지도 않았다.

그에게 표를 던진 이들에게 화가 났다. 한동안 무기력하게 지냈다. 세월호 사건 이후 분노와 무력감은 나를 압도할 만큼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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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좋은 이별> ⓒ 사람풍경

내 감정은 전혀 이상한 것도, 과도한 것도 아니다. 분노나 무기력은 상실에 의한 것이었고, 나는 애도 과정을 밟는 중이었다. 애도는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을 때 사로잡히게 되는 감정이다. 2012년 대선 때 나는 '나의 대통령'을 두 번째로 잃었다(첫 번째는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김형경의 <좋은 이별>(사람풍경)은 누구나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상실과 애도에 관한 심리에세이이다.

책에 의하면, 소중한 것을 상실한 사람은 다양한 범주의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애도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감정에는 단계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엘리자 퀴블러 로스가 제안한 '분노, 부정, 타협, 우울, 수용' 그리고 그랜저 웨스트의 '감정의 10단계'인 '충격, 감정의 표현, 절망과 외로움, 육체적 불쾌감, 공포, 죄책감, 분노와 적개심, 저항, 희망, 현실 긍정' 등이 있다. 이 감정들은 순서대로 올 수도 있고, 두세 가지 감정을 한 번에 느끼기도 한다.

나는 애도의 마지막 단계까지 밟지 못했다. 여전히 분노와 적개심이 불쑥불쑥 일었다. 그런데 얼마 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졌고,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되었다. 들끓던 분노와 같은 어려운 감정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기나긴 애도 과정은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안타깝게도, 이제 상실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몫으로 넘어갔다. 그는 권력을 잃었다. 권력을 중심으로 모였던 사람도 모두 사라졌다. 주문만 외면 금은보화가 쏟아지던 마법 같은 세계도 일순간 정지되었다. 돌아갈 곳도 없다. 애도의 과정을 이번엔 그가 겪을 차례다. 아마 지금도 그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전혀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하다.

"예상치 못한 상실로 충격을 받을 때 몸과 마음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다. 재빨리 감정과 감각을 마비시켜 충격이 몸과 마음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흔히 헤어지자는 연인의 말에 "그게 무슨 말이지?"라고 반문하면서 이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언어는 알아들어도 그 언어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다. 생각도 멎고, 감각도 멎고, 동작도 멎는다." (53쪽)

상실을 인정하지 못할 때,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헤어진 연인이 다시 돌아오길 기대하거나, 떠난 가족의 흔적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경우다. 저자는 상실을 부정하는 태도는 현실을 바로 보는 눈을 잃게 만든다는 점에서 나쁜 태도라 꼬집는다.

"상실을 부정하면서 떠나보내지 못한 것들은 마음의 지하 창고에서 악취를 풍기며 지금 이곳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노모가 세상을 뜬 후 처마 밑에 날아든 새를 어머니의 귀환으로 여기고 새에게 경배하는 사람도 있고, 아버지가 사망한 후 집으로 들어온 강아지를 돌아가신 아버지라 여기며 극진히 대하는 사람도 있다. (중략) 현실을 바로 보는 눈이 없어지기 때문에 진짜로 새를 어머니로, 강아지를 아버지로 믿게 되는 것이다."(66쪽)

그는 지금도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정말로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고 굳게 믿는 듯하다. 부인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삶의 문제도 깊어진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어서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애써 현실을 조금씩 깨닫게 되는 순간, 그는 분노에 휩싸일지 모른다. 소중한 것을 잃으면 가장 먼저 치솟는 감정이 분노이기 때문이다. 상실에 의한 분노는 유아적인 태도에서 비롯된다. 아기들은 자기에게 편안한 것은 좋은 것이고, 불만스럽고 불편한 것은 나쁜 것으로 이해한다.

"원하는 사랑을 주지 않고, 필요한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에게 화를 내고 신(神)을 공격하는 것은 상실의 순간 우리가 잠시 유아기로 퇴행하기 때문이다. 퇴행하여 무의식에 있는 그 시절의 상실감을 다시 경험하기 때문이다." (73쪽)

상대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 역시 분노의 결과이다. 저자는 이 모든 분노의 감정을 세밀하게, 정서적으로 충분히 경험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때 분노를 남에게 쏟아 붓는 것은 금물이다. 물건을 발로 차거나 샌드백을 두드리는 등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도 좋지 않다. 가장 좋은 것은 글이나 언어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저자는 일기장에 화난 마음을 써내려가거나, 가까운 친구를 붙잡고 속 시원하게 수다를 떨거나, 땀 흘려 운동하기, 소리 높여 노래하고 정신없이 춤추기 등을 권한다. 이 중에서 과연 그가 몇 가지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택하면 된다.

공포나 불안이 따라올지도 모른다. 주변 사람이 모두 적으로 보이고, 세상이 자신을 미워하고 적대적으로 대한다고 느낄 것이다. 물론 일부는 사실일 수도 있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 자신의 온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는 않는다. 지나친 생각이다.

때론 더 이상 살 의미가 없다고 느낄 것이고, 때론 수백 벌의 옷을 갈아입으며 공주처럼 지내던 지난날이 한없이 그리워질 것이다. 자신이 이뤄냈거나, 미처 이루지 못한 모든 정책들이 아름답게 미화되어 가슴을 더 아프게 때릴 것이다. 도망가고 싶지만 구치소의 담벼락은 너무 높다.

이 모든 생각과 감정이 지극히 정상적인 애도의 과정이다. 핵심은 직면이다. 직면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그렇다고 피한다면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또 다른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 저자는 힘겹고 기나긴 애도 과정을 겪어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100가지 현실적인 방안을 매 장 소개해 놓았다. 다행히 좁은 공간에서도 가능한 것들이다. 돈도 많이 들지 않고, 혼자서도 충분하다. 이를 참고해 무사히 애도 과정을 치르고 나면, 혹시 아는가? 갱생할지.

그러고 보니, 이 책이 필요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조윤선 전 문화부장관도 자신들이 이런 고난과 상실을 겪으리라곤 상상이나 했을까? 얼마나 황당하고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의 책임이 가장 크니 그가 먼저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좋은 거 혼자만 읽지 말고 좀 돌려보길 바란다. 어쩐지 이 책이 '구치소가 선정한 올해의 책'이 될 거란 예감이 진하게 든다.
덧붙이는 글 <좋은 이별> / 김형경 / 사람풍경 / 2012.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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