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겨털' 기르는 여자입니다

여성의 몸에 부과되는 차별과 억압에서 벗어나자... 나의 털들아, 고개를 들어라

등록 2017.04.19 10:10수정 2017.04.22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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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2일 오후 9시 25분]

"야 너 그거 알아? 겨털은 암내나는 사람한테만 난대."

중학교 2학년 때 한 친구가 나에게 농담을 했었다. 세상에... 나는 그 말을 듣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마치 내가 암내가 나는 것을 들켰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 그래서 나만 겨드랑이에 털이 나는건가?' 하는 생각도 했다.

나는 워낙 몸에 땀이 많이 나서 땀냄새도 많이 나는 편이었고 초등학교 때부터 겨드랑이에서 땀냄새가 나는 것이 신경쓰였었다. 그리고 겨드랑이 땀냄새를 '암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얼마 안 되었다. 친구가 나에게 그런 장난을 칠 당시 나는 겨드랑이 털이 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다. 조금 지나고 그 친구가 "사실 뻥친 건데 너 찔렸지?"라고 이야기해서 그제야 나만 겨드랑이 털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었다.

겨드랑이에 털이 자란 이후로 나도 모르게 같은 반 친구들의 교복 반팔소매 사이로 겨드랑이 털이 보이거나 체육시간에 체육복을 갈아입다가 우연히 겨드랑이 털을 보게 되면 흠칫 놀랐다. 털이 있는 여성의 겨드랑이에 가지는 놀라움이었을까? 게다가 겨드랑이가 보이는 위치에서는 나도 모르게 시선이 자꾸 겨드랑이 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겨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겨드랑이를 보면 나는 '왜 관리를 소홀히 할까?' '지저분해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난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왜 남들의 겨드랑이에 털이 있는지 없는지 나도 모르게 확인하게 되는 것일까? 특히 여성들의 겨드랑이를 말이다.

여자는 왜 겨드랑이 털을 밀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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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기 ⓒ sxc


제모를 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겨드랑이와 다리에 나는 털을 면도하기 시작했다. 제모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배우지 못했지만 그냥 집 화장실 칫솔꽂이에 꽂혀 있는 면도기를 슥삭슥삭 처음으로 사용해 보았던 것 같다. 면도기 TV광고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면 면도를 할 때 크림같은 것을 발라야 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크림의 이름이 뭐고 왜 바르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에 대충 내가 아는 크림(?)인 비누거품을 묻혔다(광고에 나오는 그 크림이 면도 전용 크림이라는 것은 정말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20대가 된 이후에는 레이저 제모시술을 하는 피부과를 검색해서 레이저 제모를 한 번 받기도 했었다. 다섯 번이나 병원을 찾아가서 겨드랑이 털을 레이저로 지져버려야 털이 더 나지 않지만 나는 첫 번째만 가고 다음 네 번은 귀찮아서 안 가버리고 말았다. 누가 하라고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귀찮기까지 한 제모를 나는 왜 시작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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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와이스의 'OOH-AHH하게' 뮤직비디오. 겨드랑이 털이 없다. ⓒ jypentertainment


요즘 인기있는 걸그룹 중 트와이스가 있다. 트와이스의 예쁘고 깜찍한 뮤직비디오에 혹은 방송에서 트와이스 멤버들이 안무를 하는 중에 겨드랑이 털이 풍성한 것이 카메라에 잡힌다면 어떨까?

아마 엄청난 충격과 공포가 아닐까? 미디어에 나오는 여성들은 머리카락과 눈썹을 제외하면 모든 털들이 말끔하게 제모된(혹은 나지 않은) 소녀들이다. 여성들은 암묵적으로 머리카락은 길게, 머리카락을 제외한 다른 털들은 보이지 않게 가려오며 또는 없애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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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레드벨벳의 뮤직비디오. 아무도 겨드랑이에 털이 없다 ⓒ SMTOWN


아직도 한국 사람들은 여성의 겨드랑이 털을 보고 '웃기다' '더럽다' '관리소홀'을 떠올린다. 그래서인지 여성 스스로가 겨드랑이 털을 남에게 보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간주되어 왔다. 종종 여성의 겨털은 유머코드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러브픽션>이라는 영화에서는 겨드랑이 털을 깎지 않아 풍성한 털을 가지고 있는 공효진과 이에 놀라는 하정우가 나온다. 그리고 영화 내내 여성의 겨드랑이 털에 대한 남성들의 언급과 충격은 계속된다.

아마 여성들 각자가 경험한 이야기들은 더 많을 것이다. 민소매를 입고 소개팅에 나갔다가 겨드랑이 제모를 하지 않은 것이 생각나서 팔을 옆구리에 딱 붙인 채 소개팅을 치렀다는(?) 친구의 이야기로부터, 겨드랑이 털을 깎다가 면도날에 살이 베어서 피가 났던 나의 경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강력하게 주장해서 겨드랑이 제모시술을 받고 너무 아파서 한동안 팔을 내릴 수 없었다는 지인의 이야기까지 여성의 겨드랑이 털에 관련한 에피소드는 너무나 많다.

'겨털' 사진 올렸다고, 모욕 댓글에 살해 협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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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7일 까칠남녀 첫 회, '공주도 털이 있다'에 출연한 필자 겨털을 기르는 당사자 여성으로 출연했다. 이 자리에서는 털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다시보기는 EBS 사이트에서! ⓒ EBS1 까칠남녀


나는 최근 SNS상의 뜨거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젠더토크쇼 <까칠남녀>에서 연락을 받았었다. <까칠남녀> 첫 화에 무려 겨드랑이 털을 기르는 여성 당사자로 출연해줄 수 있느냐는 부탁이었다. 나에게 연락한 작가는 처음에 촬영장에 민소매 옷을 입고 와서 겨드랑이 털을 직접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지난해 6월 '천하제일겨털대회'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사이트에 겨털을 드러낸 여성들의 사진이 올라가고 외모비하, 살해협박, 모욕성 댓글들이 줄줄이 달리는 것을 목격했던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지상파에 출연해서 겨드랑이를 직접 드러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결국 이런 우려들을 표하고 사진으로 대체하기로 했는데 겨털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겨드랑이 털을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그들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심한 욕설을 마주해야만 하는 현실이 참 씁쓸했다. 어떻게든 여성들이 사회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미적 기준에 자신을 끼워맞추기를 바라는 것은 여성들이 스스로의 몸을 미워하도록 만든다.

한국사회에서 제모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그 여성이 '어떤 여성인가'를 규정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아마도 수많은 매체가 여성의 털에 대해 편견을 강화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제모를 하는, 그래서 자신의 외모를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관리하는 여성은 '깔끔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다. 반대로 겨털이 자라도록 혹은 눈에 보이도록 자랄 때까지 다음 제모를 하지 않는 여성은 어디에 신경이 빠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하는 '게으른' 여성이 된다.  이렇게 그 여성이 어떤 사람인지를 쉽게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이 바로 양쪽 겨드랑이에 있으니, 당연히 시선이 가게 되는 것 아닐까?

하지만 털 없이 미끌미끌한 몸이 '아름다운' 몸으로 간주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간혹 털이 잘 안 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아예 털이 없는 몸을 보편적인 '여성성'의 상징이라고 여겨버리면 곤란해진다.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가지고 있지 않은 허상의 보편을 향해 모두가 달려가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털에 집착하는 것이 털이 아직 나지 않은 어린이의 모습을 여성들에게 강요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를 성적 대상화하고 어린이같은 모습에 성적으로 끌리는 것을 '소아성애'라고 한다. 여성에게 털이 없는 모습을 선호하는 사회 분위기가 결국에 우리 사회 전반의 소아성애화의 한 단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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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천하제일겨털대회 웹자보 누가 더 당당하게 겨털을 드러내나? ⓒ 불꽃페미액션


희망적인 것은 제모가 선택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움직임들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2014년에 '이것또시위'라는 캠페인이 벌어져서 여성들의 몸에 가해지는 여러 가지 억압들에 맞서는 시위를 했다. 인스타그램에서 #hairylegsclub을 검색하면 털이 부숭부숭 나 있는 다리가 새겨진 뱃지와 티셔츠와 제모하지 않은 다리 사진들이 나오기도 한다.

2015년에는 중국에서 겨드랑이 털 대회가 열려서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겨드랑이 털을 셀카로 찍어서 온라인에 게시했다. 2016년에는 불꽃페미액션에서 '천하제일겨털대회'를 열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을 받기도 했었다.

겨털을 깎는 것은, 그래서 내가 털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매우 귀찮고 신경쓰이는 일이다. 이제 '이렇게 저렇게 보여야 한다'는 마음 속의 목소리를 멈춰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에게도 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자유로운 몸으로서 나 자신을 사랑하자. 누가 조롱하건 욕을 하건 그 사람이 뒤처지도록 내버려두자. 우리에게는 우리와 함께할 자매들이 있다.

불꽃페미액션과 여성의 몸을 자유롭게 만드는 정치적 실천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여성의 몸에 부과되는 차별과 혐오, 억압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나 자신과 가족, 친구, 주변 사람들 그리고 사회와 제도를 상상해보자. 그리고 작은 실천으로 지금부터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지 않고 올해 7월에 열리는 퀴어퍼레이드에서 제2회 천하제일겨털대회에 참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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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겨털대회 불꽃페미액션은 작년 6월 11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에서 천하제일겨털대회를 주최했다. ⓒ 불꽃페미액션


덧붙이는 글 이가현 시민기자는 '불꽃페미액션'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7년 3월 8일 성공회대 여성의날 캠페인에 불꽃페미액션이 붙였던 대자보를 수정보완한 글입니다.
#페미니즘 #겨드랑이 #겨털 #천하제일겨털대회 #까칠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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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운동하는 불꽃페미액션 활동가입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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