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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 초기 역사를 알게 되다

[이란 역사문화기행 18] 알리 이븐 함제 영묘

등록 2017.04.19 15:48수정 2017.04.19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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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라즈 최고의 종교적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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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이븐 함제 영묘 돔 ⓒ 이상기


카림 한 궁전을 나온 우리 일행은 쉬라즈에서 가장 신성한 곳, 알리 이븐 함제 영묘를 찾아간다. 이번에도 또 다시 코쉬크강을 건넌다. 알리 이븐 함제 영묘는 코쉬크강 바로 북쪽에 있어, 다리를 건너며 그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영묘 북쪽 아미르 아비즈(Amir Abiz) 거리에서 차를 내린 우리는 서쪽 허페즈 거리를 통해 알리 이븐 함제 영묘로 들어간다.

영묘 역시 사각형 건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 한 가운데 돔 형태의 묘당이 있다. 그리고 돔 양쪽으로 두 개의 미나레트가 있다. 묘당 앞 정원에는 역시 네모난 수조가 있고 주변에 야자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정원이 있다. 그런데 이곳의 수조는 비교적 작으며, 묘당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몸을 깨끗이 씻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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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이븐 함제 영묘 돔과 미나레트 ⓒ 이상기


이곳에서도 역시 여자들이 차도르를 착용해야 되어서 우리는 잠시 기다리며 정원을 살펴본다. 정원에는 이란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의례를 이곳 영묘에서 치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표정이 즐거운 것으로 보아 결혼식 피로연을 하는 것 같다. 나는 묘당 안으로 들어가기 전 사방 건물을 살펴본다. 돔과 미나레트가 잘 어울린다.

알리 이븐 함제 영묘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0세기로 알려져 있다. 그는 806년 메디나에서 태어나 835년 쉬라즈에서 죽었으니 그가 죽은 지 한 세기쯤 지난 다음이다. 그 후 여러 번 증축과 개축을 거쳤으나 기록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지진으로 영묘가 파괴된 후 다시 지은 것이다. 이 건물의 특징은 푸른색의 돔, 갈색의 미나레트, 거울로 치장된 묘당 내부, 스테인드글라스다.

쉬라즈에는 유명한 이맘자데 영묘가 두 개 있다. 하나가 이곳의 알리 이븐 함제 영묘고, 다른 하나가 샤 세라그(Shah Cheragh) 영묘다. 샤 세라그는 시아파 8대 이맘인 레자의 형제 묘당이다. 샤 세라그 영묘를 이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면, 알리 이븐 함제 영묘는 상대적으로 외국인이 많이 찾는다. 그것은 알리 이븐 함제 영묘가 개방적이고, 사진도 마음대로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묘당 안은 어떻게 생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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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이븐 함제 묘당 ⓒ 이상기


묘당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정육면체 관이 모셔져 있다. 이 관은 창살 형태로 되어 있어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창살을 만지거나 관 앞에 엎드려 기도를 한다. 관위에는 사방으로 꽃 장식을 했고, 관의 사방 꼭지점에 유리 화병을 설치한 다음 꽃을 꽂았다. 성인에게 바치는 예의처럼 보인다.

그리고 묘당 안은 유리로 치장해 밝고 화려하다. 유리의 색은 흰색과 초록색이 섞여 있다. 유리로 된 벽과 천정으로는 작은 창문을 설치해 햇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었다. 유리라는 것이 빛을 만나야 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유리로 만든 방은 궁전과 영묘 등 높고 귀한 건축물에서 주로 볼 수 있다. 묘당을 감싸고 있는 방에는 창문을 스테인드글라스로 화려하게 치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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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성직자 ⓒ 이상기


그리고 이들 방바닥에는 카펫을 깔아 기도도 하고 쉴 수도 있게 만들었다. 카펫은 궁전처럼 화려하지 않고, 기하학적 무늬로 이루어져 소박한 느낌이 들었다. 묘당 안에 시계가 있는데 오후 5시다. 우리는 묘당을 천천히 한 바퀴 둘러보고는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는 인근 사무실로 가 물라로부터 이슬람교와 시아파 그리고 이슬람교 성인의 영묘에 대해 설명을 듣는다.

이슬람교 초기 칼리프 선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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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으로 알려진 예루살렘 바위돔 사원 ⓒ 이상기


이슬람교는 알라(Allah)를 믿고 복종하는 종교다. 이슬람 교도들은 알라께 영광을, 알라를 믿고 올바른 행동을 하는 자신들에게는 평화(Salam)를 기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슬람교도는 평화의 사도다. 알라의 가르침이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함마드에 의해 이 세상에 전해졌고, 그 속에서 평화와 행복이 이룩된다고 믿는다. 이슬람 경전<꾸란>에는 이 평화라는 단어가 43번이나 반복된다.

이슬람교도들은 알라의 자비와 은혜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 그들이 알라의 은혜를 받아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의무 즉 아르칸(Arkan)을 지켜야 한다. 이들이 샤하다(Shahada: 신앙고백), 나마즈(Namaz: 하루 다섯 번 기도), 자카트(Zakat: 헌금 또는 보시), 루제(Ruzeh: 라마단 지키기), 하지(Hajj: 성지순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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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란의 한 구절: 신자들이여!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올바른 말만 하여라. ⓒ 이상기


이슬람교는 크게 두 개의 종파로 나누어진다. 하나가 수니파(Sunnism)고 다른 하나가 시아파(Shiism)이다. 이들 종파는 무함마드의 후계문제 때문에 둘로 갈라졌다. 632년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나자 이슬람교를 이끌 후계자를 선출했다. 이때 무함마드의 장인인 아부 바크르(Abu Bakr)와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립(Ali Ibn Abi Talib)이 올바른 지도자라는 뜻을 가진 칼리프(Caliph)를 놓고 경쟁을 했다.

이때 알리는 무함마드가 자신을 칼리프로 지명했다고 주장했으나, 무함마드의 친구인 우마르(Umar ibn Al-Khattab) 등 다수가 아부 바크르를 지지했다. 그 결과 아부 바크르가 초대 칼리프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아부 바크르는 634년 세상을 떠난다. 이어서 2대 칼리프에 우마르가 추대된다. 그는 정치력과 군사력을 발휘해 644년까지 10년간 이슬람제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사산제국을 멸망시키고, 동로마제국의 2/3를 차지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포로에 의해 살해되는 불행을 겪는다. 그리고 6명으로 구성된 슈라(Shura: 중요한 문제를 토론과 협의를 통해 결정하는 위원회)에서 3대 칼리프를 결정하기로 한다. 먼저 탈라(Talhah ibn Ubaydullah)가 슈라에 참석하지 않는다. 그리고 압두르 라만(Abdur Rahman)이 칼리프를 포기하고 중재자로 나서 회의를 진행한다.

먼저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에게 누가 칼리프로 선출되어야 하는지 묻는다. 그러자 알리는 대답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무함마드의 친구인 우스만(Uthman Ibn Affan)에게 묻자 그는 알리가 좋겠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주바이르(Zubayr ibn al-Awam)는 알리든 우스만이든 상관없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사드(Sa`d ibn Abi Waqqas)에게 묻자, 그는 우스만을 선택한다. 결국 3대 카리프는 우스만이 된다.

우스만은 꾸란 정본을 만드는 작업에 나서 출처가 의심스러운 외경을 없애고 653년 정본을 완성해 반포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측근을 요직에 기용하고 메카의 엘리트를 기반으로 정치를 한다. 이것이 메디나 출신에게는 불만으로 작용했고, 라이벌인 알리와 무함마드의 부인이자 아부 바크르의 딸인 아이샤(Aisha)도 우스만의 통치에 반대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주바이르도 우스만에게 등을 돌렸다. 656년 우스만은 결국 군인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슬람교에 두 종파가 생기게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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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칼리프이자 초대 이맘인 알리 이븐 탈립 묘당 ⓒ 이상기


우스만의 죽음으로 4대 칼리프에 알리가 추대되었다. 이로써 이슬람교의 지배권은 무함마드 가문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알리는 우스만의 암살자들을 처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부 지방의 총독을 해고하고 자신의 사람을 임명한다. 그는 또한 수도를 메디나에서 유프라테스 강변의 쿠파(Kufah)로 옮긴다. 그는 현재 이라크 지역을 중심으로 지지기반을 넓혀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샤, 탈라, 주바이르가 알리의 정책에 반대했고, 657년 시리아 총독인 무아위야(Muawiyah Ibn Abi Sufyan) 군대는 시핀(Siffin) 전투에서 알리 군대와 내전을 벌였다. 3일간의 전투 후 알리는 무아위야에게 칼리프 승계권을 주는 협정을 체결한다. 이로 인해 알리의 칼리프로서의 권위가 실추되었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하리지(al-Khariji)를 결성했다.

하리지는 '떠난 또는 탈퇴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알리의 군대에 의해 붙여진 부정적 이름이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아슈라(ash-Shurah)라고 불렀다. 아슈라는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칼리프 선택권이 오로지 알라에게만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알리와 무아위야가 맺은 협정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지도자(Imam)가 죄를 범하면 그에 반대하고 그를 폐위시키는 것이 무슬림의 의무라는 것이다.

661년 1월 하리지의 지도자 압달 라만(Abd-al-Rahman)이 4대 칼리프이자 초대 이맘인 알리를 암살한다. 그러나 압달 라만도 알리의 아들 하산 이븐 알리(Hasan ibn Ali)에 잡혀 참수된다. 그리고 하산이 우마(Ummah: 공동체)에서 5대 칼리프로 선출된다. 그는 쿠파의 대 마스지드에서 취임연설을 한다. 그는 연설에서 자신이 선지자 무함마드의 후손임을 강조하고,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무아위야는 하산의 칼리프 취임을 비난하며, 그와 싸울 것을 선언한다. 무아위야는 무함마드 가문의 탁월성을 인정하지만, 모든 면에서 자신의 능력이 하산보다 더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한다. 통치경험도 많고 정치도 잘하고 나이도 많기 때문에, 자신이 하산보다 먼저 칼리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에 동의하면 다음 칼리프를 하산이 계승할 수 있게 하겠다고 말한다.

하산은 처음 이 제안을 거절한다. 그러나 무아위야가 군대를 이끌고 티그리스강 상류인 모술까지 쳐들어오자 그는 무아위야와 협상을 한다. 661년 8월 협정을 체결하는데, 그곳에서 무아위야는 하산을 그의 후계자로 약속한다. 그리고 하산이 원하는 조건을 들어준다. 하산은 이 협정에 따라 칼리프로서 무슬림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무아위야에게 넘겨준다. 하산이 칼리프로 자리를 유지한 건 7개월에 불과하다.

하산은 그 후 메디나로 가서 정치적인 문제를 멀리하고 살아간다. 무아위야는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해서 우마이야 칼리프(Umayyad Caliphate)시대를 연다. 하산은 무아위야의 초대로 가끔 다마스쿠스를 방문했지만, 더 이상 무아위야 편에 서지는 않았다. 시아파 지도자들이 하산을 찾아와 그들의 지도자(Immam)가 되어줄 것을 원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시아파에서는 그를 2대 이맘으로 추대한다. 그는 669년 세상을 떠났으며, 독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무아위야가 후임 칼리프를 하산이 아닌 자신의 아들 야지드(Yazid)에게 물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아위야는 하산보다 20살이나 많아 자신이 죽은 후 하산에게 칼리프가 넘어갈 것을 두려워했다. 680년 무아위야가 세상을 떠나고 야지드가 칼리프로 지명되자, 메디나에서 이에 반대하는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투쟁에 앞장선 사람이 후세인(Hossein ibn Ali)과 알라 주바이르(Abd Allah Ibn Zubayr)였다. 후세인은 하산의 동생이고, 주바이르는 6명으로 구성된 슈라의 일원이던 주바이르 아왐의 아들이다.
         
시아파 이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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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발라 전투도 ⓒ 이상기


후세인은 메디나를 떠나 메카로 가서 주바이르와 함께 야지드 정권과 투쟁을 벌인다. 그리고 알리와 하산의 통치거점이던 쿠파에 사는 사람들도 우마이야 칼리프에 반대하는 투쟁에 동참한다. 그러자 야지드가 우바이드 지야드(Ubayd Allah ibn Ziyad)를 쿠파 총독으로 임명해 이들을 탄압한다. 마침내 후세인은 쿠파로 향하고, 도중에 우마르 이븐 사드(Umar Ibn Saad)가 이끄는 지야드 군대와 만나게 된다. 후세인 일행은 쿠파에 가지 못하고 카르발라(Karbala)에 머문다.

우마르가 이끄는 지야드 군대는 후세인 일행이 유프라테스강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다. 그리고 680년 10월 10일 우마르 군대는 카르발라에서 후세인 일행을 공격해 그들 대부분을 죽인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카르발라 전투라고 부른다. 후세인의 몸은 카르발라에 묻혔고, 머리는 다마스쿠스로 이송되어 우마이야 모스크에 묻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세인은 불명예스럽게 사는 것보다는 명예롭게 죽는 길을 택한 것이다.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은 10월 10일을 아슈라(Ashura)로 정해 그 역사적 의미를 기린다. 그리고 "매일이 아슈라고 모든 곳이 카르발라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것은 10월 10일 카르발라에서 후세인이 죽은 사실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시아파 무슬림은 후세인을 3대 이맘으로 존경한다. 특히 후세인은 이란에 살고 있는 시아파 무슬림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다행히 후세인의 아들 알리 후세인(Ali ibn Hossein)은 다마스쿠스를 거쳐 메디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평생 격리된 된 채로 종교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4대 이맘으로 추대되지만, 굴복한 자(Sajjad)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알리 후세인의 아들이 무함마드 이븐 알리(Muhammad Ibn Ali)로 5대 이맘이 된다. 그의 다른 이름은 바게르(Baqer)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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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이맘 레자 묘당 ⓒ 이상기


바게르의 아들이 6대 이맘으로 자파르(Jafar Ibn Muhammad)다. 그의 다른 이름은 사덱(Sadeq)이다. 사덱의 아들이 7대 이맘으로 무사(Musa ibn Jafar)다. 무사의 다른 이름이 카젬(Kazem)이다. 카젬의 아들이 8대 이맘으로 알리 이븐 무사(Ali Ibn Musa)다. 그의 다른 이름이 레자(Reza)다. 레자의 무덤이 이란의 마슈하드(Mashhad)에 있으며, 그 때문에 마슈하드가 이란 최고의 무슬림 성지가 되었다.

이맘 레자의 아들이 9대 이맘 무함마드(Muhammad Ibn Ali)이다. 그의 다른 이름이 자바드(Javad)다. 자바드의 아들이 10대 이맘 알리 이븐 무함마드(Ali Ibn Muhammad)이고, 그의 다른 이름이 하디(Hadi)다. 하디의 아들이 11대 이맘 하산 이븐 알리(Hasan Ibn Ali)다. 그의 다른 이름이 아스카리(Askari)다. 아스카리의 아들이 무함마드 알 마디(Muhammad al-Mahdi)다.

그는 시아파 전통에 따라 12대 이맘이 되어야 하나, 5살 때인 874년 불가사의하게도 사라졌다. 시아파 무슬림은 마디가 결코 죽지 않고, 언젠가 구세주로 이 세상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알라의 명을 받아 이 세상에 나타나 거짓과 폭력을 물리치고 정의와 평화를 실현할 것이다. 그의 이름에 붙은 마디는 '알라의 인도를 받은'이라는 뜻이다.

마디를 구세주로 생각하는 믿음은 시아파 무슬림으로 하여금 어려운 시대상황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정의와 평화는 그렇게 쉽게 실현되지 않았다. 마디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이맘의 계보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선지자 무함마드로부터 이어진 성가정(Sacred Family)이 마디에게서 끝났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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