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소녀상, 그대로 두어라

[세계일주 인문기행 - 아홉 번째 편지] 미국 서부와 동부의 대도시에서

등록 2017.04.19 09:54수정 2017.04.1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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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신영복의 세계여행)을 처음 접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문명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따뜻한 글과 그림 엽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그 감동으로 막연하게 세계일주에 대한 꿈도 품게 됐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2017년, 배낭여행자가 되어 그 꿈을 실행에 옮깁니다. 당신이 보낸 첫 번째 엽서에 적혀있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에 무모한 용기를 얻어 여행지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이 여행기는 당신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당신들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기자 말

익숙했습니다.


미국 서부와 동부의 주요 대도시들은 처음 방문하는 곳이었지만, 전혀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아, 이곳은 로스앤젤레스 같네', '아, 여기는 샌프란시스코답다', '아, 뉴욕은 역시 뉴욕이구나' 하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와 귀에 익숙한 팝송, 스타벅스와 맥도날드, 메이저리그와 NBA, 프렌즈와 섹스 앤 더 시티, 우리나라 대학 교수진의 이력에 채워진 미국대학 박사학위, 외신뉴스에서 늘 인용되는 미국의 언론과 싱크탱크,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아이비리그 타이틀을 붙여 놓고 진열된 경영학과 인문학 서적... 우리는 이미 미국 속에서 미국의 연장선상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세대와 정치 성향을 떠나 문화 정서적으로 한국인들 중에서 '친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었습니다.

인종의 '전시장' 같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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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맨하튼 타임스퀘어 광장 ⓒ 정수현


미국은 인종의 '용광로'라기보다는 '전시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했습니다. 

워낙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모여 사는 나라이다 보니 여행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공용어 영어 외에도 자신들의 고유 언어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중국어가 많이 들리는 것도 놀라웠지만, 역시 압도적인 언어는 스페인어였습니다.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의 시내버스에서는 영어 다음에 꼭 스페인어 안내방송이 따라 나왔습니다. '깨어나는 거인'이라고까지 불리며 미국 사회에서 날로 비중이 커지는 히스패닉의 위치를 실감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미국을 묘사하는 대표적인 수식어 중 하나는 '이민자의 나라'입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유럽 이주자들이 원주민들과의 혼혈에 상대적으로 관대했다면, 미국에 온 유럽 이주자들은 원주민(흔히 부르는 표현으로 인디언)을 절대적으로 박멸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미국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이민자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이민자의 나라'는 '기회의 땅'으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회라는 것이 모든 피부색과 인종에 동등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막말을 서슴지 않았던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에서 보았듯이 유색인 이민자에 대한 백인들의 박대와 공격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습니다. 1800년대 말에 캘리포니아에서 중국인의 비중이 계속 늘어나자 1882년 미국 의회에서 '중국인 배척법'을 만들어 중국인 노동이민을 금지한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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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하이라인을 걷다가 만난 낙서. "DONALD MAKE AMERICA PSYCHO AGAIN" ⓒ 정수현


지난 대선에서 예상을 깨고 트럼프가 승리한 것은 미국의 주인은 여전히 백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결과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구구조 변화 추세를 보았을 때 앞으로 30년, 50년 뒤에도 미국이 지금과 같은 모습일 거라고 예상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고전적인 흑백갈등을 넘어 히스패닉을 포함한 인종문제는 미국 선거에서 핵심적인 이슈가 된 지 오래입니다.

'E Pluribus Unum (여럿이 모여 하나)'

역사적으로 제국이 유지될 수 있었던 특징은 개방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미국이 그들의 건국 이념에서 표방했던 가치를 키워나가며 계속 번영해 갈 수 있을지는 이민 이슈와 인종 문제에 대처하는 열린 자세에 달려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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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도시의 한복판에 존재하는 수많은 노숙자와 부랑자들 ⓒ 정수현


어느 국가, 어느 도시든 노숙자들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미국의 대도시에 걸인과 부랑자들이 많다는 이야기 또한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사실입니다. 

그러나 뒷골목도 아니고 화려한 시내의 중심부와 주요 관광지에서 마주하는 그 무기력한 모습과 체념의 눈빛들을 직접 보니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미국은 인구대비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나라요, 전 세계 국방 예산의 절반을 쓰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복지제도는 모범적인 모델이 아닙니다. 

치과 진료를 위해 비싼 항공료를 감안하고도 한국을 방문하는 교포들의 이야기는 이제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1980년대 이후 불평등이 가장 심화된 나라이며, 조지 소로스나 워렌 버핏 같은 사람들마저도 지금의 세금제도 문제점과 양극화의 심각성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 미국 자본주의의 현실입니다.

그런 한편, 카네기부터 빌 게이츠로 이어지는 슈퍼부자들이 보여주는 '부의 사회적 환원'은 미국 자본주의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일각에서는 시혜적 성격의 기부문화를 비판적으로 지적하며 제도적인 부의 분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편법적인 경영권 세습과 상속을 위해 온갖 꼼수를 동원하는 한국 재벌의 행태를 보면 그 정도만으로도 부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외무부' 대신 '국무부'라 이름 지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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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 시대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의 힘은 미국에 있습니다. 미국은 세계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 정수현


미국의 외무부는 국무부라는 명칭으로 존재합니다. 

세계의 모든 일이 모두 자신들의 영역이라는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의 표현입니다.

트럼프는 그동안 미국이 국외문제에 너무 많이 개입했었다며, 앞으로는 국내문제에 집중하여 국익을 챙기겠다고 했지만 국외문제의 개입 자체가 미국의 국익을 위한 것이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미국은 세계의 운명을 떠안은 예외적 위치에 있으며 특별한 소명을 가진 국가라는 '미국 예외주의' 이 원칙은 공화당과 민주당 어느 세력이 집권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미국 대외정책의 기본 방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핵문제와 관련된 북한 폭격설로 고조되는 한반도 위기상황 뉴스를 미국에서 접하는 마음은 착찹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렇게 강대한 나라가 과연 북한의 핵이 두렵겠는가? 북핵 때문에 사드를 배치하려 하겠는가? 한반도에서 긴장을 관리하는 모든 정책의 초점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임은 멀리서 더 잘 보였습니다. 

민족의 명운을 건 장기판에서 직접 참여하는 선수가 되지 못하고 졸이 되어 버린 상황 속에서, 지난 10년간의 대북정책과 동북아시아 외교의 실책이 뼈아프게 느껴졌습니다.

소녀상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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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화려한 야경. 20세기는 미국의 시대였습니다. 새로운 꿈을 설계하기 위해서 우리는 꿈의 유무 이전에 꿈을 내용을 물어야 합니다. ⓒ 정수현


넓고 풍요로운 땅만큼이나 미국을 상징하는 표현들은 다양합니다. 미국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긍정에서 부정까지 스펙트럼도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그래도 미국을 대표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를 뽑아낸다면 '아메리칸 드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20세기는 미국의 시대였고, 미국의 꿈과 욕망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미국을 방문하고 나서 "꿈의 유무를 묻기 전에 꿈의 내용을 물어야 한다"고 했던 당신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새로운 꿈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먼저"라는 이야기도 생각이 납니다. '꿈'보다 '깸'이 우선이라고 하였습니다.

뉴욕 월스트리트에서는 '황소상'과 '두려움 없는 소녀상'을 함께 보았습니다. 

황소상을 온전하게 사진에 담기가 어려웠습니다.  황소의 중요 부위를 만지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어, 수많은 인파가 황소가 쓰러질 만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황소상은 자본주의 번영의 상징으로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눈이 먼 황소는 위험하기 마련입니다.

'두려움 없는 소녀상'은 여성 차별의 현실을 알리고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상징으로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황소상 앞에 세워졌습니다. 

지금 뉴욕에서는 이 소녀상이 황소상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으로 만든다며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찬반여론이 팽팽하다고 합니다. 황소상 앞의 소녀상이 철거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월스트리트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듯, 황소상와 소녀상의 상징도 본래의 의도를 넘어 더 넓게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을 움직이는 파워 WASP(White Anglo-Saxon Puritan), 백인우월주의, 눈먼 자본주의의 질주, 국제사회에서 미국 예외주의와 무리한 패권추구...  이 모두를 황소의 모습에서 읽을 수 있다면, 당연히 소녀상은 그러한 문제들을 막아서는 대안과 희망의 상징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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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 황소상에 세워진 '두려움 없는 소녀상'. 원래 이 소녀상의 취지는 양성평등에 있지만, 황소의 성격에 따라 우리는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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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2016년 12월 말부터 약 1년간의 일정으로 세계일주 인문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소녀상 #황소상 #트럼프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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