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내게 건 첫 통화

등록 2017.04.19 09:49수정 2017.04.19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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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아까 잘못 말한 게 있는데... 전교조가 아니고 전교조에서 해임된 사람들이.."

아빠가 큰딸인 내게 '먼저' 전화를 한 것은 내 48년 일생 중 처음이다. 2016년 겨울부터 진행된 '최순실 게이트' 수사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구속사건'은 최대 관심사였다. 촛불집회로 채웠던 서울광장에 어르신들의 태극기집회가 더해지면서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태극기집회에 참가한 어른들이 촛불집회를 종북 혹은 공산당이라 매도하거나 성조기를 드는 것에 나는 의아했다. 한편으론 그분들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 미국에 살고 계신 아빠가 떠올랐다. 연세도 있으시고 한국 사정에 밝으신 아빠가 태극기집회 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전화를 드렸다. 아빠는 나의 느닷없는 정치 질문에 반색하면서 의견을 정리해주셨다. 태극기집회의 주장은 박 전 대통령 탄핵이 야당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며 차기 야권 성향의 정권장악 가능성에 검찰과 언론이 미래 권력 앞에 굴복한 결과이며, 어른 세대가 전쟁의 폐허에서 피땀으로 일군 이 나라를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하지만 아빠는 박 전 대통령의 잘못으로 인한 탄핵은 마땅하며 태극기 집회 쪽의 애국심은 이해하지만 그들의 행동에 완전 동의하지 않았다. 아빠는 미국 성조기를 갖고 나오는 것은 아마도 탄핵을 북한과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로 보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더불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과 우리가 똘똘 뭉쳐 공산주의에 대항해 국가와 민족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일 거라는 의견이었다.

아빠도 전쟁의 공포를 겪은 세대이다.1950년 한국전쟁 당시 14살이었던 아빠는 북한군들이 동네사람들을 무참히 죽이고 끌고 가는 것을 수없이 많이 보았다. 그래서인지 국가안보를 가장 중요하게 꼽았다. 북한을 '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동네깡패'에 비유했고 핵을 보유하고 있는 한 북한은 무슨 일이든 벌일 수 있는 집단이라고 평가했다.

저녁에 아빠와의 통화내용을 정리하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의 견해를 묻는 내 전화를 받고 나서 아빠가 너무 즐거워하셨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근면성실, 절약, 노동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다. 정확한 시간에 일어나서 아침뉴스로 시작해 30분 영어방송을 빼놓지 않고 듣고 출근하셨고, 퇴근 후엔 시계추처럼 정확히 귀가하고 항상 책을 보거나 공부를 하셨기에 난 아빠가 너무 재미없고 무미건조하게 산다고 느꼈었다.

엄마의 전화를 받고는 형식적인 대화만 해온 아빠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것 같고 너무 소원했었나 하는 죄송한 맘이 일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를 되새김질하면서 궁금한 게 생기면 전화로 다시 묻고 답하는 식으로 우리의 국제통화는 계속되었다.

아빠는 올해 여든으로 당시 KS마크라 불리는 경기고 서울법대 출신으로 은행을 다니셨다.사시를 보지 않고 졸업 후 곧장 은행에 입사한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대학3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생계를 꾸려야 했기에 학교에는 출석체크만 할 뿐 공부할 시간이 없었고 동생들 셋의 학비를 마련해야 해서 바로 농협에 취업했다 하셨다. 난생처음 듣는 얘기였다. 영민했을 20대의 어린 아빠가 어떤 마음이었을까, 가족들 때문에 아빠의 꿈을 접은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나의 우려와는 달리 동생들을 위한 아빠의 희생은 가장으로서의 의무감과 운명이라 여기셨다고 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빠는 뭐든지 아끼는 분이었다. 주택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저녁에만 보일러를 켰고 아빠는 저녁에 더운물이 나오니 그 시간에 머리를 감으라 하셨다. 헤어스타일에 죽고 사는 사춘기였던 우리들은 아침에 엉망이 된 머리로 학교에 갈 수 없다고 아침에 보일러 켜달라고 옥신각신했었다.

아빠는 우리에게 학문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어 하셨지만, 유감스럽게도 삼남매인 우리 중 어느 한 명도 아빠의 학구열 유전자를 닮은 아이는 없었다. 언제인가 내가 뭔가를 질문했다가 국어사전, 옥편, 사회과부도를 가져오라는 아빠의 말씀에 호기심의 싹을 끊었었다. 난 혹시 아빠가 아빠처럼 공부에 뛰어난 자식이 없어서 섭섭하지 않으셨는지 묻자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고 오히려 사교육을 법으로 금지하던 그때 친구들 대부분이 가정교사를 몰래 들였는데 그것이 문제가 될까 봐 못써준 게 지금은 조금 후회가 된다 하셨다. '이런, 자식이 부모보다 나아야 한다고 우리는 얼마나 자식들을 몰아가고 있는가..'

아빠가 공부 면에서 우리에게 서운해하지 않나 여겼는데 아빠는 외려 못해준 걸 마음에 담았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정년퇴직 후에는 도서관에 다니시며 늘 책을 읽으셨다. 한번은 공인중개사 시험이나 봐볼까 말하더니 몇 달 후 시험에서 단번에 합격했다. 우리끼리는 대통령도 시험으로 뽑으면 아빠가 가능성 있을 거라고 농담을 했었다. 지금이야 환갑을 이팔청춘이라 여기지만 그 당시만 해도 퇴직하면 '이젠 푹 쉬셔야죠' 라는 얘기가 자연스러웠다. 아빠는 무슨 일이든 하고 싶어 했지만, 혹시 장사라도 할라치면 집안에 무슨 어려운 경제적 상황이 있는 건가 하는 주변 시선에 신경이 쓰여 엄두를 못 냈다. 아빠에게는 지루한 시간들이었을 거다.

그런 아빠가 미국 이민을 결정하셨다. 처음에 우리 자식들은 반대했지만, 아빠의 단호함에 받아들여야 했다. 미국에 몇 주 머무르시면서 한인들을 만났을 때 일흔이 넘은 분이 일을 그만뒀다고 하자 주변에서 아직도 젊은데 이제는 어떤 일을 하며 살고싶으냐는 반응에 충격을 받으셨단다. 아빠에게 미국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주변 이목에 신경 안 써도 되고 노동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나라였다. 아빠에게는 일하는 즐거움이 그렇게 중요했었는지 새삼스러웠다. 하지만 영어에 능통하지 않은 이민자로서의 선택지는 슈퍼마켓, 세탁소, 주류판매업 정도였다.

아빠는 우리나라의 크린토피아 같은 세탁소로 업종을 정하고 의류를 수거해 공장에 갖다 주고 찾아오는 일을 시작하셨다. 그때부터 거의 20년을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꼬박 12시간을 일하신다. 휴가도 내지 않으신다. 그야말로 근면성실의 화신이다. 경제적으로 곤란한 것도 아닌데 사서 고생하시는 아빠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아빠가 세탁소일은 힘들지 않으셨는지 언제까지 하실 건지 여쭤보았다. 몸이 허락하는 한 계속할 것이고 건강을 유지하며 여태껏 일할 수 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하셨다.전화를 끊으시며 아빠에게 관심 가져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처음에는 아버지 세대의 정치적인 견해를 묻는 데서 시작된 부녀간의 통화가, 거듭되는 동안 아빠의 대단한 서사를 나눠 듣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이 소중한 시간들을 통해 난 아빠가 외부의 시선보다는 내적인 가치관을 고수하며 불평 없이 묵묵하게 삶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분이라는 걸 알게 됐다. 질곡이 심했던 세대의 험난한 아픔을 의무나 운명으로 무화시킨 묵직한 아빠의 자리에서 둔중한 울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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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고 있고 현재 미술치료 공부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영화를 좋아해 영화를 보면서 제가 느낀 점을 일상의 생활과 연결해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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