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 두 사람을 제사에 모시는 양반 가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유공 최진립 유적- 경북 경주 충의당, 용산서원

등록 2017.04.23 11:09수정 2017.04.2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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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립 장군이 기거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충의당. 경상북도 민속자료 99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 정만진


경상북도 민속자료 99호인 충의당(忠義堂)은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1568∼1636) 장군이 기거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집이다. 충의당은 현재 경주시 내남면 이조3길 28-17에 남아 있다. 본래 당호는 흠흠당이었는데 1760년 무렵 건물을 고쳐 지으면서 집 이름을 충의당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오늘날 이곳을 찾는 답사자는 충의당과 흠흠당 건물이 ㄱ자로 함께 배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흠흠당을 헐고 충의당을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사랑채의 이름이 충의당으로 바뀌자 중사랑채를 흠흠당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뜻이다.

충의당 일대는 '충의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공원 주차장의 관리 사무소를 지나면 곧장 초가 한 채가 나타난다. 이 초가의 내력은 활인당(活人堂)이라는 이름이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최진립의 손자 최국선(崔國璿, 1631∼1682)은 사방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신념으로 마을 어귀에 초가를 지어놓고 곳간을 열어 굶주린 사람들을 살렸다. 최국선의 베풂은 '경주 최부자' 가문의 상생과 나눔 정신의 시초가 되었다.


최 부잣집의 선행은 그 이후 계속 이어져 1950년의 6.25 때까지도 집 앞에 솥을 걸어두고 피란민들을 구휼했다. 복원한 활인당 초가 앞에는 최 부잣집이 나눠주는 양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백성의 모습이 조각 작품으로 제작되어 있다.

최진립 장군 동상 ⓒ 정만진


활인당을 지나면 넓은 정원이 펼쳐진다. 최진립 장군의 동상이 뜰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다. 2013년에 건립된 동상 앞면에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상' 아홉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고, 왼쪽 면에는 '병자호란 용인 험천 전투' 형상이, 오른쪽 면에는 '충노(忠奴) 옥동과 기별'이 '장군과 함께 분전하다가 사절(死節)'하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병자호란 용인 험천 전투는 최진립 장군이 청나라 대군에 맞서 분전하던 중 순절한 싸움이다.

충의당에 깃들어 있는 네 가지 특별한 의미

충의당을 둘러보노라면 네 가지 특별한 의미가 느껴진다. 동상에 새겨진 두 그림은 충의당에 깃들어 있는 그 네 의미 중 두 가지를 헤아리게 해준다. 첫째는 최진립 장군의 남다른 이력이다. 최진립은 1592년(선조 25) 4월 21일 경주성이 함락되자 25세의 나이로 재종숙 봉천(奉天), 아우 계종(繼宗)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최진립은 5월 27일 김호, 손엽, 권사악, 이눌 등의 의병장들과 힘을 합해 계연(김유신 장군묘 아래 경주 서천 일원)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6월 2일에는 언양에서 경주로 쳐들어오는 왜적을 김기 의병장과 함께 열박재(충의당에서 울주군 두서면의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7월 27일에는 경주 손엽, 권복시, 권사민 의병장들과 함께 영천성 수복 전투에도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에는 결사대 100여 명을 이끌고 울산 서생포에 주둔 중인 적을 기습하여 전과를 올렸다. 최진립은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훈련부정, 도총도부사, 마량진 첨사, 경원 부사 등을 역임했다.


최진립 장군 영정(충의당의 소형 홍보물에 실려 있는 사진을 재촬영한 것이므로 원품과는 이미지가 다름) ⓒ 충의당


하지만 최진립의 임진왜란 전투 이력을 두고 특이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최진립은 경흥 부사, 공조 참판, 경기‧공청(충청)‧황해 수군 통어사를 역임한 후 병자호란이 발발하는 1636년(인조 18) 공주 영장(공주 지역 군사 책임자)으로 있었다. 즉, 그의 병자호란 참전 이력을 말하려는 것이다.

임란 의병장, 69세에 병자호란 참전

1636년 12월 13일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군대는 며칠 지나지도 않은 12월 16일에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까지 포위했다. 조정은 부랴부랴 각 도에 공문을 보내어 근왕(임금을 지킴)을 명령했다. 서울에서 거리가 가까운 충청도 관군이 가장 먼저 북으로 달려갔다. 최진립 역시 69세라는 많은 나이도 아랑곳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남한산성을 향해 진격했다.

이윽고 1637년 1월 2일, 청나라 장수 양고리(楊古利, 양굴리)가 이끄는 적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총지휘관인 충청 병사 이의배가 겁을 먹고 단신으로 도망쳐버렸다. 이의배의 행태는 1592년 4월 30일 도성을 버리고 압록강 쪽으로 몽진을 떠나는 선조로부터 한강 사수 명령을 받은 도원수 김명원이 단 한 차례의 전투도 없이 혼자 달아난 것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최진립, 나성 현감 김홍익, 남포 현감 이경징, 금정 찰방 이상재 등은 총지휘관이 도주한 상황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향토문화전자대전>은 이들이 '훈련이 부족하고 전투력이 미약한 소수 부대'를 잘 통솔하여 적과 대등하게 싸웠다고 표현하고 있다. 하루 종일 10여 차례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해 질 무렵이 되자 아군은 탄약과 화살도 떨어지고 병력도 모자라 마침내 김홍익, 이경징, 이상재 등이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군사도 이미 반이나 잃었다. 백전노장 최진립도 순절했다. <향토문화전자대전>은 '최진립도 공주 영장으로서 군사를 이끌고 험천 전투에 참여하여 용전하다가 장렬히 순절했다. 다음 해에 시체를 수습했는데 그 모양이 살아 있는 듯하고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맹장들이 대부분 타계한 뒤 일어난 병자호란

69세 고령 노장의 전사는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한 일이었다. 임진왜란 때의 맹장들은 이때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충청도 의병장 고경명과 조헌, 최초의 승병장 영규 대사, 부산포 해전의 정운, 충청도의 '백기 장군' 조웅은 전쟁 첫해인 1592년에 이미 전사했고, 김천일, 황진, 최경회, 김면, 김성일은 1593년에 타계했다.

용산서원 숭렬사우(사당) ⓒ 정만진


호남 의병장 김덕령은 1596년에, 경상 우수사 배설은 1599년에, 함경도를 되찾은 정문부는 1624년에 억울한 역적 혐의를 덮어쓰고 선조와 인조에게 목숨을 잃었다. 원균과 이순신은 각각 1597년과 1598년에 유명을 달리했고, 권율, 권응수, 사명대사, 곽재우는 각각 1599년, 1608년, 1610년, 1617년에 자연사했다. 이운룡과 정기룡도 1610년과 1622년에 각각 이승을 떠났다. 정인홍은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름을 떨쳤던 장수 중 1636년 병자호란 때까지 생존한 이는 거의 없었다. 일본군 선봉장으로 참전했다가 이내 조선에 귀화한 김충선이 당시 63세의 고령으로 호란에 적극 참전한 사실이 눈에 두드러질 정도일 뿐이다. 그런 만큼 불과 25세의 나이로 임란 창의를 했던 최진립의 69세 병자호란 참전과 순절은 특이한 이력으로 평가하고도 남음 직하다.

동상 앞, 그리고 유물관 안에 전시된 칼과 교지 등 유품 앞에 서면 최진립이 임진왜란 의병장이자 동시에 병자호란 순절 용장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고, 그 순간은 색다른 역사 체험이 되어 가슴에 뭉클한 먹먹함을 샘솟게 한다.

최진립을 도와 병자호란에 참전했다가 주인의 귀가 명령을 듣지 않고 끝내 함께 순절한 두 노비를 기려 세워진 비석과 빗돌이 충의당 뒤에 세워져 있다. 멀리 최진립 장군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수령 400년의 회나무가 보인다. ⓒ 정만진


충의당에서 받는 두 번째 특이한 울림은 동상 왼쪽 면에 새겨져 있는 노비 두 사람의 조각과, 두 노비를 위해 세워진 비석 '故忠奴玉洞寄別不忘碑(고충노옥동기별불망비)'와 비각 '忠奴閣(충노각)'을 보는 순간 다시 크게 진동한다.

1592년 4월 15일 동래 읍성 전투에서 부사 송상현이 순절했을 때 목숨을 걸고 주인의 시신을 거둔 두 노비 철수와 매동을 기리는 작은 비석이 '부산 송공단'에 있지만, 옥동과 기별을 위해 동상에 이름과 형상까지 두드러지게 새겨넣고, 비석과 비각까지 세운 이곳의 배려에 견줄 만큼은 아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 모두의 굶주림을 걱정했던 최 부자 가문다운 마음 씀씀이가 너무나 따뜻하게 다가와 답사자의 가슴까지 어느덧 온기로 데워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충의당 경내에서는 최진립 장군의 15대손인 서예가 최채량 옹의 글씨를 곳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 최채량


두 노비를 '두 분'이라고 말하는 충의당 홍보물

게다가 해마다 음력 12월 27일에 열리는 불천위 정무공 제일에 '충노 두 분을 함께 제향한다(충의당 발간 소형 홍보물의 표현).' 이는 '신분 구분이 엄격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여러 양반들로부터 많은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집안의 전통이 되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정무공의 15세손인 서예가 최채량(崔採亮) 옹은 충노각 앞에 친필로 직접 '主爲忠臣不爲忠奴乎(주위충신불위충노호)'라 쓴 빗돌까지 세웠다. '主爲忠臣不爲忠奴乎'는 조선 시대의 경주 지리지인 <동경지> 충의편에 나오는 말로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충노가 되지 못하리오'라는 뜻이다. 이 문장은 용인 험천 전투에서 최진립이 자신을 평생 동안 모시느라 환갑을 넘긴 두 노비에게 "너희는 집으로 돌아가 목숨을 지키도록 하라" 하고 명령했을 때 두 노비가 주인에게 대답한 말이기도 하다.

충의당 창으로 보이는 안마당 ⓒ 정만진


충의당 유적이 주는 세 번째 특이한 감동은 충의당, 흠흠당, 안채인 잠와 고택, 사당 충렬사, 유물관 등 각 건물들의 규모가 예상보다 소박하다는 점이다. 방문하기 이전까지는 경주 최 부자 가문의 유적지이니 집채들이 어마어마하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을 가졌는데 실제 답사를 해보니 전혀 예상과 다르다. 지레짐작이 너무나 비논리적이었구나, 하고 쓴웃음을 짓는다. 정무공이 조정이 인정한 청백리였다는 사실과, '경주 최 부자' 가문의 상생과 나눔의 정신을 답사자가 아직 제대로 체득하지 못한 탓이리라.

충의당에서 받는 네 번째 특이한 울림은 효종이 1651년(효종 2)에 시호 '정무공'을 내리면서 하사한 교지를 보는 순간에 일어난다. 한 인물이 시호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가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최진립의 공로는 앞에서 알아보았으므로 지금은 교지의 내용을 살필 차례이다. '증시(시호를 내린) 교지'의 요지는 '병조판서 최진립에게 시호 정무공을 내린다'이다.

최진립 장군에게 '정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린 효종의 교지. 특이하게도 중국 황제의 연호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교지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충의당 유물관 전시품을 사진으로 찍은 것이기 때문에 원품과 이미지가 다름) ⓒ 충의당


이 교지의 특이점은 내린 시기에 대한 기술이다. '신묘 6월 29일'이다. 신묘년은 효종 재위 2년인 1651년이다. 중국 황제의 연호로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예를 들면 충남 아산 현충사에서 보는 충무공 이순신의 과거 급제 교지에는 '만력 4년'이라는 시기가 밝혀져 있다. 이순신이 무과에 합격한 1576년의 일이지만 '선조 9년'이라는 표시는 없고 그저 중국 황제의 연호로 발행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정무공의 증시 교지에는 중국 연호가 없다. 자주 국가로서의 당당함이 살아 있는 정무공 증시 교지는 그래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80-1-24호로서 귀함을 인정받고 있다.

가 볼 수 없는 경원의 최진립 사당

충의당 벽체 앞뒤의 나무로 된 문을 가로로 열면 다시 유리문이 나타난다. 집 안에 앉아서도 사당, 흠흠당, 잠와 고택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유리 너머로는 십장생의 하나인 사슴과 거북 조각들도 보인다.

정무공이 기거했던 충의당 마루에 앉아 투명한 유리를 통해 안마당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멀리 두만강 아래 경원에 세워져 있는 장군의 사당 충렬사가 보고 싶다. 왜적과 싸우고 거란족과 싸울 때 정무공은 결코 우리의 삼천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후세 사람들이 당신의 경흥 충렬사를 참배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셨을 것이다.

최진립 장군을 제향하는 경주 남산자락의 용산서원 전경 ⓒ 정만진


정무공이 지금의 사당 뒤편 충노각 옆에 심은 회나무가 지금도 웅대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 나이 400년을 넘긴 이 회나무는 1905년 조선이 실질적으로 망국의 길에 빠져들었을 때 말라죽었다. 그러다가 1945년 갑자기 되살아났다.

다시 6.25전쟁을 겪으면서 여러 번 불에 탔지만, 변함없이 푸른 싹을 틔웠다. 아, 최진립 회나무가 세차게 기세를 떨치며 활짝 피어나 통일을 예고해줄 그 날은 언제일까…! 궁금한 마음에 내내 회나무를 쳐다보지만, 400년 고목은 아직 이른 봄철인 탓에 새싹을 틔울 기색이 없다.

경주 최진립 유적 답사 순서


경주시 내남면 이조3길 28-17 '충의 공원'
(1) 활인당, 활인당 앞 빈민 구제 형상 조각 작품
(2) 최진립 장군 동상, 좌우의 두 노비와 병자호란 형상 조각
(3) 사당
(4) 유물관- 증시 교서, 칼 등 많은 유품들
(5) 경모각, 충의당
(6) 민속 자료실, 안마당, 잠와 고택, 흠흠당

경주시 내남면 내남로 15 용산서원
(7) 외삼문- 민고당- 강당- 사당- 신도비
경북도 기념물 88호 용산서원

이제 최진립 장군 경주 유적의 마지막 여정으로 1699년에 창건된 용산서원을 답사할 차례이다. 최진립 장군을 제향하는 용산서원은 강당, 사당 숭렬사우, 교육 공간인 민고당, 신도비 등을 거느리고 있다. 물론 지금 보는 건물들은 창건 당시의 것은 아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 훼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4년에 다시 세워졌지만, 경상북도 기념물 88호로 당당히 지정된 문화유산인 만큼 용산서원은 우리가 꼭 둘러보아야 할 역사 유적이다.

충의당과 용산서원은 형산강 이조교를 사이에 두고 800m가량 떨어져 있다. 용산서원의 주소는 경주시 내남면 내남로 15로, 남산 자락이다. 용산서원은 '산 자체가 박물관'이라는 평을 얻고 있는 남산에 스스로 또 하나의 문화재를 보태고 있는 것이다.

용산서원 강당 ⓒ 정만진


#최진립 #최채량 #충의당 #용산서원 #최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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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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