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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을 보라, 우리가 '함께' 할 때에만 '역사'는 발전한다

[오늘날의 영화읽기] <히든 피겨스>는 그렇고 그런 영웅담이 아니다

17.04.23 17:05최종업데이트17.04.23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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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히든 피겨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우리 중) 누군가의 성취가 우리 모두의 성취다!

아! 울고 말았다. 세상의 정의를 믿으며, 인간의 평등과 인종간 갈등의 해결을 위해 '우리'로 뭉쳐있는 그녀들을 보며, 나는 또 다시 울기 시작했다. 영화의 배경인 1961년, 그녀들은 나사(NASA, 미국 항공 우주국)에 근무하는 '흑인 계산원'들이었다. 그녀들은 지금 세계 최고의 기술을 다투는 '첨단'의 공간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뿐 아니라 인종에 대한 차별까지 힘들게 견뎌내고 있는 중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의 성취에 질투를 느끼던 또 다른 '그녀'는, '우리의 성취'라는 말로 '배아픔'을 이겨낸다. 아,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성취'가 부러워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말이다.

'낙관 주의자'가 되고 싶었다. 이 세상은 반드시 '정의'가 승리하는 곳이며, 내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할 일을 한다면, 대가는 정당하게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기대와는 너무도 멀리 있었고, 책에서 가르쳐 준 것들을 얘기하면 '철이 없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봐, 세상은 그렇게 단순한 곳이 아니야

히든 피겨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나는 더 이상 '낙관'을 믿지 않게 되었고, (최소한의 방어막으로) 그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살지는 않겠다며 이를 악물고 하루하루 버틸 뿐이었다. 그런데, 소련과의 우주개발 경쟁에서도 한참을 뒤쳐져 있던 60년대의 미국에서, 그녀들은 당당하게 '평등'과 '인권'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었다. 결국,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들의 투쟁은 조금씩 세상에 받아들여졌고, 지금의 우리는 그녀들의 성취 덕분에 '나'를 온전히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바꿔낸 '용감한 그녀들'에게 빚을 졌으나, 또 다른 '용감한 나'로 살며 세상에 낙관을 전하기를 포기하고야 말았다. 2017년의 나를 1960년대의 그녀들에게 투사하니,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메리, 나는 폴란드에서 탈출한 유대인이야. 내가 지금 여기서 로켓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기적이야!"

그녀들 중 하나였던 메리의 공학적인 재능을 알아본 이민자 출신의 로켓 과학자는, 백인에게만 허용되었던 엔지니어의 영역에 '도전'하라며 그녀의 등을 떠민다. 간신히 용기를 냈지만, 그녀는 백인들에게만 허용되었던 수업의 수강 자격을 얻기 위한 소송을 이기는 것이 먼저였다. 판사에게 가까스로 '야간 수업'의 자격을 허락받은 날, 재판정 밖을 뛰어다니던 그녀의 환호와 미소가 잊히지 않는다.

나는 영화를 통해 '미국의 위대함'에 대한 찬양이나, 개인의 성취를 강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양성을 허용하기까지 그들이 겪어내야 했던 갈등은 무시무시하며,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채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며 싸워낸 덕분에, 미국은 흑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었고, 이것은 분명한 '미국 사회의 진보'이다.

컴퓨터가 일반화되기 직전, 컴퓨터를 대신하여 문제를 풀어내던 '계산원'이라는 직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흑인 여성'인 그녀들이 느낄 수밖에 없던 차별과 갈등은 역설적으로 시간이 흘러가며 점차 옅어졌다. 물론, 아직도 완벽하게 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우리가 되어' 함께 맞섰던 투쟁은 '힘'이 셌다. 만약 개인으로 파편화되었다면 '질투'가 되어 서로의 욕망으로 먹혀버렸을 그들의 성취는, 그들 모두가 나눌 수 있는 공동의 것이 되었기에 세상을 변화시켰다.

'낙관 주의자'로 살고 싶었다.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희망으로,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더라도 '함께' 나아갈 수 있음을 믿고 싶었다. 철이 없다 하더라도, '정의'를 얘기하는 사람들 옆에 서서 응원을 전하며 살고 싶었다. 적어도, 그들이 앞서서 맞아내는 돌을 막아주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에게 먼저 돌을 던지는 사람으로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나는 점점 냉소로 뒤덮인 채, 힘든 그들을 외면하거나 질투로 흐려진 판단으로 그들에게 돌을 던졌다. 이미 악순환의 바퀴에 올라선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질 뿐 '희망'을 보여주지 않았고, 나는 '이렇게 어른이 되는 것'이라며 자위하고 있었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 영화 <히든피겨스>의 세 주인공 왼쪽부터 메리 잭슨, 캐서린 존슨, 도로시 본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노무현 대통령님과 김대중 대통령님을 한꺼번에 보냈던 2009년의 봄과 여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두 분이 떠나신 그 해는 내게 너무도 잔인했고, 의지할 곳 없던 나의 마음은 절망으로 떨어져 헤어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삶이란 '밥벌이'의 고단함만으로 근근이 이어지고 있었을 뿐, 세상은 내게 일말의 낙관도 허용하지 않았다. 만약, 광장을 채운 촛불이 아니었다면, 끝내 되돌아오지 못한 채 비관의 바다에 가라앉아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난 겨울부터 광장을 가득 채운 촛불들로 인해, 나는 비로소 '우리'가 가진 힘에 안도하며 김대중 대통령님을 떠올렸고 비관으로 가라앉은 나를 '떠오르게' 했다.

우리는 더 이상 '개인'으로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 <히든 피겨스>가 몇몇 영웅적인 여성들의 성공담으로 쉽게 소비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누군가의 성취를 시기하는 본능을 끝없이 자극하며, 하나하나의 개인으로 우리를 쪼개고야 말겠다는, 거대하고도 단단한 '기득권 세력'이다. 그들이 바라는 대로, 우리들 안의 작은 이익들로 나뉘어 싸운다면, 힘들게 몇 달을 이어온 촛불의 성취는 까맣게 잊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용만 당한 채 버려질 것이다. 깨어있는 '우리'만이 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백인들의 성취 뒤에 '숨겨졌던 그녀들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이, 나를 토닥이며 던진 위로도 이것이라 믿는다.

다시 힘을 내야겠다. '낙관주의'에 기댄 채 '철없는 이상'을 믿어 봐야겠다. 우리가 여기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분명히 나아질 것이다.

▲ 영화 <히든피겨스> 포스터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이겨낸 세 흑인 여성의 이야기를 다뤘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오늘날의 영화읽기 히든 피겨스 영웅주의 우리의 성취 대한민국의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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