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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월드컵 영웅' 이정수의 씁쓸한 퇴장이 남긴 것

15년 선수 생활 마침표... 극성팬들 태도와 선수 처신 모두 아쉬워

17.04.22 10:00최종업데이트17.04.2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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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월드컵의 영웅' 이정수(수원)가 결국 현역에서 은퇴한다. 수원 구단은 21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하여 "이정수의 의사를 존중해 잔여 계약을 종료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정수는 지난 16일 광주FC와 K리그 클래식 6라운드 홈경기(0-0)를 마친 뒤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구단에 전달했다. 당시 경기에서 수원의 일부 극성팬들이 부진한 성적에 불만을 품고 선수들을 향해 입에 담지못할 욕설과 야유를  퍼부었고 심지어 맥주캔을 투척하거나 손가락 욕설을 날린 이들도 있었다.

이정수도 흥분하여 현장에서 일부 극성팬들과 충돌 일보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정수는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미 은퇴 시기를 고심하고 있던 선수의 결심을 앞당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수원 서정원 감독과 구단 프런트가 이정수를 만나 여러 차례 은퇴를 만류했지만 본인의 의사가 확고했던 탓에 결국 구단도 은퇴 결정를 수용하기로 했다. 이로써 이정수는 약 15년간의 파란만장한 프로 선수 경력에 마침표를 찍게 됐다.

이정수는 2002년 안양 LG(현 FC서울)에서 K리그에 처음 데뷔하여 인천 유나이티드(2004~2005년)와 수원(2006년~2008년)에서 활약했으며 2009년부터는 해외에 진출하여 일본 J리그 교토상가(2009)와 가시마 앤틀러스(2010), 카타르 알 사드(2010~2016) 등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선수 경력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활약했던 알 사드에서는 비록 논란의 여지는 있었지만 2011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도 차지했다. 지난해 2월에는 친정팀 수원으로 복귀하며 팀의 FA컵 우승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정수는 K리그에서는 통산 168경기에  출전하여 9골 4도움을 기록했다. 중앙수비수로서는 크지않은 체격이지만 스피드와 제공권, 맨마킹 능력 등이 두루 균형을 이룬 전천후 수비수로서 2000년대 중반 K리그 최고의 센터백중 한 명으로 군림했다.

이정수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은 역시 국가대표 주전으로 활약했던 2010 남아공월드컵이다. 대회 개막 직전 주전이 유력하던 곽태휘가 벨라루스와의 평가전에서 당한 뜻밖의 무릎 부상으로 최종엔트리에서 낙마하며 이정수에게 행운의 기회가 돌아왔다.

서른살의 나이에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은 이정수는 조별리그와 16강전까지 4경기에서 파트너 조용형과 함께 모두 풀타임을 소화하며 허정무호의 수비진을 책임지면서 한국의 사상 첫 16강 진출에 큰 수훈을 세웠다.

특히 수비수임에도 2골을 터트리며 이청용과 함께 한국 팀내 최다득점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세트피스 상황에서 뛰어난 득점력을 발휘하며 원래 곽태휘의 별칭이었던 '골넣는 수비수'의 계보를 이었고, 나이지리아전에서는 헤딩슛을 시도하려다 실패한 것을 본능적으로 다시 발로 밀어넣은 장면이 골로 연결되며 '해발슛'이라는 애칭이 붙기도 했다.이정수는 2013년 2월 크로아티아와의 평가전을 끝으로 대표팀 경력을 마감했고 A매치에서는 통산 54경기에 출전하여 5골을 기록했다.

부와 명예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성공적인 축구인생을 보냈다고 할 만한 이정수지만 결과적으로 마무리는 다소 아쉬운 모양새가 됐다. 최근 몇 년간 계속된 투자 감소와 전력유출로 수원은 예전같은 명문구단의 위상을 잃어가던 상황이었고, 이정수도 나이를 먹으며 잦아진 잔부상과 기량하락으로 기대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올시즌에는 은퇴전까지 고작 3경기 출전에 그쳤고 활약도 대체로 부진했다.

팀의 부진 장기화와 소극적인 구단 운영에 대한 수원 팬들의 누적된 불만은 결국 지난 광주전에서 또다시 졸전 끝에 무승부에 그치면서 끝내 곪은 것이 터졌고 하필 이정수와 몇몇 선수들이 일부 극성팬들의 타깃이 된 것이 비극이었다.

친정팀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명예롭게 퇴장하고 싶다는 바람은, 뜻하지않은 홈팬들과 고참 선수간의 충돌이라는 희대의 해프닝과 함께, 이어진 이정수의 은퇴 발표로 귀결되며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채 뒷맛이 씁쓸하게 막을 내리게 됐다.

이번 사태는 앞으로도 축구계에 여러모로 생각해볼 만한 화두를 남겼다. 첫 번째는 역시 도를 넘은 일부 극성팬들의 '갑질' 논란이다.

종목을 막론하고 일부 극성팬들의 과격한 행태가 도마에 오른 것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팀과 스포츠를 향한 애정이나 집단의 힘을 앞세워 자신들의 행태를  미화하려는 성향이 강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보듯 더 이상 선수에 가하는 물리적 위협이나 인신공격성 폭언까지 '팬의 권리'로 정당화될수는 없다는 것이 대다수 국민들의 보편적 인식이다.

이정수의 은퇴 소식이 알려지면서 여론은 대체로 선수에게 동정적이었고 물의를 일으킨 일부 극성팬들과 수원 서포터즈에게는 상대적으로 곱지않은 시선이 쏟아졌다. 성숙한 관전문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눈높이가 그만큼 발전했다는 증거다.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들에게 항상 좋은 경기력과  프로의식을 요구하고 싶다면, 팬들 역시 그에 걸맞는 최소한의 예의와 절차를 갖춰야한다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 됐다. 앞으로도 이런 위험한 행동으로 선수들이나 주변의 선량한 일반 팬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치는 이들에게는 축구장 영구출입금지나 서포터즈 자격 박탈같은 구체적인 제재 조치가 필요한 이유다.

한편으로 이정수 개인의 처신에 대한 아쉬움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광주전 사태는 누가봐도 100% 난동을 일으킨 극성팬들의 잘못이지만 이정수 역시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은퇴 결정을 통보하고 떠나버린 것은 프로 선수로서 도저히 책임감있는 태도라고는 볼 수 없다.

구단은 이정수가 "팀에 많은 보탬이 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동안 수원을 응원해준 팬들에게 감사하고 미안하다"는 뜻을 전했다고 밝혔지만 형식적인 작별인사에 불과해 보인다. 시즌 전에 미리 은퇴 시점을 통보한 것도 아니고, 하필 팀이 한창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을 때 은퇴 발표라니. 고참선수로서 정말로 책임감과 미안함을 느꼈다면 일단 최선을 다해 팀분위기를 추스르는데 기여하는 게 우선이었다. 자신의 거취 문제는 그 뒤에 천천히 논의해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정수는 구단과 감독의 만류조차 뿌리치고 일방적으로 결별을 선언했다. 누가봐도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이라고 밖에 볼 수 없으며 올바른 해결 방식도 아니다. 일부 극성팬들에게 당한 피해에 대한 문제제기라면 당사자에게 책임을 묻고 재발방지를 요구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 성적 부진에 대하여 감독이나 단장도 아니고 일개 선수가 책임을 지고 떠나겠다는 핑계는 금시초문이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피해는 이정수를 욕한 극성팬 따위가 아니라 애꿎은 수원 구단과 동료선수들이 입는 것이 더 크다. 단순히 사적인 인정이나 의리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엄연히 공식적으로 합의된 구단과의 '계약 관계'의 관점에서 비추어 봤을 때도 이정수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수원으로서는 가뜩이나 선수와 서포터즈간의 충돌이라는 초유의 사태만으로도 이미 구단 이미지에 흠집을 남긴 사건인데, 이정수마저 일방적으로 떠나버리면서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할 수 있는 모양새를 갖출 기회조차 잃어버렸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다시 한번 홈팬들과 화합하고 서로 박수 받으며 명예롭게 떠나는 모양새를 만들 수는 없었을까. 이정수의 은퇴는 선수 본인에게나 K리그 팬들에게나 가장 씁쓸하고 안타까운 은퇴 사례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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