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사진집, 이게 가능해?

[사진책 읽기] 손대광 <광민탕, 다 때가 있다>

등록 2017.04.29 14:58수정 2017.04.29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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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눈빛

한국말에서 '때'는 두 가지로 씁니다. 첫째로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이나 해 같은 흐름을 나타내요. 둘째로 우리 몸에서 먼지랑 땀이 얽히며 생기는 것을 나타내요. 생김새는 같으나 뜻은 사뭇 다르다고 할 만한 '때'입니다.

몸에 때가 생기면, 이 때를 벗길 때라는 뜻입니다. 때를 벗길 때에는 따뜻하거나 뜨거운 곳에 몸을 두어요. 살갗이 부풀기를 기다립니다. 천천히 때를 기다리면서 때를 벗깁니다. 알맞구나 싶은 때가 찾아오면 슬슬 때를 벗기지요.


아무 때나 함부로 벗길 수 있는 때가 아닙니다. 살이 아직 부풀지 않은 때에 마구 문질러서 때를 벗기려 하면 살이 아파요. '제때'를 기다려서 '제 때'를 벗겨야 합니다. 제 때를 벗기려 한다면 참말로 제때를 맞추어야 합니다.

때를 살피기에 때를 벗길 수 있으니, 때를 놓치거나 때를 안 살피면 때를 벗기기 어렵습니다. 때를 모르면 때를 못 벗긴다고 할 만하고, 제 때를 모르니 제때를 가누지 못한다고도 할 만해요.

이러구러 '때'라는 낱말 하나를 두고 두 가지로 쓰는 살림이 재미있으면서 뜻깊구나 싶어요. 어쩌면 예부터 '때'라는 낱말 하나를 사뭇 다르다 싶은 두 군데에 쓴 뜻이 있구나 싶기도 합니다.

"오면 가는 게 생이다." 목욕을 마친 잿빛 머리의 환갑을 넘긴 남자가 탕 문을 나서며 한마디 던진다. 선승 같은 그 사내의 말을 되새김질하며 나는 오래도록 가부좌를 틀거나 두 다리를 뻗치며 몸에 감기는 살냄새 나는 물의 마음을 생각하였다. 오면 가는 게 생이듯 광민탕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에이씨 비씨 디씨...' 여기서만 통하는 욕이자 콧노래라던 광민탕 이발사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벌거숭이 나에게 가끔씩 물음을 던져 보곤 한다. 그대가 좋아하는 살맛 나는 온도는 몇 도인가? (사진가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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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 손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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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 손대광


손대광 님이 빚은 사진책 <광민탕>(눈빛 펴냄)을 읽습니다. 부산에 퍽 오랫동안 있었다는 목욕탕 가운데 하나인 '광민탕'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사진책입니다. 이제 이 광민탕이라는 곳은 문을 닫았다고 해요. 광민탕을 드나들던 사람 이야기나, 광민탕에서 일하던 사람 이야기는, 이제 이 사진책에만 남습니다.


부산을 비롯해서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목욕탕이 퍽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른바 '찜질방'이 생기면서 목욕탕은 아주 빠르게 시들었어요. 잠도 잘 수 있는 데다가 아무 때이고 몸을 불리며 노닥거릴 수 있기까지 한 찜질방은 목욕탕을 아주 가뿐히 밀어내었다고 할 만합니다.

작은 마을이나 골목에 있던 숱한 가게가 편의점하고 큰가게(대형할인마트)에 밀리면서 문을 닫거나 시들합니다. 뭔가 더 도시스럽고 커다란 곳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하루아침에 바뀌곤 합니다. 이러는 사이에 우리는 퍽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던 이웃을 쉬 잊고 발빠르게 다른 자리로 갈아탑니다. 미처 가만히 생각해 볼 겨를이 없이 더 빠르거나 크거나 넓다고 여기는 데로 움직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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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 손대광


사진책 <광민탕>에 나오는 사람들은 천천히 몸을 씻으려고 광민탕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광민탕을 드나들지는 않아요. 제 몸에 때가 쌓일 즈음 찾아갑니다. 제 몸에서 때를 벗길 만한 때를 저마다 스스로 깨달으면서 찾아가지요.

목욕탕에서 사진을 찍자는 생각을 품은 손대광 님은 목욕탕 사람들한테 천천히 다가갑니다. 목욕탕한테도 천천히 다가서지요. 목욕탕에서 때를 함께 벗기면서 다가갑니다. 목욕탕에서 천천히 때를 벗기면서 목욕탕하고도 천천히 사귑니다.

손대광 님은 이녁을 둘러싼 사람들을 스치고 지나가는 모델(피사체·취재원)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녁을 둘러싼 사람들을 '한마을에서 사는 이웃'으로 마주합니다. 스치고 지나가는 모델이나 피사체나 취재원이 아닌 터라, 서둘러 사진기를 손에 쥘 까닭이 없습니다. 이녁은 여덟 달 만에 드디어 사진기를 손에 쥘 수 있었다고 하는데, 고작 여덟 달 만에 사진기를 쥐었다고 느끼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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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 손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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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 손대광


그러면? 여덟 달이 아니라 스무 해나 서른 해였겠지요. 손대광 님이 광민탕이라는 목욕탕을 둘러싸고 살아온 나날을 고이 지켜보고 마주하고 함께한 발자국이 있으니, 이 발자국이 밑바탕이 되어 지난 여덟 달을 더욱 눈여겨보면서 어떤 이야기를 사진 한 장으로 담아내자는 생각이 솟았겠지요.

살아온 나날을 몸에 아로새긴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때를 바탕으로 여덟 달이라는 나날을 고이 건사하면서 생각을 가다듬은 때를 보냈다고 할 만해요. 제때를 기다려 사진 한 장을 찍어요. 제때를 생각하며 사진 한 장을 빚습니다. 제때를 마주하고 바라보고 느끼고 되새기면서 사진 한 장을 이룹니다.

오늘 사라질 모습이라고 해서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곧 사라질 곳이라고 해서 바삐 찍지 않아도 됩니다. 먼저 마음에 새길 모습이고, 다음으로 몸으로 느낄 모습입니다. 이러고서 가만히 생각을 기울여야지요. 무엇을 왜 어떻게 누가 어디에서 누구를 찍되, 어떠한 사랑이 흐르는 손길로 찍느냐를 생각할 노릇입니다.

제 때를 벗기듯이 제때에 사진기를 손에 쥐면서 묵은 이야기 실타래를 한 올 두 올 벗깁니다. 우리 때를 벗기듯이 우리 살림살이에 깃든 오랜 발자국을 한 걸음 두 걸음 옮기면서 사진 몇 장으로 남겨 봅니다. 사진책 <광민탕>은 목욕탕이라고 하는 마을 만남터·쉼터를 둘러싸고 수많은 '때(삶)'가 켜켜이 쌓인 숨결을 보듬은 이야기꽃과 같구나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광민탕, 다 때가 있다>(손대광 사진 / 눈빛 펴냄 / 2016.12.2. / 12000원)

광민탕 - 다 때가 있다

손대광 지음,
눈빛, 2016


#광민탕 #손대광 #다 때가 있다 #사진책 #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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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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