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소의 목욕, 알몸이 부끄럽지 않았다

[여자교도소 르포 ④-끝] 교도소는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등록 2017.04.27 20:55수정 2017.04.27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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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 맨얼굴과 이름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작업장으로 갔다. 작업장 옆 공터에는 오전에 보지 못했던 한평만 한 텃밭에 꽃들이 심어져 있다. 다른 방에서 꽃을 심는 작업을 한 거라 했다. "아~ 이쁘다!" 옆에 있던 눈썹 진한 언니가 말했다. 꽃 심는 일을 하면 좋을 텐데. 햇살이 좋아서 바깥에서 흙을 만지고 싶었다.

"오늘은 목욕하는 날이야."

옆에 앉은 언니가 말했다. 일주일에 두 번, 목욕탕에서 목욕을 한다.

"1번 방 사람들이 먼저 목욕하고, 다음에 우리가 목욕을 할 거야."

30분 정도 지났을까, 1번방 사람들이 목욕을 하러 나가고, 우리는 나간 사람들 몫까지 작업을 하려고 열심히 일했다. 곧이어 1번방 사람들이 들어오고, 우리 차례가 됐다. 언니들은 한껏 신 나보였다.

"승희야, 목욕하러 가면 시간이 20분밖에 없으니까 후딱 끝내야 해. 언니가 샴푸랑 린스랑 바디워시 빌려줄게. 언니 옆에 앉아서 부지런히 닦아."


눈썹이 진한 언니가 나에게 말했다. 우린 다시 방으로 들어가 목욕도구와 갈아입을 속옷과 수건을 챙겼다. 나는 연두색 수건 하나를 챙겼다. 교도관은 교도관 사무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불투명한 유리문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상상한 것보다 비좁은 샤워실이었다. 7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자, 이제 시작이다! 어서 옷을 벗고 우리 빠르게 씻읍시다."

목소리 큰 언니가 말했다. 언니들은 분주하게 옷을 벗었다. 나도 급하게 옷을 벗고, 눈썹이 진한 언니의 옆에 앉았다. 샤워꼭지 하나마다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목욕의자가 있었고, 뜨거운 물이 내 몸의 반만 한 갈색 대야에 떨어지고 있었다.

아주 작게, 졸졸졸. 대야에 반정도 담긴 물은 목욕하기 적당한 따듯한 온도였다. 그 물로 주어진 시간 20분 안에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입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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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하는 사람들 목욕하는 사람들 ⓒ 홍승희


대야에 담긴 물을 바가지로 퍼서 온몸에 부었다. 목욕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씻는 나와 다르게 다른 언니들은 일어서고 엎드리면서 요란하게 목욕을 했다. 내가 너무 느린 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니들의 몸이 보인다. 어렸을 땐 자주 공중 목욕탕에 갔지만, 커서는 자주 가지 않았다.

왠지 모르는 사람들의 알몸을 보는게 부끄럽고 낯설어서다. 그런데 이곳에서, 처음보는 사람들의 알몸과 뒤엉켜 목욕을 하게 되다니. 나와 20살은 차이나는 몸. 언젠가 엄마가 목욕할 때 보았던 여자의 몸. 늘어난 뱃살과 엉덩이, 굴곡없는 허리, 밋밋한 가슴, 축 처진 가슴. 따뜻한 물에 젖은 사람들의 살이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자연스러워보였다. 나도 나의 알몸이 부끄럽지 않았다.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다.

알몸보다 무서운 것은 맨얼굴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서로에 대해 모른다. 아는건 이름이나 죄명 뿐. 어디에 사는지, 뭘하고 살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부끄럽지 않은 걸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뜨거운 물을 담은 바가지로 머리를 헹구고 있는데, 목소리 큰 언니가 와서 때수세미로 등을 밀어준다.

언니는 먼저 목욕을 끝내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등을 밀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자자, 등을 보여주세요 등 때밀이 갑니다!" 언니는 빙글 빙글 돌면서 사람들의 등에 비누칠을 하고, 때수세미로 박박 밀어주었다.

옆에 있던 눈썹이 진한 언니가 성기를 깨끗히 닦으라며 여성청결제를 빌려주었다. 사람들은 목욕용품을 나누어주고, 등을 밀어주고 머리에 거품이 남아있지 않은지 확인해주었다. 내가 제일 먼저 몸을 헹구고,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입었다.

우리가 얼마나 빨리 몸을 씻었는지, 한명을 제외하고 모두 옷을 입은 후 시간을 확인해보니 10분이나 더 남았다. "우리가 너무 빨리 씻었네, 호호. 그냥 천천히 씻을걸." 목소리 큰 언니가 말했다. 남은 한사람이 옷을 입을 때까지 다같이 기다렸다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있는 것보다 교도소 안에서 더 깔끔하게 온 몸을 닦은 것 같다. 드라이기가 없으니 머리는 햇빛에 말리면 된다. 교도소에서는 화장을 할 수 없다. 대신 선크림을 구입할 수 있다. 언니들은 스킨, 로션을 바르고 썬크림을 얼굴에 발랐다.

나도 스킨 로션과 바디로션을 빌려서 온 몸에 발랐다. 몸에서 향기가 났다. 우리는 다같이 젖은 머리를 하고 작업장으로 갔다. 교도소 문에서 작업장 입구까지 걷는 다섯걸음 동안 따뜻한 바람과 햇빛이 머리카락을 만져줬다.

청소, 빨래, 청소, 빨래...

작업장에서 두 시간 정도 더 쉬지 않고 일했다. 엄지손가락과 손톱이 따끔거릴 정도다. 오후 3시 30분쯤, 오늘 할 작업량을 모두 끝냈다. 몇 백개의 슬립을 접어서 커다란 박스에 담았다.

사람들은 각자 빗자루나 대걸레를 들고 와서 청소를 했다. 뒤에서 전선을 만지던 할머니는 밖으로 나가 햇빛을 가만히 쬐고 계신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지푸라기 빗자루를 잡았다. 오랜만에 보는 갈색 빗자루다. 머리카락같이 생긴 빗자루로 부드럽게 바닥을 닦았다.

청소를 할 때 사람들은 누구도 눈치보거나 게으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 재밌게 청소하는 것 같았다. 대걸레를 물에 적셔서 바닥을 반짝반짝하게 만들었다. 대걸레질을 하던 한 언니는 교도관 사무실에 벌컥 들어갔다.

"교도관님~ 대걸레질 해드릴게요 일어나보세요. 서비스!"

웃으면서 말하는 장난스러운 말투는 얼핏 교도관을 놀리는 것 같았다. 교도관이 화낼까봐 긴장하고 쳐다봤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교도관은 일하다가 말없이 일어나 대걸레질을 하도록 내버려뒀다. 다른 사람들도 킬킬 웃었다. 청소가 끝난 후, 우리는 다시 두 줄로 섰다. 하나부터 열까지 숫자를 말하고 작업장을 나갔다.

방으로 돌아와 다시 각자 쉬고 있었다. 목소리 큰 언니가 물었다.

"남자친구는 있지?"

남자친구가 있는 게 당연한 건가? 어쨌든, 있다고 대답했다.

"결혼은 안 하니?"

50대 언니가 물었다.

"네, 저는 결혼 안 하고 동거하면서 지내요. 굳이 결혼하지 않으려고요."

이런 말을 하면 대개 어른들은 '그래도 결혼이 필요하다, 왜냐하면'으로 시작해 자신의 경험을 강요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다. 언니들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그것도 좋은 거야."

그러고보니 결혼을 안 한 언니들도 있다. 목소리 큰 언니가 말했다.

"나는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교도소에 오랫동안 있었어. 교도소 밖에서 남자친구 뒷바라지 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 매일같이 와서 접견하고, 편지쓰고, 돈 보내주고. 교도소 뒷바라지보다 내가 여기 들어와 있는 게 편하다니까!"

옆에 있던 눈썹이 진한 언니가 농담처럼 말했다. "교도소 뒷바라지보다 수감되는 게 쉬웠어요~ 호호."

방으로 돌아와 다시 쉬는 시간이다. 눈썹이 진한 언니는 옆에서 성경책을 읽고 있다. 2주에 한 번씩 목요일마다 목사님이 오시면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2번방 사람들은 모두 기독교, 가톨릭 신자다. 언니는 종교가 없다고 대답한 나에게 교회를 다니라고 말했다.

"나는 옛날에 욕심이 많았어. 그 욕심 때문에 아는 사람의 돈을 빌려서 도망가기도 했고, 그래서 이곳에 온 거야. 승희 너는 물론 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 이런 곳에 오지 마. 네 마음의 평화를 찾아. 세상이 어떻든 기도하고 기도해."
"네, 언니. 저는 소신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에게 나를 위해 기도하는 일과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 아니라고 말하는 일은 다른 게 아니다. 종교가 없는 이유는 나의 오늘보다 먼저 존재하려고 하는 것들은 거짓이 되기 쉽다고 생각해서다.

종교는 모두 진리를 말하지만 내 오늘만큼 진리인 것은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녀의 말이 좋았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오늘에게 집중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아서 세상이 이 지경이 됐다고 설파하지 않고, 내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종이와 펜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눈썹이 진한 언니는 편지지 종이와 검은색 모나미 볼펜을 빌려주었다. 어제 기억났던 꿈을 적어내려갔다. 날카로운 칼날이 나왔던 꿈이다.

그리고 어떤 이미지를 기록하려는데 손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나갈 때 교도관이 내가 쓴 종이를 검열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생각을 자유롭게 그리기가 힘들다. 그래도 열심히 낙서를 끄적였다. 이곳의 분위기, 냄새, 온도, 촉감을.

언니들은 계속 청소를 하고 빨래를 했다. 좀 강박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빨래, 빨래, 청소, 청소. 낮에 머리를 감았는데 또 머리를 감기도 하고, 바닥에 먼지를 닦고, 선반을 정리한다. 나는 편지를 쓰는 언니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 종이에 이런 저런 느낌을 끄적였다.

무료하지도, 설레지도 않은 시간이 지나 저녁을 먹는 시간이 되었다. 사서언니가 급식을 전해줬다. 저녁은 고등어 사체를 튀김가루에 튀긴 것과 멸치볶음, 김치찌개가 나왔다. 사람들은 "승희는 영양보충을 해야지!" 많이 먹으라며 내 접시에 고등어 두마리를 담아줬다.

점검

저녁을 먹고, 갑자기 교도소 과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를 불렀다. 내가 혼방을 쓰면서 불미스러운 일을 겪지 않았는지 물으려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너무 좋아요. 편안해요."

교도소 과장이 말했다.

"미결 사람들이랑 있어서 그래요. 재판에서 징역이 선고된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해요."

나는 법무부에 소속된 사람들과 함께 방을 쓰고 있는 거였다. 생각해보니 옆방과 옆옆방 기결이라고 써있는 방의 사람들은 하루종일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루종일 몇 평의 방 안에서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는게 전부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고, 취침 전 점검이 시작됐다. 우리는 두 줄로 나란히 앉아 번호를 외웠다. 교도소 과장이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다음 방으로 갔다. 옆방에서 사람들을 혼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방 분위기는 뭔가 들떠있는 거 같아. 왜 이래요?!"

일어서서 흰색 종이를 까진 벽지에 덧댄 것을 지적했다.

"여기는 당신들의 방이 아니고 잠시 머무는 빌려주는 곳이에요. 벽지가 까졌어도 뭐든 붙이면 안돼요."

그들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벽에다 마음대로 붙이지도 못한다. 상상할 자유, 그림 그릴 자유도 주어지지 않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숨쉬는 걸까. 나는 하루, 이틀 뿐이었지만 1년 넘게 이곳에서 살아가는 언니들은.

갑자기 굵은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보니 오늘 작업할 때도, 몇 번씩 들렸던 소리다. 언니들에게 물었다. "저 소리는 왜 나는 거예요?" 언니가 대답했다. "누가 탈출했나 보지. 호호. 농담이고, 저거 들쥐가 지나가서 그럴 거야. 맨날 울려."

이불을 덮어주는 손

옆 방에서 혼이 나는 소리가 익숙한 일이라는 듯 담요를 폈다. 각자의 자리에. 나는 창가 밑 자리에 이불을 폈다. 내 옆에는 눈썹이 진한 언니가 누웠다. 언니들은 내가 더 넓게 잘 수 있도록 이불을 더 좁게 접었다. 문 가장 앞쪽에 있는 언니는 한사람 몸만 한 크기로 이불을 깔고 잤다. 그 옆의 언니도.

잠이 왈칵 쏟아졌다. 눕자마자 잠들 것 같았다. 옆에 있던 언니가 따뜻한 물이 담긴 페트병을 쥐어주었다. "끌어안고 자면 따뜻할 거야." "감사해요. 안녕히 주무세요." 눈을 감고 잠이 들때 즈음 언니가 자신의 담요를 내 위에 한겹 덮어준다. 따뜻하다.

꿈을 꿨다. 긴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있는 교도소 2번 방. 사람들과 과일을 먹으며 앉아있다. 아이패드를 꺼내서 글을 쓰려고 한다. '어, 아이패드가 왜 있지? 이곳은 교도소인데. 이거 못가지고 들어오는데.' 옆에 있던 언니들이 말한다. '그러게. 이상하네. 이게 왜 있지? 이거 꿈 아니야?' '아, 그러게요. 꿈인가 봐요. 그럼 다시 자야겠어요'라고 대답하고는 바로 방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다.

꿈에서 잠이 든 동시에 잠에서 깼다. 새벽 몇 시일까. 사람들은 자고 있다. 형광등 소리, 화장실 수도관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창문에서는 미적지근한 바람, 패트병의 물도 미지근하게 식었다. 미적지근한 느낌이 든다.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억압적인 공기가 해결되지도 폭발되지도 않은 채 있는 이런 지금. 좀이 쑤시는 건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는 새벽에 몸을 베베 꼬았다. 권태의 촉감이다. 해방의 유토피아도, 황폐한 디스토피아도 아닌 이런 미미하고 데데한 일상이 굳은 살처럼 권태로워지는 것. 이곳이 벌써 권태로워지다니.

새벽 4시쯤 되었을까, 새벽마다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옆자리의 눈썹 진한 언니가 나를 깨워주었다. 출소할 시간이 된 것이다. 곧이어 교도관이 나를 불렀다. "본인 짐만 챙겨서 나오세요." 나는 언니들이 준 초코바와 낙서가 적힌 종이를 들고 나갔다. 언니들의 잠을 깨울까봐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똑같은 출소절차다. 그녀가 내가 쓴 종이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 "그냥, 일기 쓴 거예요." 종이를 계속 읽는다. "그걸 꼭 읽어야 하나요?" 말해보지만 교도관은 종이를 읽는다. 익숙한 검열이다. 교도관은 초코바를 갖다놓으라고 했다. 자기 물건이 아니면 들고 가지 못한다고.

다시 혼방에 들어가 초코바를 문 입구에 놓고 갔다. 언니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전하지 못했는데. 잠들기 전에 언니들은 말했다.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그런데 어제 재판을 했어요. 재판에서 벌금이 나오면 아마 또 들어올 거예요. 그럼 그때 만나요!" 언니들은 말했다. "아니야, 그래도 들어오지 마. 그립겠지만."

그녀들의 교도소

언니들은 나를 아기처럼 챙겨주었다. 만약 내가 동년배의 나이였다면 어땠을까. 그들은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나를 환대해주었을까. 사람들이 하루 중 제일 관심 있는 것은 오늘의 메뉴였다. 밥을 먹으면서는 '어머, 이건 어떻게 만든 거지?', '너무 싱겁다. 고추장을 더 넣었어야지. 이건 소금이 너무 많다.'

눈에 보이는 음식을 맛보고서 그 안에 들어간 재료를 척척 맞추는 언니들이 신기했다. 급식으로 나오는 밥 반찬 국물처럼, 떨어지는 명령과 정해놓은 규칙들은 언니들의 감각 앞에서 그 실체가 해부되었다. 심미적인 감각은 어쩔 수 없이 자라는 넝쿨처럼 쇠창살을 타고 올라갔다. 색깔, 향기, 맛, 촉감, 소리로 서로를 알아보고 등을 문질러주면서.

여자들끼리 이렇게 사는 것도 참 좋겠구나, 목욕을 마치고 햇빛에 머리를 말리면서 잠시 들었던 생각이다. 문득 인도에 갔을 때, 야간 열차에서 길을 잃고 헤맸을 때 레이디 칸(여성전용열차)에 앉아있던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내게 먹을것과 물, 잘 수 있는 공간을 넉넉히 마련해주던 때가 떠올랐다.

딱 그때의 느낌이다. 낯선 평화로움. 그리고 아주 익숙한 온기. 그들은 나를 모르고, 오늘 처음 봤고 오늘이 지나면 다시 볼 수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에게 있는 모든걸 내게 내어주고 조건없이 배려해준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자들의 전쟁에는 냄새와 색깔과 소소한 일상이 함께 한다... 그리고 여자들에게는 전쟁은 '힘겨운 일'이자 '평범한 보통의 삶'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네들은 전쟁터에서도 노래를 하고, 사랑에 빠지고, 머리를 매만졌다..."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중에서

사람들은 교도소에서 밥을 나누고, 끊임없이 빨래를 하고, 서로 이불을 덮어줬다. 꽃씨를 심고, 자루에 생명을 담아내고. 억압이 무용지물인 것처럼 웃어버렸다. 쇠창살과 위계는 그녀들의 오늘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녀들의 유머는 교도관과 재소자들의 위계를 종종 무너뜨렸다.

한 여자재소자가 점검을 하러 온 교도관에게 말했다.

"어머, 교도관님 안색이 안 좋으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건강 괜찮아요?"
"건강은 무슨."
"에이, 몸 안 좋으신데 푹 쉬지도 못하고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세요."

교도관은 처음에 경계하더니, 이내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대꾸하고 돌아갔다. 은근한 조롱이 섞이긴 했지만, 그들의 이런 상호작용은 일상적이었다. 그들은 상대방이 교도관이든 과장이든 재소자이든 사서언니이든, 서로의 안색을 걱정해주고, 달라진 머리스타일을 칭찬해주고, 아픈데를 만져주고 알아차렸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은 교도관이나 재소자의 역할옷을 벗고 서로의 '지금'을 나눴다. 자신의 옷을 벗고, 상대의 옷도 같이 벗겨버리는 것이다. 인권침해보고서에 기록을 하지 않고, 거대한 사회문제를 고민하지 않고도 그 자신과 앞에 마주한 사람의 인권을 살림한다.

어쩐지 그녀와 교도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쇠창살과 교도복이 너무 부실하다. 쇠창살을 두르고 올라가는 초록색 담쟁이 넝쿨처럼, 그녀들 앞에서 그 모든 쇠와 창과 금관은 허약하다. 어디서든 꽃필 수 있는 힘. 유머의 힘이 그런 것 아닐까.

허위와 프레임을 전복해버리는 지금의 언어. 적과 아도 뭉게는 혼돈의 힘. 그래서 유머는 약자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하는 걸까. 풍자가 그렇듯. 지금이라는 공간은 평등하다. '지금'의 권력으로 오늘을 전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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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지금의 공간 ⓒ 홍승희


교도소는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라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확실한 건, 그녀들은 교도소에 들어왔지만, 그녀들의 오늘은 교도소에 갇혀있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알록달록한 옷걸이와 살림을 잔뜩 꾸려놓은 자루, 형형색색의 볼펜이 꽂혀있던 연필꽂이와 빨래에서 오래된 향기를 느꼈다. '평범한 보통의 삶'에서 향기를 만들어가는 오늘을 생각했다. 삶은 오늘일 뿐이다. 그녀들은 그곳이 어디든 오늘을 살림한다.

교도소에서 나온 후 목욕을 하고 빨래를 했다. 권태롭거나 우울할 때는 빨래를 하거나 목욕을 한다. 우울함이 찾아온 오늘 같은 날, 비누향기가 나는 옷을 바람 부는 옥상에 널면서 살아있다는걸 느낀다.
#여자교도소 #교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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