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것이면서 정치적인, 고독

[서평] 고독과 함께 했던 뉴욕 예술가들 다룬 올리비아 랭의 <외로운 도시>

등록 2017.04.28 14:21수정 2017.04.2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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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파트 지하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는 먼저 1층에 섰다. 덩치가 꽉 찬 사람들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사람이 뒤쪽에 있다가 타지 않겠다고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시작했을 때 나는 감지했다.

마지막 사람의 눈빛. 곱슬머리. 주저하는 모습. 조롱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눈빛. 불안. 베일에 가린 표정. 음습한 분위기. 문이 닫히자 나는 며칠 전 내가 겪었던 공포와 소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이웃에게 설명해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느낌보다는 그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충동이었다.


이웃들은 각기 7, 8층을 눌렀다. 나의 집은 9층이었다. 왠지 모를 유대감이 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갑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며칠 전 밤에 제가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저 사람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타고 저 사람은 내리자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저를 보고 씩 웃는 거예요.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저는 저 사람을 전혀 모르거든요."

나는 얼떨결에 내 눈을 맞추고 듣고 있는 남자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남자는 짧은 순간 당혹스러워하는 듯하다가 이내 대답을 했다.

"아, 저 사람요... 약간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 같아요."

그러자 우리 집 바로 아래층을 누르신 아주머니가 답을 하신다.


"못 보던 사람이에요... 얼마 전에 이사 온 것 같아요. 정신에 좀 문제가 있긴 한 거 같은데 남을 해치진 않는 거 같아요. 착해요. 지금도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무서워할까 봐 안 탄 거 같아요. 착한 사람이에요."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7층의 남자는 내렸고, 아주머니는 내게 걱정하지 말고 안심하라는 듯 그가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8층에서 내렸다. 그럼에도 난 며칠 전 나를 돌아보며 씩 웃던 그 공포의 미소를 잊을 수 없어 안심하지 못한 채 집으로 들어섰다. 이유도 없는 '묻지 마' 범죄가 내 생활반경까지 걸어 들어온 것이 채 한 달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낙성대역 4번 출구에서 한 노숙인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여성에게 폭행을 가하고, 옆에 있던 남성(낙성대 의인이라 일컬어지게 된)이 가해자를 잡으려다 부상을 당한 사건. 폭행당한 피해자는, 그 순간 그 근처를 지나가는 '누구나'가 될 수 있었다. 곧, 내가 될 수도 있었다.

헨리 다거의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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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도시> ⓒ 어크로스

엘리베이터 앞에서 두 번 마주친 이웃남자를 보고, 한 남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올리비아 랭의 책 <외로운 도시>에 소개된 헨리 다거.

이 책은 에드워드 호퍼, 앤디 워홀, 데이비드 워나로위츠, 클라우스 노미 등 지독한 고독을 끌어안기도 하고 그에 저항하기도 했던 뉴욕 예술가들의 삶을 농밀하게 파고든 에세이다.

30대 중반에 사랑을 좇아 런던에서의 모든 삶을 접고 뉴욕으로 이주했지만 하루아침에 실연을 당한 저자가 우울증과 고립감에 시달리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단서를 발견하고 쓰게 된 글이란다.

여기에 소개된 예술가 중 나에게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이는 헨리 다거였다. 1892년 시카고의 슬럼가에서 태어난 헨리 다거는 시내의 가톨릭 병원에서 바닥을 청소하는 잡역부였다. 어머니는 그가 네 살 때 누이동생을 낳고 곧바로 돌아가셨고, 누이동생은 바로 입양되었다.

신체 장애인이었던 아버지는 그를 돌볼 수 없어 그는 8살 때 가톨릭 소년의 집으로 갔다가 일리노이 정신박약아동 보호소로 옮겨졌다. 그는 1932년 도시의 황량한 노동자 거주구역인 웹스터가 851번지의 어느 하숙집 2층에 방 하나를 얻어 지냈다. 병이 심해져 요양원에 들어가자 집주인인 사진가는 그 방을 청소하고 40년 묵은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두어 달 동안 그가 발견해낸 것은 300점의 그림과 수천 페이지의 문서들이었다. 그의 첫 소설은 제목도 <비현실의 왕국>. 이 작품의 전체 분량은 1만 5145쪽이나 되며,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소설이라 한다. 상상의 행성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내전이 벌어지는 과정을 기록한 글이다.

마찬가지로 엄청난 분량의 두 번째 소설인 <미친 말: 시카고에서의 더 많은 모험>을 비롯해 그는 자서전과 일기도 남겼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작품을 보여주거나 홍보한 적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1973년 여든한 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오랜 세월 동안 홀로 창조해낸 예술에 대해 단 한 마디의 설명도 남기지 않았다.

다거가 죽은 뒤 40년 동안 미술사가, 학자, 큐레이터, 심리학자, 기자들은 그의 의도와 성격에 대해 열정적으로 다루었다. 자폐증과 정신분열증이라는 사후 진단이 내려지기도 했고, 소아성애자나 연쇄살인범의 정신상태와 다르지 않다는 평이 지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극단적인 폭력과 아동들의 신체 노출 성향 때문에 음란한 그림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는 교육받지 못하고, 무식하고, 고립되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그러나 어느 누구와도 경합될 수 없는 아웃사이더 아티스트로 사후에 자리매김했다.

일상에서는 고단한 잡역부로 살다가 집에만 돌아오면 자신이 창조해낸 비현실의 왕국에서 역동적인 삶을 살았던 헨리 다거. 그의 비참한 현실, 무엇보다 세상에 좀처럼 섞여 들어갈 수 없는 고립감은 다른 곳으로 삐져나올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는 예술로 그것을 돌출시켰다.

헨리 다거의 이야기 중 내게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은 다음 대목이었다. 그가 어린 시절 수감되었던 정신박약아동 보호소는 훗날 밝혀지기로, 아이들이 수시로 폭행과 강간을 당하고, 죽은 수감생의 신체부위가 해부학 강의 자료로 쓰이거나 스스로 거세한 소년이 있는 등 경악스러운 생활여건이 입증된 '학대의 장소'였다. 그럼에도 다거는 "마침내 그 장소를 좋아하게 되었다"라는 글을 남겼다.

저자 올리비아 랭은, 이런 냉소적인 말투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취할 수밖에 없는 자제력의 소산이거나, 폭력과 고립과 층층이 쌓인 공포와 수치심 탓에 입이 다물어지고 마비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해석했다. 누적된 폭력과 고립이 감각의 마비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또한 정신병원에서 나이 든 소년들이 여름을 보내는 주립농장은 훨씬 더 생활여건이 좋았지만, 그럼에도 다거는 보호소를 떠나길 몹시 싫어했다.

"보호소는 내게 집이었다."

애착 실험으로 유명한 심리학자 해리 할로의 원숭이 실험 결과에 따르면, 사회적 동물은 무리에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개체들을 내쫓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놀고 참여하는지, 어떻게 참여하고 처신하는지를 사랑으로 훈련받은 적이 없는 개체는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혀 거부당할 확률이 훨씬 높다. 할로는 애착 실패로 인한 고독의 피해를 입은 개체에 대해 사회가 격리를 유지하려고 애쓴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어린 시절 가정환경으로 인해 애착에 성공하지 못한 고통도 부족하여, 그 결과로 사회 구성원이 될 자격까지 거부당하는 악순환을 겪게 된다. 이런 이들은 계속 위축된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크고, 그 결과 고독과 위축이 패턴화될 확률이 훨씬 높다.

헨리 다거가 완전히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지낸 것은 아니다. 시의 야경꾼으로 일하던 윌리라는 사람과 친구가 되어 그의 가족 모두와 알고 지내게 된다. 하지만 윌리가 이사를 가고 얼마 안 되어 사망하자 다거는 다시 영원히 혼자가 된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윌리의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 언급한다.

고독은 사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것

낙성대 의인이 잡은 가해자는 노숙인이었다. 가해자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여성의 눈과 마주치고 그 눈빛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물론 그 '무시'라는 것은 가해자 스스로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박해감이었다. 가해자의 박해감은 그 여성에게 투사되었고, 일면식도 없고 우연히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을 뿐인 여성은 폭행의 피해자가 된다.

가해자가 가지고 있던 박해감은 오롯이 가해자만의 것이었을까. 가해자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오히려 피해자인 여성에게 동일시하기 쉬운 위치에 있다. 그럼에도, 헨리 다거의 일생, 해리 할로의 실험으로 짐작건대, 어린 시절부터 애착경험에 실패하여 깊은 고립감을 경험한 사람들은 사회 역시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철저히 바깥으로 내몬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해될 여지도 없고 관심을 받을 일도 없다. 때로 그들은 사회로부터 접촉조차 금지된 불가촉천민으로 내몰린다. 그렇게 내몰린 사람들은 파편화된 자아를 접착시키고 통합할 출구를 찾지 못하는 이상, 현실에서 어떤 행위로 돌출될지 모른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사회로 돌아온다.

연고도 없이 묻지 마 범죄에 희생당한 피해자들은 스스로 박해감과 위축감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의 생활반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피해자와 똑같은 두려움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하여 서서히 고립의 섬들은 하나둘 늘어난다. 사회는 불신과 고독, 공격과 방어가 만연한 검은 그림자의 사회로 변모해간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면의 기저에 도사리고 있었던 나는 아래층 이웃이 '착한 사람'으로 본 그 남자에 대해 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었다. 나와 같은 의혹과 의심을 가진 숱한 사람들의 눈길을 이미 받았을 터인 그 남자는 아마도 한편으론 적대감, 아마도 한편으론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이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에까지 한데 섞여 들어오지 못하는 고립을 낳았다.

고독에 대한 올리비아 랭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고독은 사적인 것이면서도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고독은 집단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도시다.…우리는 상처가 켜켜이 쌓인 이곳, 너무나 자주 지옥의 모습을 보이는 물리적이고 일시적인 천국을 함께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 서로 연대하는 것, 깨어 있고 열려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 모르겠다. 이 결론이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역동적으로 실천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냉담해지고 타인을 공격하고 자기 내면의 악을 외부로 쏟아 붓는 사람들을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모두 경험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상생보다는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을 믿는 벼랑 끝 같은 사회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말이다. 내가, 나와는 조금 다른, 그러나 내가 충분히 이해하는 고독을 더욱 깊고 더욱 상시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이웃 남자 한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걷어내는 노력은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안의 두려움과 불안이 사라지면 그를 마주칠 때 경직되는 나의 태도도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지구상의 또 한 사람을 더 두려워하거나 적대해야 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독이 사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것이라면, 연대의 노력도 사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행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독의 지옥'(해리 할로)은 각 사람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발생하는 것인 동시에 모든 사람이 함께 경험하고 함께 풀어가는 것이기에.

다음날 저녁 나는 강아지를 산책시키기 위해 나왔다. 아파트 현관에서 다시 그를 맞닥뜨렸다. 나는 긴장하지 않았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지나왔다. 그도 그렇게 해주었다.

외로운 도시 - 뉴욕의 예술가들에게서 찾은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

올리비아 랭 지음, 김병화 옮김,
어크로스, 2017


#올리비아 랭 #외로운 도시 #헨리 다거 #고독 #낙성대 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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