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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의 거짓말 검증, 다시는 피해자인 척 하지 마라

[리뷰] <그알>이 밝힌 5.18 발포 명령 책임과 헬기 난사의 증거들

17.05.02 12:06최종업데이트17.05.02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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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그알>에서는 전두환 회고록에 나오는 5.18 관련 주장에 대해 살펴 보았다. 회고록에서 자신을 5.18의 희생자라고 칭하는 전두환. 무참히 죽어간 무고한 시민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 SBS


요즘 다시 전두환이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 4월초 회고록 출간하면서 자신이 '5.18의 희생자'라는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어놓은 회고록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29일 <그것이 알고 싶다(아래 그알)>에서는 전두환 회고록에 대해 살펴보았다. 특히 민간인 희생 관련 80년 5월 21일 있었던 집단발포와 헬기사격에 대해 짚었다.

10.26 사태로 김재규의 총탄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12.12 군사반란으로 실권을 쥐게 된 전두환. 이듬해 5월 전국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자 서울만이 아닌 전국적으로 계엄이 확대된다. 모든 정치활동과 집회가 금지되고 언론과 방송은 철저히 검열받는다.

전두환 퇴진과 민주주의를 외친 광주시민들을 향한 신군부의 답변, 그것은 철저한 탄압이었다. 5.18 광주민주항쟁 기간 단 10일 동안 192명의 무고한 시민의 목숨이 희생되었고, 수천 명이 부상당한다. 그렇게 광주를 짓밟은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선거 이른바 체육관선거를 통해 80년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광주시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대통령직을 강탈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오랫동안 광주의 진실은 철저히 감춰졌다. 그러나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 내란혐의로 법정에 섰고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12.12 군사반란과 5.18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혐의로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을 선고 한다. 죄목은 내란목적 수괴, 내란목적 살인 등 총 9가지에 달했다. 그런데 8개월 뒤 전두환은 당당하게 형무소에서 걸어나온다. 사면이 된 것이다.

발포 명령은 누가 내렸는가?

전두환 회고록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로 지칭한다. 5.18은 전두환과 함께 군사반란을 주도했던 노태우의 6공화국 출범 당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이 되었고, 1997년에는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전두환은 5.18을 여전히 불순분자와 폭도에 의한 난동이라고 규정하며 당시의 참상 비극과 자신은 무관하다고 말한다.

광주 5월 18일 오후 작전명 '화려한 휴가'로 공수부대가 투입된다. 광주시민을 제압한 군인들은 전시 전투작전을 수행하는 특수부대였다. 전국으로 계엄이 선포되기 전인 5월 15일, 육군본부의 자료에 의하면 1만개 이상의 진압봉과 방석망 헬멧을 요청하고 지원된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이미 군에서는 광주를 철저히 탄압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비극은 5월 21일 오후 1시 10만 명이 넘는 시민을 향해 계엄군이 집단발포를 한 것이다. 지켜야 할 국민을 상대로 총을 발포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상황, 병원은 환자들로 넘쳤고, 헌혈을 하는 사람들로 줄을 이었다.

군에 의한 집단 발포가 있은 후 시민들도 무장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27일 새벽 계엄군은 전차 18대, APC 장갑차 9대, 500MD헬기(일명 코브라 헬기) 2대, 자동화기와 수류탄 등 살상무기를 동원해 도청을 점령했다. 불과 4시간만에 23명의 시민들이 숨지며 10일간의 광주항쟁은 끝나고 만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양민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시위대들이 먼저 무장을 했다고까지 주장한다. 하지만 계엄사령부에서 작성한 자료에 의하면 시민들이 탈취하였다고 하는 무기는 그대로 돌려줘 회수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시민들이 빼앗은 장갑차에 군인들이 깔려 죽었다는 전씨의 회고록. 당시 사건을 목격했다는 이경남씨(당시 11공수여단 소속)의 증언에 따르면, "군인 한 명이 사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계엄군의 장갑차가 퇴각하는 과정에서 넘어진 부대원을 덮친 불의의 사고였다"는 것이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희생된 것은 군인이 아닌 비무장 상태의 광주 시민들이었다.

5.18 당시 시민들이 탈취하였다던 칼빈소총은 그대로 돌려주었고, 군기록에도 모두 회수하였다고 나온다. ⓒ SBS


그알은 당시 11공수여단장이었던 최웅씨를 찾아갔지만 문전박대 당한다. 11공수여단 63대대 부대원들은발포명령권자가 누구인가하는 문제는  37년째 베일에 쌓인, 일부러 풀지 않은 의혹이라고 말한다. 결정권자는 당시 현장에 있던 공수여단장이 아니라,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이희성이나 보안사령관 전두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88년 청문회에서 발포명령을 하지도 발포명령을 보고 받지도 않았다고 모로쇠로 일관하던 이희성. 명령은 없었지만 시민들을 상대로 한 발포는 정당했다는 것이다. 89년 청문회에 출석했던 전두환도 모로쇠였다. 발포명령은 없었고 현장 지휘관들의 판단에 따른 자위권 발동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발견된 기무사의 군기록에 의하면 발포를 했던 5월 21일 육군회의 자료에 자위권 발동을 하고 시민들에게 집단발포를 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바로 '광주권 충정 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이라는 제목 하에 말이다.

당시 군수뇌부가 모인 자리에서 자위권 발동을 지시한 전두환. 최근 발견된 기무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 육군회의자료에 이 같은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 SBS


장관, 총장, 군사령관, 합수본부장, 수경사령관, 특전사령관, 육사교장 등 군 최고수뇌부가 모인 자리에서 자위권 발동을 지시한 사람은 전두환이었다. 이는 신군부가 편찬한 5공전사에도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는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내용으로 뒷받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여전히 발포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헬기에서 시민들을 향해 난사

5.18 당시 전투헬기가 투입된 장면이 찍힌 사진. 헬기난사가 있었던 정황과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다. ⓒ SBS


5.18 당시 수십대의 헬기 투입이 있었던 사실이 적힌 군기록. ⓒ SBS


광주 전일빌딩에는 5.18 당시 헬기사격의 탄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국과수에서 8개월에 걸친 조사결과, 헬기에 의한 사격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 SBS


전두환은 헬기 사격도 부인한다. 하지만 작년 헬기사격에 대한 직접적 증거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광주시에서 전일빌딩을 새로운 문화창작공간으로 새단장을 하는 과정에서 헬기 사격으로 의심되는 탄흔이 발견된 것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무려 8개월 동안 감식을 벌인 결과, 전일빌딩 10층 실내에서만 177개의 탄흔을 발견한다. 김동환 국과수 총기안전실장은 "10층보다 높은 곳에서 쏜 것으로 보이는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있는 탄흔은 헬기에 거치된 총기(기관총)로 사격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지적했다.

헬기사격 목격담은 또 나온다. 군대에서 전투헬기를 몰아봤던 최형국씨는 분명히 공중에서 헬기가 무장사격을 하는 것을 생생히 목격했다고 증언한다. 1980년 9월 전투병과 교육사령부에서는 '광주소요사태 교훈집'을 통해 AH-1J 2대, 500MD 12대 등 총 31대의 헬기가 있었음을 명시했다. 헬기들의 구체적인 작전명령은 공중 화력지원. 항공여단의 작전 지원 내용에도 22대의 500MD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두환, 북한군 개입설 주장...근거는 지만원

지만원의 북한특수군 개입설을 그대로 받아적은 전두환 회고록. 지만원이 북한 주요인사와 동일인물이라고 지목한 이들은 5.18 피해자로 광주에 살고 있다. 이들은 현재 지만원을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한 상태다. 맨아래 (좌) 곽희성씨, (우) 양기남씨 ⓒ SBS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80년 5월 중순경 북한의 남침강행 첩보를 입수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당시 CIA는 북한의 어떤 징후도 없다고 밝혔다. 또, 남북고위 당국자간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북한의 침투에 대해 우리정부는 항의하지 않았다. 전두환 회고록의 내용이 심히 의심되는 대목이다. ⓒ SBS


지만원씨는 5.18 당시 북한 특수군 600명이 침투하였다고 주장한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북한특수군 개입설을 들며 그 근거로 지만원의 주장을 들었다. 지만원도 '5.18 진실 전국 알리기 단합대회'에서 전두환이 회고록에서 자신의 5.18 북한군 개입설 주장이 담긴 책을 인정했다고 말했다. 지만원의 북한군 개입설의 근거는 북한의 주요인사들의 사진과 5.18 당시 시민들의 사진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알은 영상공학전문가의 도움을 통해 지만원이 근거로 든 비교 사진을 검증했다. 전문가는 분석결과 다른 시기 다른 각도의 사진을 비교하는 것은 억지라고 말했다. 심지어 지만원이 북한군 차수 최룡해로 지목한 이는 광주에 살고 있는 양기남씨였다. 또, 황해남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목된 사람은 곽희성씨였다. 5.18 구속부상자회이기도 한 이들은 현재 지만원씨를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한 상태다.

또,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80년 5월 15일부터 20일까지 북한의 남침강행 첩보가 있었다고 적었다. 미국 정부의 5.18 관련 기밀문서(일명 체로키 파일)을 한국에 공개한 미국탐사 보도 기자 팀 셔록은, 80년 5월 23일 CIA 관리의 "현재 북한 내 상황을 살펴보면 개입할 만한 징후가 전혀 없다"라는 녹취기록을 들며 "당시 CIA가 북한군의 개입이 전혀 없다고 이야기 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김희송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 교수는 "5월 22일 판문각에서 남북 총리 회담을 위한 제8차 실무대표접촉이 있었고, 10월까지 지속적으로 남북고위급 회담이 열렸는데 북한군 침투에 대해 항의한 사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왜 이 시점에서 전두환은 회고록을 냈나?

대법원에서 확정판결 난 사실을 부정하고 자신은 5.18 광주항쟁과는 무관하다는 전두환. 회고록을 통해 자신은 5.18의 억울한 희생자라고 항변한다. 그 근거는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오히려 회고록에 대한 반박으로 전두환이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발포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이 더욱 높게 제기된다.

왜 전두환은 이 시점에서 회고록을 냈을까? 박근혜가 탄핵으로 물러나고 조기대선 국면에 들어선 시점에서 말이다. 그렇게 억울했으면 97년 대법원 확정 판결 전에 법정에서 모든 증거를 내놓고 반박을 했어야 옳았다. 그런데 확정판결로 무기수가 되었다. 비록 사면이 되었지만 전두환은 내란, 시민 학살의 중대 범죄자이다. 몇개월 형을 살았던 것으로 자신의 죄값을 치렀다고 느끼는 것일까? 이것은 이희성의 그알과의 인터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희성도 사면을 받아 교도소를 나왔다. 덕분에 이희성은 몇개월의 징역형만 살았다. 그는 "내 책임은, 내 죄는 다 벌을 받았다"라고 말한다.

전두환은 회고록 말미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 가능한 조사만이라도 이뤄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국회에서는 헬기사격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국방부 역시 향후 제정되는 법률에 적극적으로 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과연 향후 제대로 된 진상조사가 이루어질지 두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최주호 시민기자의 오마이뉴스 블로그(http://blog.ohmynews.com/rkeldj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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