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상품화' 투우, 1대 1 승부는 없었다

[세계일주 인문기행 - 열 번째 편지] 근대와 세계화의 시작점, 리스본에서 세비야까지

등록 2017.05.06 18:09수정 2017.05.07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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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신영복의 세계여행)을 처음 접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문명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따뜻한 글과 그림 엽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그 감동으로 막연하게 세계일주에 대한 꿈도 품게 됐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2017년, 배낭여행자가 되어 그 꿈을 실행에 옮깁니다. 당신이 보낸 첫 번째 엽서에 적혀있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에 무모한 용기를 얻어 여행지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이 여행기는 당신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당신들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기자 말

비행기를 타고 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대륙으로 넘어 갔습니다. 동이 틀 무렵 포르투갈 리스본 공항을 나오며 유럽에서의 첫 공기를 들이 마셨습니다. 거리의 풍경과 사람들로부터 받은 리스본의 첫 인상은 대항해시대의 화려함 보다는 노란색 트램의 감성이 더 어울리는 도시였습니다.


처음 발걸음을 옮긴 곳은 리스본에서 1시간 남짓한 근교에 위치한 호카곶이었습니다. 바로 유럽의 땅끝 마을입니다.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당신이 20년 전 세계기행의 첫 번째 장소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향해출항했던 우엘바 항구를 선택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지리상으로는 유럽의 끝이지만, 인류사적으로 보았을 때 이곳은 끝이 아닌 시작의 땅이라 할 만합니다. 유라시아대륙의 서쪽 혹은 지중해 언저리에 머물러 있던 유럽이 세계라는 커다란 무대로 진출하여 세계화의 시작, 근대화의 시작을 열어 젖힌 장소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주도의 해안풍경과 흡사한 절벽에 걸터앉아 멀리 대서양의 평온한 바다를 바라봅니다.

"그들은 왜 이 바다를 건너고자 했던가? 바다 너머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던가? 바다를 건넌 후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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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땅끝 마을 '호카곶'에서 바라보는 대서양 ⓒ 정수현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는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약 8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영토를 회복하는 전쟁의 과정(레콩키스타)에서 기독교 신앙을 위해 기꺼이 무력을 행사하는 기사계급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어느 역사에서 보던지 무력으로 흥한 집단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칼잡이'들은 내부적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 마련입니다. 최고 권력자가 이들을 처리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는 외부로 내보내는 일입니다. 

15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해양진출을 정치적으로 설명함에 있어 이와 같은 중하위 기사계급의 존재는 상당히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중해 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려왔던 이탈리아 지역의 상인들은 15세기 무렵 동쪽의 투르크 세력이 강성해지자 위기감을 느끼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게 됩니다. 지중해 서쪽으로 눈길을 돌린 자본과 인력은 이베리아 반도로 모여 들었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역시 이탈리아 출신의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인 동기가 유럽의 해양진출에 중요한 이유가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지상낙원이 아시아의 끝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동양에 대한 막연한 동경, 중세적인 세계관에 기반한 기독교적 신념이 정치, 경제적 이유와 더불어 바다를 향한 유럽의 도전의지에 불을 지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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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테주강에 위치한 '발견의 탑'. 포르투갈 해양진출의 기틀을 닦은 엔히크왕자와 바스코다가마, 콜럼버스, 마젤란 및 해양활동과 관련된 학자, 해양사, 성직자 등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 위치는 바스코다가마가 첫 출항을 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 정수현


바다는 원래 유럽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해양진출이 있기 전에 이미 아랍과 동남아의 해양세력은 인도양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었고, 1405년부터 1433년까지 대규모로 진행되었던 명나라 정화 함대의 해양원정 사례도 있었습니다. 로마와 몽고의 역사에서 보듯이 정복전쟁을 통해 세계를 하나로 통일하고자 했던 대제국의 야망도 끊임없이 존재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다를 통한 유럽의 팽창을 세계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그 이전 시대와는 확연히 다르게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륙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하나의 장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좋든 싫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습은 15세기 이후 유럽이 주도한 역사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아메리카대륙과 오세아니아대륙에 존재하던 원주민의 대다수는 사라졌고, 그 자리는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 이주자들과 아프리카 노예무역으로 유입된 흑인들로 채워졌습니다.  라틴아메리카는 원주민, 백인, 흑인의 혼혈을 통해 아예 새로운 인종이 탄생했습니다.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도 식민지배를 거치는 과정에서 영어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생겨났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영향력이 확대 되었습니다. 

별다른 생각 없이 쓰고 있는 '인디언'이라는 표현, 스페인 국왕 필리페 3세의 이름에서 비롯된 국호 '필리핀', 아르헨티나 남단의 '마젤란해협' 등 지금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대부분도 모두 유럽의 팽창이 남긴 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명과 문화권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재배작물, 음식, 의류소재, 음악 등 생활문화는 물론이요 질병과 자연환경에 이르기까지 대항해시대가 가져온 변화는 말 그대로 '세계적인 변화'였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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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투우사와 소의 1:1 싸움이 아니라, 철저한 각본에 따라 진행되는 하나의 쇼였습니다. ⓒ 정수현


신대륙 무역의 독점항으로 과거 영광을 누렸던 세비야로 이동했습니다. 세비야는 흔히 스페인하면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도시였습니다. 여행객의 호기심으로 스페인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투우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습니다.

투우의 진행방식은 애초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한마디로 투우사와 소의 '1:1 맞짱 승부'는 없었습니다.  경기라기 보다는 쇼에 가깝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물라토라고 하는 붉은색 천과 검을 든 마타도르(메인 투우사) 1명, 분홍빛 천을 든 보조 투우사 5~6명, 소의 등에 작살을 꽂는 역할을 하는 사람 2명, 말을 타고 창으로 소를 찌르는 사람 2명이 하나의 팀을 이룹니다. 

엄숙한 격식과 배경음악을 뒤로 하고 이들이 등장하고 나면, 24시간 동안 빛이 완벽하게 차단된 공간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대로 받은 소가 경기장으로 뛰쳐 들어옵니다. 

정해진 각본에 따라 보조 투우사들이 소를 먼저 흥분시켜 힘을 빼고, 이후 창과 작살로 소를 연달아 찔러 피를 흘리게 합니다. 마타도르의 역할은 후반부가 되어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소는 피를 흘리며 물레타를 향해 돌진하고 마타도르가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장면이 반복되면서 투우장은 사람들의 '올레~'를 외치는 함성으로 고조됩니다. 소의 힘을 다 뺀 후 마지막에 마타도르는 검으로 소를 찔러 숨통을 끊습니다. 숨이 멎은 소는 세 마리의 말들에 의해 질질 끌려 나가고, 장엄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마타도르는 환호하는 관객들을 향해 마지막 세레모니를 하며 쇼는 마무리됩니다.

철저히 짜여진 각본 속에서 하나의 생명이 죽어가는 장면을 즐기는 투우장은 마음이 매우 불편한 공간이었습니다. 내가 살지 않는 다른 지역의 문화를 단순한 잣대로 재단하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투우는 인간의 잔인한 상상력이 만들어 낸 '폭력의 상품화'라는 박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투우가 붐을 이루게 된 시기가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의 해양진출, 식민지배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 우연의 일치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희생을 딛고 이루어진 서구 중심의 근대화, 세계화의 장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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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대륙에서 수탈해 온 금으로 가득채워진 세비야 대성당 내부 주제단. 이 황금의 봉헌을 그리스도가 과연 기뻐했을까? ⓒ 정수현


유럽의 팽창이 가져온 세계화와 근대화의 가장 강력한 영향은 어쩌면 우리의 의식구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콜럼버스 이후 지금까지의 세계 질서는 본질적으로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유럽의 근대사는 한마디로 나의 존재가 타인의 존재보다 강한 것이어야 하는 강철의 논리로 일괄된 역사라고 했습니다. 강철의 논리로 희생된 나라들마저도 그러한 논리를 모방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근대 이전의 인류역사 역시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근대화 이후의 세계는 다른 존재를 지배하고 흡수하려는 욕망이 강력해지고 폭력이 더욱 광범위하게 행사된 시대로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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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스페인 땅에 발을 딛지 않겠다는 콜럼버스의 유언에 따라, 그의 관곽은 공중에 떠 있는 채로 세비야 대성당 내부에 안치되었습니다. ⓒ 정수현


세비야 대성당에는 그 유명한 공중에 떠 있는 콜럼버스의 관곽이 있었습니다. 해양원정의 후원자가 되었던 스페인 왕실이 그에게 등을 돌린 뒤, 찾는 사람 없이 쓸쓸한 노후를 보낸 콜럼버스는 스페인을 저주하며 다시는 그 땅에 발을 딛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다짐과는 달리 세비야 대성당 뿐만 아니라 스페인 전역에서 그는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뿐만 아니라 '신대륙 발견'이라는 표현에 호응하는 세계의 중심부에서 그는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에 도착했던 10월 12일을 미국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콜럼버스의 날'로 기념합니다. 물론 정반대의 평가 역시 존재합니다.  볼리비아에서는 같은 10월 12일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부르고 있고, 우루과이 원주민들은 10월 11일을 '마지막 자유의 날'로 기념하기도 합니다.

멕시코에서는 그날을 '인종의 날'이라는 표현을 써서 원주민, 스페인 이주자, 아프리카 흑인들의 피가 섞여 하나의 새로운 인종이 만들어졌다며 중립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콜럼버스는 더 이상 자연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죽은 콜럼버스가 오늘의 다양한 평가를 접하더라도 우쭐하거나 섭섭해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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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 알카사르 궁전. 오른편 건물이 스페인의 해양사업을 관할하던 무역청이 설치되었던 장소였고, 여기에서 콜럼버스와 그의 후원자 이사벨 여왕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 정수현


세비야의 알카사르 궁전은 스페인의 해양무역을 관할하는 무역청이 설치되었던 장소입니다. 여기서 바다를 건너 한몫 단단히 챙기고 싶던 야망에 넘치는 항해사와 그의 후원자가 되었던 이사벨 여왕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궁전을 둘러보며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그날의 선택이 인류의 역사에 이처럼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짐작이나 했을까?'

장구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 작은 인간의 행위가 어떠한 영향과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전망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역사의 강물은 이미 바다로 흘러갔고, 우리에게 남은 몫은 '앞으로 어떤 미래, 어떤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성찰과 선택 뿐입니다.

강철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의 시작이 우연처럼 보이는 하나의 작은 선택과 행동에서 비롯되었듯이, 그러한 논리를 넘어서는 세상에 대한 전망과 실천도 어쩌면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먼 훗날 돌아보면 역사의 거대한 흐름이 바꾸었을 그 물줄기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그것이 무엇일런지... 이제는 옛 추억과 이야기만 남아있는 세비야에서 생각에 잠겨 봅니다.
덧붙이는 글 2016년 12월말부터 약 1년간의 일정으로 세계일주 인문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리스본 #세비야 #콜럼버스 #대항해시대 #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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