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안84씨, '서른 살 여자'가 뭐 어떻다고요?

[서른 넘은 여자 ①] 복학왕 작가 김희민씨에게 쓰는 공개편지

등록 2017.05.11 15:44수정 2018.12.2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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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유독 여성만 나이를 기준으로 '값'을 매깁니다. 한때는 25살 넘기면 '떨이 신세'라며 여성을 크리스마크 케이크에 빗댔죠. 지금은 그 기준이 조금 늦춰진 듯하지만 '서른 넘은 여자'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절대적입니다. 서른 넘으면 인생 끝날 것 같나요? '서른 넘은 여자'들이 서른 이후의 삶을 이야기 합니다.[편집자말]
기안84, 김희민씨.



안녕하세요. 전 88년생… 30살이에요. 논란이 됐던 <복학왕> 141화 '전설의 디자이너'편 노안숙씨와 동갑이에요.


 
"내 나이 30살. 88년생…
아무리 화장을 해도,
아무리 좋은 걸 발라도 세월을 지울 수는 없었다."

"명품으로 날 꾸며 보지만
보세로 꾸민 신입생이 훨씬 이쁘다."
 

이 대사였죠. 88년생 '여자'들 속을 뒤집어놨던. 올림픽둥이로서 새 학기마다 선생님들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던 '우리'가 어느덧 서른이 됐네요. 기안84씨 덕분에 요즘 매일매일 제 나이를 의식하고 있어요. 88년생은 지금 서른 살이다, 하고.




제 분노의 클라이맥스였던 "누나는 늙어서 맛없어! 안 돼! 안 돼!"는 삭제돼 있더라고요.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로 바뀌어 있던데… 잘하셨어요. 대체 어떤 여자가 스스로를 '맛없다'고 합니까. 일부 남자들의 굴절된 욕망이 투영된 형용사 '맛없다'가 '노안에다가 서른 살인 여자'를 한없이 폭력적으로 수사해버렸죠. 늙고 못생긴 여자를 그저 못난 존재로 치부해버리고 싶은 치기어림. 주인공 우기명의 옷을 입고 희망을 얻는다는 그럴싸한 결말은 위선적으로까지 느껴졌어요.


 

기안84가 그린 웹툰 <복학왕>의 한 장면. 서른 살 여자를 "맛없는 존재"로 묘사해 논란이 일었다. ⓒ 네이버




대사 교체는 편집진의 결정이거나, 비난 여론을 의식한 임시방편 조치였을까요.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사과문도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 생각해요. 눈치껏 대사를 바꾼 건 잘하신 것 같고요. 사실 제가 기안84씨에게 바라는 게 딱 그거거든요. '저희' 눈치를 조금이라도 보고 사는 것. 대학에서 페미니스트 언니들을 만나 감화한 지 10년. 그 이상 기대는 잘 안 하게 돼요. 공감과 이해까지가 어찌나 요원하던지요. 인간은 소통 불가능한 존재인가 지레 포기한 적도 많아요.



그래도 대학 때 같이 페미니즘을 공유했던 '친구 남자들'에 대한 고마움을 상기하면… 기안84씨한테도 뭔가 얘기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우리 어릴 때 공중도덕도 일단 외웠잖아요. 선 암기 후 이해. 이해는 아직 안 가지만 예의니까 일단 체득하기. 한국의 페미니즘이 새로운 윤리 창조의 계절을 보내고 있는 지금, 최소한 찬물을 끼얹지 않는 에티켓이 무엇인지는 아셨음 해요.



여자 서른 살, 노안, 맛없어... 이게 뭔가요?


 

기안84의 웹툰 <복학왕>의 한 장면. 서른 살 여자에 대한 왜곡된 묘사로 논란이 일었다. ⓒ 네이버


아마 잔소리 듣는 기분으로 심드렁하게 스크롤을 쭉 내려버릴 것 같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얘기를 해보렵니다. 기안84씨 처음 TV에서 봤을 땐 꽤 호감이었어요. 왜 저런 식의 '기행'을 즐길까? 명색이 스타 웹툰 작가가 네이버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 커피포트에 라면이랑 족발을 넣고, 연말 시상식에선 패딩을 입고. 머리도 직접 자르고. 옷도 잘 안 사 입고. 왜 그럴까? 나와 다른 신 유형, 없던 캐릭터, 괴짜같지만 왠지 인간적이었어요.



가수 조현아씨는 그런 당신을 두고 "저건 자본주의에 대한 반항심이다"라고 했고 화면 속 사람들은 와하하 웃었죠. 도저히 이해는 안 가지만 어딘가 웃겨서 계속 보게 되는 같은 반 남자애 같았어요.



꽤 많은 '서른 살'들이 '서른 살'에 대해 의식하잖아요. 딱히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서른 살'에 집착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있고. 저도 잡티랑 눈가 주름도 신경 쓰이고 내 커리어는 잘 흘러가고 있는 건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가, 김광석과 비슷한 나이가 돼가네, 하면서 마음이 뒤숭숭하던 찰나에 인터넷 게시물로 돌아다니는 저 컷을 보니 짜증이 확 나더라고요. "뭐라는 거야. 기안84 니가 뭔데?" 이런 말 튀어나왔고요.



'여자 서른 살'의 고민을 외모 걱정 하나로 '일축'해 버린 기분. 나의 '서른 살'이 한순간에 무시당한 기분이었어요. 본인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겠지만 '여자 노안'에 '여자 서른 살'과 '맛없어'를 욱여넣은 그 짓궂음은 절대 순수해질 수 없어요.



뭐 백 번 양보하고 보면 노안으로 마음 고생하는 캐릭터 심정을 리얼하게 대변하는 대사로도 볼 수도 있죠. 우리나라처럼 '동안'에 집착하는 나라도 없으니까. 또 자존감 없는 노안숙씨 캐릭터를 극단적으로 묘사하고 싶은 창작자로서의 순수한 욕심도 이해가요. 하얗게 뜬 화장과 숱 없는 머리칼로.



80화 '잘생긴 남자 1편'에도 비슷한 대사가 나오더라구요. "183센티 65키로. 몸도 모델 같아서… 싸구려 보세를 입어도 화보 같다" 그런데 왜 두 대사는 같은 선상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같은 '보세' 옷으로 인간의 미추를 비교하는데, 왜 두 대사가 놓여진 맥락이 다르게 느껴질까요. 미와 추라는 보편적 화두에 굳이 '여자 서른 살'이라는 프레임을 씌운 순간 여자 독자들의 감정이 왜 확 끓어올랐을까요. 저희가 그저 예민한 걸까요?



그건 여자들의 나이를 두고 크리스마스 케이크나, '꺾였다' 등의 표현으로 존재 가치를 폄훼당하는 설움을 남자 분들보다 많이 겪었기 때문입니다. 남자도 마찬가지라고 다를 게 없다고 계속 생각하신다면 이 편지도 다 소용없지만요. 



같이 좀 편하게 살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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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9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미디어센터에서 열린 <2016 MBC 방송연예대상>에 참석한 기안84. ⓒ 이정민


<복학왕>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알아요. '논스톱'이나 '남자셋 여자셋'이 외면했던 현실 속 청춘 군상들의 내밀한 일상을 사실적인 블랙코미디로 승화시키는 기안84씨의 묘사력. <IZE> 위근우 평론가가 <복학왕>을 두고 "섣부른 희망도 기만적인 자기연민도 없이 그려진 기안대의 풍경은 동시대 청년 세대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보고서 중 하나"라고 했던 평에도 공감했어요.



신입생을 향한 일부 남자 복학생들의 너절한 욕망,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인터넷 쇼핑으로 옷을 사는 데 허송하는 '옷순이'. 학력 콤플렉스로 뒤엉켜 있는 '지잡대'의 서열·음주 문화, 흙수저 대학생들의 짠내 나는 알바 분투.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내 안의 좀스러운 구석들까지. 기안84라는 사람은 스토리를 촘촘하게 계획하지 않는 걸로 유명하지만 자신의 눈높이를 철저하게 캐릭터들과 같이 하는 사람이구나, 느껴져요.



하지만 노안숙씨를 다루는 방식은 한없이 폭력적이었어요. 저는 더 이상 <복학왕>이 '내 이야기' 일 수가 없었죠. 저는 그녀에게 마음을 이입할 수밖에 없었고요. 형식논리로 반박하는 사람들은 늘 있겠죠. 가령 88년생 서른 살 남자 노안국이란 캐릭터가 남자 신입생을 보며 "아무리 좋은 걸 발라도, 명품을 입어도 보세 블라블라" "난 늙어서 맛없어" 해도 우린 괜찮은데? 쿨하게 '예민한 여자들'을 무시해버릴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여자들이 쿨해질 수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나이로 여자를 폄하는 마초들의 농담 뿐만이 아니에요. 열세 살 이후로 꾸준히 마주치는 변태들, 쩍벌남인 척하며 허벅지를 갖다 대는 추행남, 여자 간호사가 없으면 항상 불안한 병원 진료실, 팔뚝 살을 주물럭거렸던 서른 살짜리 남자 선생, 브래지어 끈을 당기고 도망갔던 추억의 동급생들, "야 박소현 생리 중이다 지금~!" 고래고래 외치며 복도를 향해 멀어지던 놈 뒤통수까지.



아직도 이따금씩 혈압을 올리는 우리의 지난 추억 때문에 쿨해질 수 없노라고. 당신들의 쿨함에 위축된 세월을 많이 보냈노라고. 같이 쿨해지고 같이 자유롭게 좀 살자고 말하고 싶었어요. 엊그제 방송 보니까 자동차를 형형색색 페인트로 칠하시며 "더 이상 남의 시선, 눈치 보고 살지 않겠다" 하시는데 살짝 아연했습니다. 그 다짐과 자유분방함은 부럽고 좋으나 저희 눈치까지는 의식해주시길. 같이 좀 편하게 삽시다.   
 
#복학왕 #노안숙 #기안84 #서른살 #김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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