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도왔고, 박근혜 탄핵한 '알 수 없는 힘들'

미국 도움으로 성공한 5.16 잔재, 국민의 힘으로 무너졌다

등록 2017.05.16 09:32수정 2017.05.16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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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관구 사령부 터인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에서 찍은 박정희. ⓒ 김종성


1961년 5월 16일 0시 30분경. 박정희 소장이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의 육군 6관구 사령부에 나타났다. 오늘날 이곳에는 서울지하철 2호선 문래역과 문래근린공원이 있다. 박정희가 나타난 것은 참모장실에서 쿠데타 동지들과 회합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사령부 본관에는 박정희 체포조 수십 명이 대기 중이었다. 2시간 반 전인 5월 15일 밤 10시경, "6관구 사령부에 모인 쿠데타 장교들을 체포하라"는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의 명령이 있었다. 

이 명령에 따라 헌병차감 이광선 대령이 이끄는 헌병 수십 명이 수갑과 포승줄을 든 채 박정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6관구 방첩대 정명환 중령도 있었다. 장도영 총장의 명령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박정희 체포를 돕고자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은 사전에 이미 노출돼 있었다. 그것도, 오래전부터였다. 8개월 전인 1960년 9월에는 정태섭 서울시경 국장이 용산경찰서 정보망을 근거로 박정희 쿠데타 음모를 현석호 내무장관에게 보고했다. 용산경찰서 관내에 육군본부가 있었기에, 이곳 경찰들이 쿠데타 음모를 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일한 보고가 장면 총리실에도 들어갔다. 총리실 직원들은 별도의 루트를 통해 쿠데타 첩보를 입수해서 장면에게 보고했다. CIA 한국 지부도 마찬가지였다. 이들도 1961년 4월 말 박정희의 쿠데타 음모를 인지했다.

이처럼 1961년 5월 16일 이전에 한국 정부와 육군본부와 미국 CIA는 박정희의 쿠데타 음모를 알고 있었다. 박정희는 미국도 알고 정부도 알고 육군본부도 다 아는 상태에서 5월 16일의 쿠데타 실행에 나섰던 것이다.

5월 15일 밤중에 내린 장도영 총장의 지시에 따라, 서울지구방첩대 요원들이 서울시 중구 신당동 자택 앞에서부터 박정희를 감시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박정희가 집을 나서 6관구 사령부를 찾아간 것이다. 이곳에는 박정희의 동지들보다도 그를 기다리는 체포조가 훨씬 더 많았다.


반란 음모 드러났지만, 5.16이 성공했던 까닭

상식대로라면 박정희는 5월 16일 0시 30분경 체포되었어야 했다. 5월 16일은 쿠데타가 성공한 날이 아니라, 그가 감옥에 들어간 날로 기록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무도 박정희를 체포하지 않은 것이다. 체포 책임자인 이광선 대령은 체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방첩대 정명환 중령도 마찬가지였다.

이때의 상황이 박정희 전문가인 정치학자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 제3장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헌병대와 방첩대의 태도를 보고 자신감이 생겼는지, 박정희는 그들 앞으로 담담하게 걸어갔다. 그러더니 힘차게 일장연설을 했다. 쿠데타의 당위성을 힘껏 역설한 것이다.

박정희는 연설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그날의 연설을 감동적으로 마쳤다 하더라도, 참모총장의 명령을 받은 헌병들이 반역자의 말에 감동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그런 일이 벌어졌다. "혁명을 도와달라"는 박정희의 말을 듣고 이광선 대령은 체포를 포기했다. 정명환 중령은 그 자리에서 쿠데타군에 가담했다.

이런 일이 6관구 사령부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날따라 대한민국 육군에는 '혁명 연설'에 감동되는 군인들이 많았다. 쿠데타 진압군의 주력 부대로 예정되어 있었던 1군 사령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쿠데타군에 대한 동조세력이 순식간에 불어났다.

당시의 쿠데타 주역들은 그 상황을 놀랍고도 이상하게 받아들였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박정희의 쿠데타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미군이 서울에 주둔하면서 정치·군사를 좌지우지할 뿐 아니라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까지 가진 나라에서, 미군의 묵인 없이 그렇게 쉽게 쿠데타가 성사될 수는 없었다. 

당시의 국제정세도 박정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은 유럽의 경제성장과 아시아·아프리카 제3세계 국가들의 비중립 노선으로 인해 영향력의 약화를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굳건히 해둠으로써 세계적 차원의 패권 약화를 방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미국 주도의 한미일 삼각 동맹을 공고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제대로 협조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자신의 독립운동 경력과 국내의 반일 정서 등을 고려해 한미일 삼각동맹 결성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다. 한미동맹 강화에는 찬동했지만, 한일동맹 결성에는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이승만을 앞세워 무리하게 한일동맹을 추진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삼각 동맹에도 차질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박정희의 쿠데타를 방치하다

그래서 미국 입장에서는, 일본에 대해 유화적 입장을 갖고 있으며 국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한국 정권의 출현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런 정권이 출현해야 한일동맹을 체결하고 한미일 삼각 동맹을 결성할 수 있었다.

이런 필요에 부응하는 인물이 박정희 소장이었다. 미국은 5·16 전부터 남로당 경력 때문에 박정희한테 의구심을 품기는 했지만, 박정희만큼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인물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미국 입장에서는 박정희의 쿠데타가 실패하지 않도록 놔두는 것이 유리했다. 이와 관련하여 2001년 5월 10일 한국정치외교사학회가 주최한 '5·16의 정치외교사적 평가' 학술대회에서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이런 요지의 발표를 했다.

"박정희의 쿠데타 음모는 다수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저지하지 않은 기묘한 것이었다. 미국이 거사를 방임했기 때문에 쿠데타가 성공했는지 아니면 미국이 방심한 결과로 쿠데타가 성공했는지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쿠데타가 혁명으로 둔갑하는 데는 미국의 묵인이 결정적이었다. 미국은 한국에서 어떤 인물이 반공을 만족스럽게 수행할 수만 있다면, 그가 비민주적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를 유지시킨다."

이 같은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쿠데타가 발생한 5월 16일 오전부터 '배후에 미국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수밖에 없었다. 쿠데타군이 상황을 장악한 뒤인 오전 10시경에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이 "장면 정권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내긴 했지만, 장면 정권이 이미 힘을 잃은 뒤에 나온 그 성명은 박정희를 배척하기 위한 성명이 아니라 미국 배후설을 잠재우기 위한 성명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장면 정권을 진심으로 지지했다면 서울에 있는 미군을 동원했을 것이다.

미국의 진심은 하루도 안 돼서 드러났다. 5월 17일 24시를 기해서 미국 정부는 중립 모드로 돌아섰다. 그보다 몇 시간 전에 주한미군사령부와 주한미국대사관에는 '정부가 쿠데타 진압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의 전문이 도착했다. 미국의 쿠데타 지지 입장이 서울에 명확히 도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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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박정희도 미국의 힘을 얼마 안 가서 인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쿠데타를 성사시킨 그 날 아침에는 그것을 감지할 겨를이 없었다. 미국이 아니면 쿠데타를 성사시킬 수 없다는 구조적 현실을 그날 아침에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점은 5월 16일 오전 7시경에 그가 육군본부 건물에 들어설 때 보여준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그때 육본 입구에서 박정희는 미 고문관인 하우스 장군과 부딪혔다. 그 장군이 박정희에게 뭐라고 말을 건넸다. 박정희 쪽에서는 그 말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다. 상대방이 쿠데타를 비난하는 줄로 이해한 것 같다.

그래서 박정희는 미군 장군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우리가 살길은 이것뿐이야. 너는 간섭하지 말고 비켜!" 쿠데타 직후의 박정희는 정신이 없었기 때문인지, 쿠데타와 미국 사이의 함수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을 장애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날 새벽의 박정희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자기를 돕는다고만 느꼈을지 모른다. 자신을 체포하러 온 군인들이 자기 말을 듣고 체포를 포기하지 않나, 방첩대 장교가 자기 연설을 듣고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나, 같은 일들이 다른 부대에서도 생기지를 않나, 박정희는 알 수 없는 하늘의 힘이 자기를 돕는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5.16 잔재를 청산한 것은 '국민의 힘'

그렇게, 박정희가 생각하기에 다분히 행운의 연속 속에 성사된 5.16은 1979년의 김재규에 의해 1차적으로 무너지고 2016년과 2017년의 박근혜에 의해 2차적으로 무너졌다. 박정희 사후에도 오랫동안 생명력을 발휘하며 2012년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까지 영향을 줬던 5·16은 박근혜의 실정과 태만으로 인해 2016년 12월 9일의 탄핵소추 및 직무 정지와 2017년 3월 10일의 탄핵 결정 및 파면으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5.16의 잔재는 한국에서 상당 부분 청산되었다.

2016년과 2017년에 5·16이 2차적으로 무너지는 과정에서도 '알 수 없는 힘'이 작동했다. 5·16 새벽의 박정희는 미국의 힘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박정희한테는 미국의 영향력이 '알 수 없는 힘'이었다. 2016년과 2017년의 박근혜는 국민의 주권과 영향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박근혜한테는 국민의 역량이 '알 수 없는 힘'이었다. 

언론에 보도된 측근들의 말에 따르면, 박근혜는 3월 10일에 파면되기 직전까지도, 3월 31일에 구속되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운명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설마 그런 일이 있으랴는 식이었던 것이다.

그처럼 박근혜는 파면 결정 직전과 구속 직전까지도 자신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왕조시대도 아니고 국민주권 시대에 대통령이 된 사람치고는 국민의 힘을 너무나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국민의 힘이 '알 수 없는 힘'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5·16은 성사될 때도 '알 수 없는 힘'의 지배를 받았고, 2차로 무너질 때도 또 다른 '알 수 없는 힘'의 지배를 받았다.
#5.16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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