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 교수가 우주를 노래하는 시를 쓰면

[시골에서 시읽기] 김익진 <기하학적 고독>

검토 완료

최종규(함께살기)등록 2017.05.29 08:43
'RWTT Aachen 공대'를 마친 뒤에, 대학교에서 '신소재공학과 교수'로 일하는 김익진 님이 선보인 시집 <기하학적 고독>(문학의전당 펴냄)을 만나면서 새삼스럽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이른바 '공대생'을 지나 '공대 교수'가 된 분이 시를 쓰고, 더구나 시집을 내다니 말이지요.

그러나 공대생이라고 해서 시를 못 쓸 까닭이 없습니다. 공대 교수라고 해서 기계만 만지고 기계 이야기만 하란 법이 없습니다. 인문대생만 글을 쓰란 법이 없고,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만 시를 이야기할 까닭이 없어요.

우주의 한복판에서 물어본다
우린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가?
누가 은하계의 시스템을 운전하는가?
어둠의 빈 공간에서 감마선을 따라,
별처럼 빛나던 당신의 눈을 기억하며
부드럽게 코스모스의 중심으로 날아간다. (태양이 설정한 대로)

겉그림 ⓒ 문학의전당

문학을 배워서 문학을 펴는 이가 이야기하는 '우주'하고, 공대 교수가 시로 담는 '우주'는 서로 같으면서도 다르구나 싶은 대목을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마음으로만 우주를 생각하는 이야기하고, 몸으로 늘 우주를 살피면서 이를 시로 담아낼 적에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르구나 하는 느낌이 흐릅니다.

우리가 선 곳은 어디일까요? 우리는 우주 가장자리에 있을까요, 아니면 우주 한복판에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지구에서 가장자리일까요, 아니면 지구 한복판일까요?

중심은 모든 곳에 있으나
경계는 어느 곳에도 없다
신은 어디에나 있으나,
알아볼 수가 없다 (좌표의 소멸)

바람은 우주의 교향곡
창가를 스치는 한순간의 삶은
딱 한번 반짝이는 울림 (객실 열병)

얼핏 보기로는, 또 다른 나라 눈길로 보기로는, 한국은 '극동'이라고도 합니다. 이 '극동'은 서양 제국주의 눈길로 바라본 말씨라고도 해요. 서양에서 보기에 유라시아 대륙 '끝'에 한국이 있거든요.

이와 달리 '지구본'으로 본다면 한국은 '동쪽 끝'일 수 없어요. 지구본으로 본다면, 아니 지구 테두리에서 본다면, 한국은 동쪽이 아니요 유럽은 서쪽이 아니에요. 한국이든 유럽이든 저마다 다른 '한복판'입니다. 남쪽도 북쪽도 없고 위도 아래도 없어요. 모두 한복판이면서 서로 이웃입니다.

시집 <기하학적 고독>에 흐르는 이야기마따나 "중심은 모든 곳에 있(좌표의 소멸)"다고 할 만합니다. "경계는 어느 곳에도 없"다고 할 만하고요. 다만 "신은 어디에나 있으나, / 알아볼 수가 없다"는 말처럼, 어쩌면 우리는 '너와 나'라는 금이라든지 '동녘과 서녘'이라는 울타리를 세운다고 할 만해요.

눈부신 광선은 잠시 빛나겠지만
점자의 곡면과 요철을 배우듯
부서진 조각을 더듬어보면
시간은 매초마다 무한대다 (부서진 퍼즐)

별은 생을 조용히 마감하지 않는다.
온힘을 다한 후, 초신성으로
잠시 은하 속 별지에 머물지만,
결국 수백억 개의 별보다 장열하게 산화한다 (그때가 오면)

"바람은 우주의 교향곡(객실 열병)"이라는 말을 곱씹습니다. "시간은 매초마다 무한대다(부서진 퍼즐)"라는 말을 되씹습니다. 날마다 부는 바람은 얼핏 지나치자면 아무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한테 찾아오는 바람을 나무 곁에 가만히 서서 맞이해 보면, 늘 다르게 울려퍼지는 노랫소리라고 느낄 수 있어요. 때로는 교향곡이 되고, 때로는 트로트가 되다가, 때로는 동요가 되어요.

우리는 흔히 '시간이 없다'나 '시간이 모자라다'고 말하지만, 정작 시간은 늘 '끝없이(무한대)' 있다고 할 만해요. '끝없이' 있는 시간이지만 '끝'을 잊은 채 '없는 시간'이라고만 여기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느긋하지 못한 나날이면서, 넉넉하지 못한 살림인 탓이라고 할까요. 하루를 더 느긋하게 마주하지 못하면서, 아침저녁을 한결 넉넉하게 맞아들이지 못한 탓일 수 있어요.

삶이란 무대 위엔 시나리오가 있었고, 치밀한 논리가 있었다 태양은 죽어가고 지구는 식어가며, 대가기 만들어졌다 그 후에 물이 생겼다 그리고 인간이 왔다 우주 역사에 비해 인류는 이슬처럼 보잘것없다 하지만 사유의 힘이 있다 이 모든 기적들! 신은 뛰어난 수학자였다 (신은 수학자다)

우리는 단순한 방랑자가 아니라
분명 우주의 공간을 갖는 점령자다
시간에 따라 존재의 형태만 다를 뿐
우리는 그 안과 밖에 존재한다 (중력의 법칙)

하느님(신)은 '생각하는 힘(사유의 힘)'으로 온누리를 지었다고 바라보는 시집 <기하학적 고독>입니다. 빈틈없는 생각으로 하나하나 아름답게 이 삶을 지어낸다고 여기는 시집 <기하학적 고독>입니다. 이리하여 공대 교수이자 시인은 "신은 수학자다" 하고 외칩니다. 온누리를 새로 지은 손길은 바로 '수학'이라고 말해요.

어느 모로 본다면 어버이가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돌보는 살림도 '수학'일 수 있어요. 밥 한 그릇을 지으려고 밥물을 맞춘다든지, 간을 살펴 국을 끓여내는 손길도 '수학'이라 할 만합니다. 된장이나 김치도 '수학'이 될 만하고, 반죽으로 빵을 굽거나 떡을 찧는 모든 살림살이도 '수학'이 될 만해요.

빨래한 옷을 정갈하게 개는 손놀림도 수학이 될 테지요. 어떻게 개야 가장 이쁘면서 구김살이 안 지도록 하는가 하고 살피기에 수학입니다. 양말을 개어 서랍장에 넣을 적에 어떻게 개야 더 많이 알뜰히 넣느냐를 헤아리는 마음도 수학이 될 만해요.

여태껏 한 번도 안아주지 못한
너를 안아주고 싶다
꺾이고, 밟히고, 상처 난 얼굴로
쫓아오는 그림자 (그림자를 안아주다)

삶마다 흐르는 이야기는 모두 문학이 될 만하다고 느낍니다. 누구나 이녁 삶을 시로 담아내어 펼칠 만하다고 느낍니다. 아이를 돌보는 살림도, 공대 교수로 일하는 삶도, 오로지 시를 쓰는 하루도 얼마든지 시로 피어날 만하다고 느껴요. 시골에서 낫질을 하거나 호미질을 하는 살림도 시로 쓸 만해요. 도시에서 전철이나 버스로 출퇴근을 하는 하루도 시로 쓸 만합니다.

시로 못 쓸 만한 이야기란 없어요. 이 지구가 태어난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수학을 찾아낼 수 있고, 철학이나 믿음이나 문학을 헤아릴 수 있어요.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으레 못 느끼는 그림자를 안아 보려는 마음을 시로 그리고 노래로 부를 수 있어요.

시 한 줄이란, 문학으로 빚은 책이란, 시에 담는 삶이란, 문학으로 펼치는 살림이란, 늘 우리 곁에 있지 싶어요. 우리가 스스로 바라보려는 눈이 있으면 비로소 느끼면서 시 한 줄을 쓰고 시집 한 권을 엮을 만하지 싶어요.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시골지기는 시골지기대로, 회사원은 회사원대로, 또 공대 교수는 공대 교수대로 저마다 삶과 살림을 새로운 눈길로 마주하면서 시를 씁니다. 이러면서 '수수께끼 지구와 우주'를 찬찬히 밝혀 봅니다.

그나저나 공대 교수는 공대생한테 이공계 학문만 가르칠까요? 공대생한테 공대 교수로서 시를 가르친다면 어떤 이야기가 샘솟을 만할까요? 무척 재미나리라 생각해요.
덧붙이는 글 <기하학적 고독>(김익진 글 / 문학의전당 펴냄 / 2017.4.20. /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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