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씨, 에이씨" 이건 욕이 아닙니다

버스터미널에서 본 흥미로운 풍경

등록 2017.05.21 15:41수정 2017.05.21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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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백 가까운 나이에 지인이 결혼한다고 했다. 축하하러 가는 길, 오랜만에 고속버스를 탔다. 결혼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콧물감기 때문에 약을 먹었다. 약효 탓인지 졸음이 쏟아졌다.


고작해야 열 좌석 남짓할 정도로 좁고 한산한 고속버스 대합실 한구석에 앉아 잠을 청했다. 조그만 매점 벽기둥 가까운 곳이었다. 쏟아지는 잠 탓에 벽기둥에 머리를 대고 자다 깨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버스표를 판매하는 창구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사리를 걸친 여성 둘이 고속버스 매표 창구 앞에 있었다. 흑갈색 피부에 오뚝한 코와 큰 눈에 제법 체격이 큰 아리안계로 보이는 여성들은 창구 직원과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양측 모두 몇 가지 영어 단어로 의사를 표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름 통하는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서울, Seoul"
"서울?"
"버스, 히어, Bus, here?"
"히어!"
"터마로우, Tomorrow?"
"터마로우!"

그다음부터 주고받는 말에 살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리안계 여성들이 마치 삿대질하듯이 손가락을 하늘을 향하며 말하는 순간이었다.

"에이씨, 에이씨 풀, A/C, A/C Fu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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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에어컨 아리안계 여성들은 버스 천장에 달리는 에어컨 위치를 가리키듯 손가락질을 하며 에어컨이 되는지를 물었다. ⓒ 고기복


오랫동안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며 그들의 언어습관에 익숙하고, 많은 동남아시아 대중교통을 경험해 봤던 나는 아리안계 여성이 무슨 뜻으로 '에이씨, 에이씨 풀'이라고 하는지 금세 눈치챘다. 아리안계 여성들은 "그 버스는 에어컨이 빵빵하냐"는 뜻으로 묻고 있었다. 동남아에서는 에어컨이 작동하는 버스와 작동하지 않는 버스는 가격 차이가 상당하고, 서비스 품질도 다르기 마련이다. 모든 차량이 에어컨 작동이 되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며 표를 예매하는 경우가 없는 한국에서는 생소한 풍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창구 직원은 '에이씨'라는 말에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한국 욕인지, 영어 단어인지 구분하지 못해서인지 모르지만, 뜬금없는 질문에 가만히 있자, 아리안계 여성이 다시 말을 이었다.

"에이씨, 에어컨디션?"
"에어컨디션!"

그제야 창구 직원은 외국인이 원하는 게 무슨 뜻인지 감을 잡았다. 양측의 대화는 다시 이어졌고, 아리안계 여성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표를 사고 터미널을 떠났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터미널을 나서는 그들을 보며 이주노동자 한국어교실에서 공부하는 이주여성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양측이 버스표 예매를 위해 서로 열심히 이야기하는 동안 뒤에 줄을 서 있던 다른 한국인들은 묵묵히 있었다. 갈 길 바쁜 사람들이었다면 다들 한 마리 했겠지만 드문드문 버스가 있는 곳이라 그런지 손님들은 양측이 실랑이를 하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기다려줬다. 참 후한 인심이었다.

아리안계 여성들은 에어컨 빵빵한 버스를 타고 다음 날 어딘가 갈 모양이다. 창구 직원은 "에이씨 에이씨 풀"이라는 말에 상대방이 바보라고 욕하고 있는 건 아닌지 순간 당황했는지 모른다. 버스를 타면서 에어컨 빵빵하냐고 묻는 경우가 흔치 않은 대한민국에선 '대략 난감'이었을 상황을 창구 직원은 잘 감당했다. 미소가 고운 사람이었다. 상황이 끝나고 환하게 웃는 창구 직원은 영어가 서툰 외국 여성들을 위해 수준을 맞춰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혜의 왕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했던 '듣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에어컨 #이주노동자 #한국어 욕 #고속버스 대합실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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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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