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가 되어버린 소녀들, 어쩌다가

에마 클라인의 <더 걸스>를 읽고

등록 2017.05.25 08:04수정 2017.05.25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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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가 짜증스러운 날이 있다. 내 생(生)을 뒤흔들 만큼 큰일은 아니지만, 사소한 이해관계들이 얽히고 얽혀 모든 것이 힘에 부치고,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듯 불편하게 여겨지는 날. 그런 날 이 책을 펼쳤다. <더 걸스>, 오직 제목만으로 무턱대고 한없는 발랄함을 기대하며.

내 바람은 완전히 빗나갔다. 책은 결코 발랄하지 않았다. 정신이 번쩍 들며 새삼 깨달았다. 어디 나의 소녀 시절이, 그리고 내가 아는 '소녀들'이 오직 발랄하기만 하던가. 어린아이도, 어른도 아닌 어정쩡한 그 시기를 한없이 고민하고, 방황하고, 때로 절망하며 우리 모두는 성장하지 않았던가. 그들을 마냥 '풋풋함'이라는 닳고 닳은 틀로 바라보려 하는 것은, 그 시절을 지나온 자들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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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걸스> 겉표지. ⓒ 아르테

치밀한 심리묘사에 푹 빠져 내 앞에 닥친 일들을 잠시나마 잊어갈 때쯤, 뒤늦게서야 표지의 의미심장함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인생에 바라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중년 여성 이비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우연히 며칠을 함께 지내게 된 십대 청소년들을 보며, 자신의 옛 기억을 떠올린다.

그녀의 옛 기억이란 뭘까. 조금은 방황했고 철 없던, 그러나 풋풋한 옛 시절일까. 아니올시다. 그녀의 회상은 1969년,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희대의 살인 사건이 벌어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아이를 포함한 무고한 사람 여럿을 잔악무도하게 난도질해 죽인 끔찍한 살인 사건(역자 후기를 통해, 그해 실제 발생했던 찰스 맨슨 살인사건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책의 핵심은 그 사건을 파헤치는 데 있지 않다. 그 사건에 연루될 뻔했으나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열네 살 소녀 이비를 중심으로, 아직 어른도, 어린 아이도 아닌 소녀들의 동경, 질투, 욕망, 피지배욕구, 불안정성, 타락의 과정 등이 치밀하게 묘사된다.

이비와 엄마, 그 모녀 간의 감정 묘사 역시 탁월했다. 바람 난 아빠를 미워하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엄마 또한 미워하는 이비. 십오년 간 살아온 남편과 헤어지고 다시 세상과 만나기 위해 발악하는 엄마. 그 모녀의 애증.

이비가 나중에 살인까지 저지르는 그 집단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수전에 대한 동경이 그 시작이었음도 주목하게 된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상류층 소녀 이비의, 가진 것이라곤 옷 한 장도 없어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아가는 비쩍 마른 수전을 향한 동경.


살인자가 되어버린 소녀들은, 왜 러셀이라는 사이비 교주같은 인물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까. 러셀이 어떻게 소녀들을 열광적인 살인자로 만들 수 있었는지는, 다음 문장들로 뼈아프게 그려볼 수 있다.

"수전과 소녀들은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용되지 않는 자아의 근육이 점점 더 늘어지고 쓸모없어졌던 것이다. 그들 모두 옳고 그름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에 살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됐다. 언젠가 그들에게 있었던 직감의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약간의 통증을 일으키던 인식 같은 것들조차도. 설사 그것들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졌다고 해도 이제 뭐가 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전세계 어디에나, 아픈 십대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노리는 불온한 세력들도 존재한다. 이비는 자신 또한 다른 소녀들과 다르지 않았을 수 있음을 인지한다. 수전 덕분에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지만, 어쩌면 그녀 역시 살인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가질 수 있었던 그 후의 인생은 선물인 동시에, 형벌이었다.

"나는 방관자의 망가진 인생을 얻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까 봐 두려운, 죄 없는 도망자."

그렇게 방관자적 인생을 살아온 이비는, 며칠을 함께 보내게 된 새셔를 보며 자신을 떠올리고, 위태로운 청소년기를 보내는 제2의, 제3의 이비들을 깊이 연민한다.

"가엾은 새셔. 불쌍한 여자애들. 세상이 그 애들에게 사랑의 약속을 잔뜩 먹인다. 그들은 절실하게 사랑을 원하지만 결국 사랑을 얻는 것은 얼마나 소수이던가. 달콤한 팝송들, 카탈로그에 '황혼'이나 파리' 같은 단어들과 함께 등장하는 드레스들. 그런데 그 꿈들은 너무도 폭력적인 힘에 의해 사라지고 만다. 청바지 단추를 잡아 뜯는 손. 버스에서 남자가 여자친구에게 호통을 쳐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지. 새셔를 보니 슬퍼 목이 잠겼다."

그렇게 새셔를 연민하는 것으로, 고통스러웠던 지난 날을 돌아보는 것으로, 이비는 세상과 다시 만날 것을 암시한다. 

책은 성장소설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남들보다는 거친 성장기를 보낸, 이제는 여인이 된 소녀의 이야기. 절망을 이야기하는 동안, 끝내 누구도 '성장하지 않는 성장소설'일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 이비는 달라질 수 있음을, 이제는 세상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음을 예고하는 것으로, 내게 기쁨을 주었다.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희망을 보여주는 에마 클라인의 능력은 다음 구절로도 확연히 드러난다.

"죽음은 나에게 호텔 로비 같은 것이었다.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좀 세련되고 불이 환하게 켜진 곳. 시내에서 어떤 남자애가 위조 복권을 팔다가 잡힌 뒤 지하실 방에서 총으로 자살했다. 나는 피가 엉긴 축축한 방 안이 아니라 방아쇠를 당기기 전의 편안한 순간만을 생각했다. 세상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제된 것처럼 보였을까. 모든 실망스러운 일들, 처벌과 모욕이 있는 보통 삶의 모든 것이 한 번의 정연한 동작으로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삶엔 언제나 복병이 등장한다. 내가,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줄 알았어? 너를 마냥 행복하게 두지 않겠어! 하며 튀어나오는 넘기 버거운 장애물들. 그 높고 낮은 허들 앞에서, 깊게 심호흡하고 다시 뛸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책이다.

우리는 모두 무지와 방황과 혼돈의 시절을 나름의 방식대로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고, 스스로를 응원하게 만드는 소설. 그 무지와 방황과 혼돈은, 안타깝게도, 생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테지만, 주름살과 함께 얻은 알량한 삶의 지혜가 우리에게 있지 않던가. 장애물 앞에서 여유를 보일 수 있는 배짱이나 부려보자. 까짓 거 못 넘으면 어떤가. 다치기 밖에 더하겠나, 하는 심정으로.

더 걸스

에마 클라인 지음, 정주연 옮김,
arte(아르테), 2016


#더 걸스 #에마 클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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