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 등 온갖 감정이 열폭하는 '잠실동 사람들'

계층과 지역에 대한 갈등을 다룬 소설, 정은아 작가의 <잠실동 사람들>

등록 2017.05.25 08:23수정 2017.05.25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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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잠실동 사람'이었다가 최근까지 청량리동에 살았다. 두 지역은 같은 서울이면서도 몹시 다르다. 책을 읽기 전부터 나는 두 곳에서 관찰되는 차이점, 문화의 격차, 사람들의 다른 점들에 몹시 매료되어 있던 차였다.

이를 테면, 청량리에서는 예쁜 아기를 유모차에 태워서 산책을 나가면 십중팔구 건너편에서 오는 행인들이 말을 붙인다. "너 참 예쁘게 생겼구나", "얘는 몇 살이에요", "아가, 너 어디 가니?" 등등. 그러나 잠실에서는 제 아무리 예쁜 아기를 태워 나간들 이렇게 말 붙여오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생활에서 느껴지는 차이 말고도 두 지역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차이가 수도 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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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동 사람들> ⓒ 한겨레출판

나는 사실 제대로 역마살을 펼치며 살아왔다. 부산에서 유년기를 나고 서울 강남으로 올라와서 중학교까지 다니다가 송파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에 유학을 다녀와서 청량리동에 살았다. 지금은 상하이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나라 지역주의를 두루 섭렵했다고 할 만한 흥미로운 이력을 지녔다.

한 가지 오해를 미리 풀자면, 꼭 부자가 아니더라도 미국 유학을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실제로 내가 만났던 외국 학위자들은 대부분 장학금으로 공부를 마쳤다.

국비유학, 사설기관 장학금, 혹은 나처럼 미국 정부나 대학으로부터 받는 장학금 등 채널은 꽤 다양하다. 다만 모든 것을 떨치고 떠날 수 있을 정도의 자본적 여유는 필요할 텐데, 나는 그것을 20대에 학원 강사로, 번역사로,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벌었고, 일부는 집에 기대기도 했다.

만일 내가 집안 식구를 부양해야만 하는 막막한 집안의 장녀였더라면, 제아무리 미국 식당에서 접시를 나르는 웨이트리스 일을 해본들, 아무리 하고 싶었던 공부였기에 이 악물고 버텼다 할지라도, 7년 가까이 버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의 계층을 자식이 바꾸기 어렵다는 말이 요즘 회자되는 것일 게다(그런데 이런 생각들은 나중에 공부를 마치고서 청량리에 자리잡고 난 후 하게 된 것이었다. 그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떠났고 일했고 공부했고, 하루하루 살아남는 데에만 집중했다. 먹고사는 게 문제가 되면 계층 따위에 연연해할 여유가 없어진다).


정아은의 <잠실동 사람들>은 이런 많은 생각들을 불러 일으키는 좋은 책이었다. 소설이면서도 르포처럼 읽히고 다큐멘터리처럼 그려졌다. 자칫하면 지루해질 수 있는 구성임에도 인물들의 심리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거역할 수 없는 힘이 흡입력 있게 전달됐다.

파노라마식 구성을 선택한 것이 가장 특징적이었는데,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여대생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작가의 시선은 잠실에 사는 거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아우른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급 브랜드 아파트와 골목골목 들어선 단독주택들.

반지하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계층마저 낮다. 그들은 과외 선생으로, 학습지 교사로, 가사 도우미로 고급 브랜드 아파트의 공간을 들락거린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세상과 아파트의 경계인 담장을 넘을 때마다 처지를 비관하거나 신분 상승에 대한 꿈을 되새긴다.

그래도 '잠실동 사람들'에서 무일푼이나 잘생긴 과외 선생은 작정하고 부잣집 사모님을 유혹하진 않는다. 오히려 과외 선생을 두고 욕망을 품어보는 쪽은 사모님이다. 그녀는 과외 선생의 넓은 가슴팍을 몰래 훔쳐보면서 혼자서 가슴을 두근댄다.

이런 그녀의 삶은 여유롭고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고 걱정거리라곤 이웃이 쓰는 고급 찻잔을 따라서 사야하는데 돈이 부족하다는 것 정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길 꿈꾼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내가 잠실에서 소년기를 보냈기에 더 공감이 갔다. 송파에서 롯데월드가 건축되어 가는 것을 보았고, 거기서 첫사랑 까까머리 총각과 영화를 보고 설레는 데이트를 했던 나로서는, 송파가 강남3구라고 불리는 것이 다소 어색하다.

내 생각에 잠실은 송파의 중심에서 강남을 한없이 바라는 곳, 그러면서도 강북에 대해서는 우월감을 갖는 다소 희한한 뽕밭이다. 인간의 열등감, 상향 욕구, 비교우월주의 이런 것이 요새 애들말로 열폭하는 지역임에 분명하다.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데에 잠실을 무대로 고른 것은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작가가 좋아져서, 작품이 맘에 들어서, 작가의 블로그에 가서 팬레터도 남겼다 (작가의 블로그 주소는 책 날개에 적혀 있으니 확인해 보시길). 작가는 친절하게도 내게 답장도 남겨주었는데,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계층 간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고 했다. 정아은 작가가 앞으로도 좋은 작품 많이 발표해주길 계속 응원할 생각이다.

잠실동 사람들

정아은 지음,
한겨레출판, 2015


#잠실 #청량리 #계층 #지역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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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작가, 임학박사, 연구직 공무원, 애기엄마. 쓴 책에 <착한 불륜, 해선 안 될 사랑은 없다>, <사랑, 마음을 내려 놓다>. 연구 분야는 그린 마케팅 및 합법목재 교역촉진제도 연구. 최근 관심 분야는 환경 정의와 생태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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